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33
133. 외줄타기(7)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현 시국에 두 군주 중 누군가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눈앞에 닥친 죽음부터 피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 뒤에 다가올 죽음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내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를 벗어난 적이 없네.’
전쟁터에 나온 그 날부터 언제나 그래 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나’는 급격한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며 정신적 피로가 조금은 가셨다.
‘아, 약 땡긴다. 술도….’
술은 언제나 그랬으니 그렇다 쳐도 약은 이미 오래전에 끊은 것이건만, 요즘 들어 왜 이리 땡기는지.
어쨌든 일단 돌아간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걸음을 돌리던 그때, 품에 넣어 두었던 통신석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뭐지? 길을 잘못 들기라도 했나?’
방향은 제대로 잡았던 것 같은데….
짧은 의문을 가지며 통신석을 꺼냈다. 통신을 연결하자마자 들린 것은 앓는 듯한 짧은 신음성이었다.
“무슨… 제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까?”
– 아니. 데온, 준비하는 게 좋겠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날 수도 있겠어. 지금 마물이 그쪽으로 이동 중이야.
“……예!?”
나 지금 도망치려고 했는데.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리듯 땅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그래, 충분히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랬지. 어디 얼굴이나 한번 보자.
진동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한쪽 나무가 우지끈 부서지며 덩치 큰 마물 대여섯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핫.
‘저게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요? 진심이야?’
도대체 내 수준을 얼마나 높게 평가한 거야?
머릿수는 많지 않다더니, 확실히 그 수가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마물 무리에 비하면 적다.
적긴 한데….
‘덩치가 장난 아니잖아!’
나무가 부서졌다고! 부수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동한 건데!
침묵 끝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용케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차분히 상대를 불렀다.
“마왕님?”
– 어, 그래. 통신석을 켜 놓고 있으면 방해가 되겠지? 먼저 끊을게. 정리 다 끝내면 연락 줘.
뚝.
…….
“시이…발….”
통신석을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내던지고 온갖 분풀이를 다 하고 싶지만…….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통신석은 멀쩡하고 힘을 준 손만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한심한 모습.
물끄러미 그 꼴을 들여다보다가 손에 힘을 풀고 통신석을 품에 챙겨 넣었다.
그래, 일단 사는 게 먼저지. 안 그래도 약한 몸, 괜한 곳에 힘을 뺄 수는 없다.
“좋아, 어디 한번 누가 죽는지 보자 이 새끼들아.”
손에 익은 단검을 빼 들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놈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따라 고개가 점점 올라갔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말도 안 되는 덩치를 실감하고 정신이 나갔었나?’
그 뒤가 기억이 안 난다.
***
또 데온 하르트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댄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데온 하르트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정체 모를 인물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공작은 읽고 있던 쪽지를 조용히 손안에 구겨 쥐며 양 입꼬리를 올렸다. 시선이 올라가고, 앞에 서 있던 여타 귀족들과 눈이 마주쳤다.
……귀찮지만 지금은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순위에 맞겠지.
“그래서… 어쩐 일로 기별도 없이 저를 찾아오신 건지요.”
그것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말이지.
눈동자를 좌에서 우로 움직이며 천천히 눈앞의 이들을 훑었다. 익숙한 얼굴들. 이들이 귀족파만 아니었어도 당장 쫓아냈을 텐데.
미묘한 아쉬움을 차와 함께 삼키는 사이, 소파에 주르륵 앉아 눈치를 살피던 이들 중 하나가 용기를 쥐어짜내 과감히 입을 열었다.
“황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
“오.”
너무 과감하군.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만, 이렇게 당당히 꺼낼 말도 아니다. 미리 사용인들을 물려 두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들고 있던 잔을 느릿하게 내려놓았다. 일단 경청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자 용기를 얻은 듯 다른 이들도 소리 높여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제국이 불리한 전쟁이었습니다. 이겨도 손해, 져도 손해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아직 전쟁 초기이니 늦지 않았습니다.”
제국이 불리한 전쟁인 것도 맞고, 이기든 지든 손해인 것도 맞다.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것도 맞긴 한데…….
공작이 섬세한 손을 들어 턱에 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움직임에 따라 보라색 머리칼이 옆으로 사락, 흘러내렸다.
“굳이 제게 찾아와서 주장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폐하께 간언을 드리면 될 것을요.”
“황제는… 아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간언을 해 봤자 목만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황제는 특히 귀족파에게 가차 없으니까.
“……좋습니다.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무언가 방법이 있으신지요.”
“그.”
“참고로 이미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쪽에서 멈추고 싶다고 해도 마왕이 받아 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이 모든 것을 계산에 둔 방안이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썩 만족스럽지 못한 소식을 들어서 날이 선 상태다. 만약 꺼내 든 방안이 어설프기라도 한다면 각오해 두는 것이 좋으리라.
공작은 주먹 쥔 손안의 구겨진 쪽지를 조금 남은 찻잔에 넣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 듯 불길함을 느낀 귀족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들고 온 방안에 자신이 있는지 기어이 입을 열었지만.
“황제의… 목을 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반역 제의에 공작이 멈칫,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마왕은 제국이 이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물러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전쟁광입니다. 오히려 마계와의 전쟁을 반기면 반겼지 전쟁을 멈출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고 있지요. 그러니….”
“─황제의 목을 쳐 전쟁을 멈추겠다?”
“황제의 머리를 마계에 넘기면 마왕도 뜻을 알고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하…….”
멍청하긴.
저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공작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분노, 짜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들끓듯 올라왔다가 차가운 이성에 눌려 가라앉는다.
폭발하기 직전까지 치솟았던 급격한 감정의 여파 탓인지,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그게 마왕이 바라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르는지.”
“……네?”
“마왕이 선전포고 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네? 그야…….”
말끝을 흐린다. 혹시나 해서 잠시 기다려도 봤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저게 정말 제국의 귀족이라니.
“당연히 내분을 유도한 것 아닙니까. 인간계 내부의 분열과, 제국 내부의 분열을 노리고! 마왕은 인류를 상대로 이간질을 시도한 겁니다!”
아차. 답지 않게 언성이 높아졌다.
얼굴을 쓸어내린 공작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조금 전 집어넣었던 쪽지를 발견하고 차분히 내려놓았다.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 주제 때문에 사용인을 부를 수도 없으니 참는 수밖에 없나.
잠시 내려앉은 짧은 정적은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가 깨트렸다.
“귀족으로서의 기본 소양으로 역사는 배우셨겠지요.”
“네, 네… 그야 당연히…….”
“그럼 아시겠군요. 나라가 망하는 대다수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
또 대답이 없다.
이 나라는 글렀군. 군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신하들부터 글렀어. 황제도 역사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데 어디서 저렇게 멍청한 귀족들이 튀어나왔는지.
새삼 눈앞에서 세습제의 단점을 보게 되니 혁명을 외치는 이들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잠깐 든 충동에 불과하지만.
공작은 한숨을 삼키며 침착하게 답을 내놓았다.
“내분입니다.”
“아…….”
‘아…….’는 무슨.
물론 지금은 현 황제 때문에 외세의 힘으로 무너진 나라의 비율이 늘었다지만, 결국 역사를 통틀어 보면 거의 모든 나라의 멸망 원인은 내분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외세의 힘 탓에 무너진 것 같아도 정작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미 내분으로 위태로운 상태였던 경우가 많았지요.”
내분으로 인해 나라가 휘청일 때, 다른 나라가 툭 건드려서 와르르 무너지는 형식.
“하,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다양한 파벌을 나누어 대립하는 것은 이 나라가 제국이기 이전부터 해 온 일입니다. 공작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나라는 진즉에….”
“맙소사.”
정치적 대립과의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하다니.
절로 한탄이 나온다. 공작은 커튼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황망히 저들을 쳐다보았다.
“……누가 대립이 나쁘다 했습니까. 정치적인 대립은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 방금 전은….”
“다만 대립도, 황권 교체도 상황을 봐가며 해야 한다는 겁니다. 당장 나라가 멀쩡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해도 위태로울 판에, 외세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대립을 한다? 그건 미친 짓이지요.”
오늘따라 몇 번이나 혈압이 오르는지. 이성으로 누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공작은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모든 귀족들은 정치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기본적으로 본인들의 나라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파벌을 나누어 싸우더라도 외세가 침입을 시도하면 힘을 합쳐 몰아내야 하지요. 싸우는 것은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들이 지금 누구 때문에 잘 먹고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국민들을 지키는 것은 귀족과 군주의 제1순위 의무이거늘. 답답함에 목구멍까지 날 선 말들이 치민다.
그것들을 꾹꾹 눌러 삼키고는 깍지 낀 두 손을 다리 꼰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멍청히 저를 보는 이들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말이 조금 다른 곳으로 샜지만 이젠 아시겠지요. 지금 경들이 한 생각은 마왕이 유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애초에 마왕의 말을 어찌 믿겠습니까. 마족들은 거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대륙 전체에 자자한데. 황제의 목을 넘기고 평화를 약속받는다 한들 그들이 지켜 줄 리가요.”
“…….”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황제의 목을 친다는 것은 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인간계를 마왕에게 넘긴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경들은 다 무너진 나라에서 홀로 왕관을 쓰고 맞춰 주는 이 없는 주인 놀이를 하고 싶으신 건지요.”
물론 그런 실없는 소꿉놀이를 하기도 전에 이미 죽어 시체만 나뒹굴고 있겠지만.
어쨌든 의도한 대로 제대로 이해하긴 한 모양이다. 얼굴이 새하얘진 귀족들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아둔했습니다.”
“……폐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지요. 위에 선 자가 아둔한 것은 죄라고. 경들은 어째서 역사가 귀족들의 기본 소양 중 하나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어설픈 방안을 들고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방법을 방안이랍시고 들이미니 도리어 힘이 빠진다.
급격히 피곤해진 공작이 손을 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아, 데온 하르트 명예 후작의 뱀파이어설에 관한 소문의 진상 파악도….”
“……나가, 주시지요.”
“네…네!”
눈치를 보던 이들이 황급히 물러가고, 홀로 남은 공간에서 그는 저 멍청한 귀족들이 오기 전까지 보고 있던 쪽지를 떠올렸다.
‘습격은 하는 족족 실패하고, 독살은 독이 든 음식을 실수인 척 엎거나 먹기 전에 눈치채서 실패했다고…….’
거기에 이름 모를 누군가의 비호까지.
만만치 않은 실력에 더해 말도 안 되는 운. 솔직히 조금 허탈하긴 하지만….
‘……운이든 실력이든 성공할 때까지 밀어붙이면 언젠간 되겠지.’
아직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기에, 공작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라 했던 초기의 살인 의뢰를 거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