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32
132. 외줄타기(6)
허둥지둥 후드를 잡아당겨 얼굴을 가렸다. 그럼에도 이미 내 정체를 유추한 듯 느껴지는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다니엘 형?”
“…….”
기어이 설명을 듣던 학생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학생의 행동은 다니엘이라는 선생의 제지로 멈췄다.
그는 허리춤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내 입가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서서 학생의 걸음을 재촉하듯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머지는 돌아가서 이야기할까?”
***
“후작님…….”
“……알았어, 알았어.”
서류 처리할게. 한다고.
이젠 아예 애처롭기까지 한 단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래, 언제까지고 서류를 미뤄 둘 수는 없지. 마음 단단히 먹고 책상 위 종이를 내려다봤는데…… 와, 진짜 하기 싫다. 전쟁 때문에 서류가 더 많아졌어.
‘몸이 찌뿌둥해서 더 하기 싫은 건가?’
정신도 차릴 겸, 기지개를 켜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상체를 한껏 젖혔다. 눈앞에 검이 스쳐지나간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응?!
“마스… 후작님!”
미친, 뭐야! 왜 검이 눈앞을 지나가는데!
화들짝 놀라 생각할 것도 없이 튕기듯 상체를 세우며 벌떡 일어섰다.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누군가의 턱과 내 연약한 이마가 빠악! 소리를 내며 충돌한 것도 그때였다.
“윽…!”
“큭!”
아파라… 한순간 눈앞에 불꽃이 튄 걸 보면 어지간히 세게 박은 것 같은데…… 부딪힌 녀석은 괜찮으려나? 걘 턱이잖아.
급히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이마를 몇 번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은 습격자와 녀석의 목에 검을 대고 있는 단이 점차 트이는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이제 보니 검을 대고 있는 수준이 아니다.
‘너 뭐 하니… 배후도 알아보기 전에 죽이려고?’
이미 살을 일부 파고들어 간 날붙이.
피를 잔뜩 내고 있는 살벌한 그것을 질린 눈으로 보다가 단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를 기가 막히게 눈치챈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보더니 다시 경계하듯 습격자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감탄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아까부터 오한이 든다고 하시면서 서류 작업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시더니….”
“으응?”
“누가 숨어들어 왔다는 걸 눈치채고 경계하느라 그러신 거였군요.”
“으, 응…?”
“설마 ‘오한’이 신호였습니까? 눈치채지 못해 죄송합니다.”
전혀 아닌데… 사과 안 해도 되는데…….
욱신욱신 아려 오는 이마의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눈을 데굴 굴렸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뻔뻔해지고 있었다.
***
단이 바깥에 소리쳐 부른 병사들이 몰려와 습격자를 체포해 가기까지, 숨어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본 또 다른 그림자가 침묵 끝에 중얼거렸다.
“내가 나설 것도 없었군.”
역시 영웅이라는 것인가.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숨어 있는 이들을 눈치채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렇게 숨어 있는 그림자 자신까지도.
자책하는 수하에게 모를 수도 있다고 위로할 때 제가 숨어 있는 곳을 힐긋 보기도 했으니 확실하다.
‘……나야, 공돈 받으니 좋지만.’
앞으로 있을 수많은 습격자들로부터 그를 지켜 달라 했던가.
제가 없어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것 같다만, 일단 돈을 받았으니 일을 하긴 해야겠지.
방금 실패해 놓고도 질리지 않는지 또다시 슬금슬금 접근하는 습격자들을 향해 그림자가 움직이며 소리 없이 조소했다.
‘누구는 돈 받고 죽이려 들고, 누구는 돈 받고 지키려 들고…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모르겠군.’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끔하게 정리되고 있는 상황을 멍청히 지켜보다 비척비척 걸어 책상 앞에 앉았다.
거슬리던 시선을 치워 버렸으니 이제 정말 일하시려는 것이냐며 단이 기쁘게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 같은데… 듣고 싶지도 않아 그냥 흘려 넘기고 무시했다.
‘좋아, 조금 전 일은 없었던 일이다.’
얼떨결에 습격자를 박치기로 제압했다든가, 그걸로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오해를 받았다든가… 아무튼 그런 쪽팔리는 일은 이제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이다. 내 머릿속 과거 기록 목록에서 지워 버리는 거야.
‘……그냥 닥치고 서류 작업이나 하자.’
잡생각 지우기엔 이게 최고겠지.
한숨을 푹 내쉬며 펜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안쪽 주머니에서 미미한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기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왜 하필 지금…….’
진동이 느껴지는 쪽은 다름 아닌 왼쪽.
그러니까 왼쪽 안주머니에 든 것이… ‘통신석’이었던가. 마왕과 연결되는 통신 장치.
오른쪽은 황제랑 연결되는 ‘통신기’고.
어느 쪽이든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장소를 옮기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쪽에서 서류 분류를 하던 단이 기민하게 고개를 들고 반응했다.
“어디 가십니까?”
“잠깐 밖에. 금방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따라오지 말고.”
“…….”
“몰래도 안 돼.”
“예에…….”
김샌 듯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군막을 나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번엔 뭘 시키려나.’
지금이야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잠하다지만, 제국과 마계가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극초반에는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두 진영을 바삐 오가며 선두에 서야 했다.
단이 영웅 데온 하르트와 0군단장의 전투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소문이 났다고 말했었지. 그럴만도 하다. 그렇게 굴려 댔으니까! 오죽하면 내 기억의 대부분이 날아갔겠는가!
‘이쪽에서 나를 선두에 세우면, 저쪽에서도 불러다가 선두에 세우고! 하다 하다 이런 걸로까지 승부를 하냐고!’
애도 아니고, 정말 너무하지.
덕분에 우리 미친개들과 0군단원들은 각 진영의 선봉으로서 서로에게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다. 리더가 같은 줄도 모르고 제대로 맞붙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하…….
‘……잠깐, 설마 그 소문 때문에 자중하는 건가?’
바삐 움직이던 걸음이 멈칫, 급격히 느려졌다.
소문을 억누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방법은 나를 사용하는 빈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선두에 세우는 것만큼은 피하는 편이 좋겠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그 서류 지옥에 갇힌 거구나!
깨달음을 얻었다. 빌어먹을.
……어쨌든 이쯤 왔으면 사람은 없겠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만, 그래도 혹시 몰라 주위를 보며 꺼지라고 무의미한 중얼거림을 남긴 뒤, 품에서 통신석을 꺼냈다.
“네, 통신 받았습니다.”
– 어, 데온. 바쁠 텐데 미안하지만 지금 네가 있는 곳에서 북서쪽으로 쭉 걸어가지 않을래? 그리 멀진 않고, 아마 네 걸음으로 1시간이면 될 거야.
갑자기요…? 게다가 1시간…?
아니, 잠깐. 여기서 북서쪽이면… 대놓고 최전방 경계선 근처잖아. 내 군막은 후방에 위치해 있으니까… 정확하게는 경계선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외진 장소가 되겠네.
‘이 마족이… 아무리 이쪽 경계선이 전투가 적고 분위기도 소극적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대뜸 이동하래? 중간에 누구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심지어 정확한 좌표도 없다. 방향을 잘못 잡아 이동했다가 대치 중인 경계선에 대놓고 불쑥 등장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끝이다, 끝!
그깟 방향 하나 잡는 게 뭐가 어렵냐고도 할 수 있겠는데, 애초에 경계선은 산에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을 잡기 어려운 데다 지형이 울퉁불퉁해서 마음먹은 방향으로 이동하기도 어렵다. 직진은 말도 안 되고.
–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말고. 혹시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내가 알려 줄게.
“아, 위치 추적…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단에게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서둘러야겠네.
엄지손가락으로 쇄골 위, 목 언저리의 낙인을 문지르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 아, 내가 말 안 했나? 미안, 놀랐겠다.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아닙니다.”
일부러 말 안 한 것 같은데.
– 그전에, 무기는 있지?
“네.”
– 그럼 됐어. 별거 아니야.
이것 봐. 일부러 말 안 하는 거잖아.
무기라면 잘 챙기고 다니는 중이다. 아예 완전 무장을 하고 있지. 상대가 마계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요즘 습격이 잦아져서 잘 때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 놓고 자고 있다.
황제가 가장 애용하는 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노릴 만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니 이쪽은 넘어가더라도, 마계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데 같은 인간을 공격할 정도로 여유가 넘친다는 것은 좀 놀랍다. 누군진 몰라도 얼굴 한번 보고 싶네, 진짜.
‘……그보다, 이유를 말 안 해 주니 불안한데.’
자꾸 별거 아니라고 얼버무리기만 하고.
……설마 날 죽이려는 건가?
‘정말?’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어느샌가 걸음은 멈춰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고민에 빠졌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돌아갈 수 있으나, 그러기엔….
‘…….’
아직까지도 엄지로 매만지고 있던 낙인을 뒤늦게 의식하고 손을 뗐다.
……그러기엔 그가 적이라는 확신이 없다. 나는 함부로 먼저 행동할 수 없는 위치고.
‘……이 생각은 봉인.’
깊고 무거워지려는 생각은 어느 순간 차단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더라? 기억을 재정비하던 그때, 이동하지 않는 내 위치와 침묵에서 무엇을 읽은 건지, 마왕이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아니, 정말 별거 아니라서 그래. 오히려 네가 실망해서 돌아가려고 할까 봐… 그래서 말 안 했지.
“…….”
– 정 믿음이 안 간다면 말할게. 대신 듣고 돌아가지 않기다?
“……일단 듣겠습니다.”
– 목적지에 마물 무리가 있어. 그리 많지도 않고, 너 혼자서도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인데….
좋아, 돌아간다.
– 데, 데온? 왜 돌아가는… 역시 시시해서 그래? 별거 아닌 일에 부르니까 짜증 났어?
“…….”
– 이해 부탁할게. 위치가 위치인 탓에 미리 치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따로 병력을 보내기엔 아까워서….
난 안 아깝냐. 나 하나 보내서 제물로 삼겠다, 이거지?
썩어 가는 내 표정이 보였다면 적어도 그의 말은 멈췄을 텐데. 내 속을 알 리 없는 마왕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너 하나를 보내고 그곳에 갈 병력을 다른 쪽에 돌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잖아? 게다가 지금 병력을 움직였다간 쓸데없는 경계를 사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요즘 황제가 예민해서 말이야.
“…….”
– 정 귀찮으면 대충 겁줘서 쫓아내도 좋아. 문제는 ‘마물’이 아니라 마물들이 있는 ‘위치’거든. 경계선 근처라니, 어떤 변수가 될지…….
마물에게 겁을 주는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사는 탈인간이랍니까.
일단 다시 방향을 바로잡아 이동하며 생각에 빠졌다. 통신석 너머로 들리는 마왕이 안도하는 소리가 괜히 거슬려 통신은 뚝 끊었다.
‘뭐, 길 잘못 들면 다시 연락 주겠지. 그보다….’
……마왕의 상황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까지 전투를 벌이기엔 의미도 없고 손도 아깝거든.
내가 지금 있는 이 경계선은 제국 내부에서도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계선이다. 이미 그보다 가까운 곳의 경계선 몇을 골라 두드리고 있는 마왕군이 굳이 이곳을 통해 진격할 이유가 없다는 뜻.
후방을 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거리가 거리인 탓에 목적으로 한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아무리 마물 처리가 목적이라고 해도 이곳에 병력을 보냈다간….’
그냥 두고 볼 리 없는 황제가 질세라 병력을 보내겠지. 무의미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물을 그대로 두기에는 마물이 인간과 마족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먹어 치우는 족속인 탓에 곤란하다. 심지어 꾸준히 동태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것에도 인력이 들어가니 결국 나를 보내 처리하는 것이 가장 깔끔했으리라.
‘나 안 강하다고…! 약하다고…!’
그것도 내가 강할 때의 이야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