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34
134. 외줄타기(8)
임무…를 핑계로 마계에 가기 위해 데온 하르트가 자리를 비운 탓에 잠시 미뤄졌던 공작과 크루엘의 내기는 그가 제국에 귀환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패자는 승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먼저 데온 하르트를 죽인 사람이 승리하는 내기.
‘오늘도 살았군.’
몇 차례의 습격이 있었고, 몇 차례의 독살 시도가 있었는지,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고가 적힌 쪽지를 받은 크루엘은 데온이 하루에만 몇 번이나 생사의 갈림에 섰는지 계산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하지만 공작은 고작 이 정도의 실패로 포기하지 않겠지.
그렇기에 무기한으로 의뢰를 맡긴 것이다.
주머니에서 물 새듯이 돈이 빠져나가고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집요한 공작을 알고 있기에, 크루엘은 데온 하르트를 지켜 달라는 의뢰를 거두지 않았다.
***
공작은 살인 의뢰를 했고, 크루엘은 보호 의뢰를 넣었다. 그것도 같은 인물을 대상으로.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황제는 곧장 무어라 말하는 대신 자리에 앉아 눈을 반쯤 내리깔고 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초점을 맞추는가 싶더니 이내 눈꺼풀 아래로 숨어든다. 황제가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단도를 빼 들었다.
푸욱!
“……후우.”
가만히 서 있던 네메세우스의 시선이 꿰뚫린 황제의 왼손에 닿았다.
단도 손잡이를 쥔 채 천천히 숨을 내쉰 황제가 눈을 뜨고 그것을 뽑는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환부에서 피가 왈칵 솟구치자 네메세우스가 익숙하게 다가가 치료를 시작했다.
그에게 왼손을 맡긴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단도를 갈무리하고 잠시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든 황제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하나는 죽이려 하고 하나는 지키려 한다고.”
그것도 겉으로는 같은 편인 두 사람이.
심지어 데온 하르트는 본인을 지키려는 사람을 진심을 다해 증오하고 있으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우습다고 하기엔 얽힌 이야기가 너무도 무겁고, 그렇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황제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정말….”
“…….”
“안타까운 운명이군.”
그 안타까운 운명에 한 손 보탠 인간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황제가 언제부터 자격을 따져 가며 말을 했던가. 그는 뻔뻔하게 이 웃을 수 없는 희극에 감상을 남기고 다음 서류를 찾아 넘겼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손을 거둬 주십시오.”
“……습관이 되어서.”
저도 모르게 왼손 환부에 향하던 손을 거뒀다.
따라붙는 네메세우스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음 서류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이번 서류 역시 썩 좋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한숨을 담은 말이 흘러나왔다.
“또, 인가.”
“…….”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군. 이딴 헛소문을 퍼트릴 시간에 마족들을 상대할 방법이나 궁리할 것이지.”
마왕군의 0군단장과 제국의 영웅 데온 하르트의 전투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소문.
둘 다 얼굴을 가렸고 단검을 사용하며, 잔혹한 전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으니 충분히 의혹이 나올 만도 하다. 이러한 의혹들을 초장에 제거하는 것이 황제와 마왕의 몫이고.
“늘 그랬듯이, 조용히 처리하도록.”
“…….”
붕대를 감던 손이 멈췄다.
대답은커녕 아무리 기다려도 치료를 마무리 지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기꺼이 눈을 피하지 않은 네메세우스가 잠시 금안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정말 그 둘이 연관이 없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지금까지 별 물음 없이 시키는대로 일을 처리하던 그가 처음으로 이 소문에 관하여 질문을 던져 왔다.
분명 스스로도 적지 않은 고민을 했겠지. 그만큼 쉽사리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어 황제는 일단 침묵했다.
묘한 긴장감과 함께 정적이 내리깔린다. 영겁같이 느껴지는 시간 동안 서로를 응시하며 벌인 신경전 아닌 신경전에서 파생된 정적은, 황제가 시선을 다시 서류에 고정하며 깨졌다.
“짐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는 거짓을 답하지 않았고.
“……송구합니다.”
장군은 그 말에 담긴 뜻을 눈치챘다.
그에 무어라 덧붙이려던 황제가 신호가 온 통신기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통신기는 분명 데온 하르트와 연결된 것일 텐데.
‘무슨 일이지? 소문 탓에 아직 별다른 임무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손을 뻗어 통신기를 쥐며 나직이 명령했다.
“물러가라.”
“……예.”
***
한 놈만, 딱 한 놈만 제대로 족친다.
눈앞에서 본보기로 잔인하게 죽이면, 저 빌어먹게 덩치 큰 마물들도 겁먹고 물러나겠지.
데온은 눈이 뒤집혀 제게 달려오는 놈들을 보며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이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마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야.’
이 낙인이 있는 한, 마물의 습격을 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내게 덤벼들 생각을 했을까.
낙인에서 느껴지는 마왕의 기운을 이겨 낼 정도의 허기. 거기에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있는 데다 덩치도 작고 만만해 보이기까지 한 외형은 놈들의 망설임을 제거해 주었으리라.
“그래서는 안 되지.”
새빨간 눈동자가 광기를 담고 번들거린다.
다른 건 괜찮다. 이 약한 몸뚱이에 무언가가 더 얹어진다 한들 달라질 것도 없으니. 만만하게 비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피를 토하고, 몸 어딘가에 칼을 맞고, 팔다리가 날아가도 괜찮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만만하게 비치는 것만큼은 안 된다.
8년 전쟁에서 명성을 떨치고 마왕과의 첫만남에서 다소 과격한 등장을 했던 이후, 인간계와 마계 그 어디에서도 그를 우습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이 기분은 참 오랜만에 느껴 본다. 낙인 없이 만났던 이전의 마물들이야 제게 달려드는 것이 당연하니 상관없었지만, 낙인이 존재하는 지금 저들의 행동은 마왕의 기운을 무시할 정도로 내가 만만해 보인다는 의미이니.
“어서 와라 새끼들아. 오랜만에 내 역린을 건드렸구나.”
아주 제대로 죽여 줄게.
단검이 빙글 돌아가고, 엄지가 손잡이를 쓸 듯 몇 번 접혔다 펴진다.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깔끔히 내던진 채, 데온 하르트는 활짝 웃으며 양팔 벌려 상대를 맞이했다.
***
마물들이 겁에 질려 도망간다. 인간계의 누군가 봤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큰 충격을 받았겠지. 인간들에게 일정 이상으로 강한 ‘몬스터’는 상대의 강한 무위에 주춤거릴지언정 도망가지는 않는 것들이니까.
나는 꿋꿋이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아파…….’
손목이 아프다. 옆구리도. 다리도 근육이 죄다 끊어진 듯 아파 왔다. 피도 토했던 듯 입안에 비린 쇠맛이 감돌았다. 시선을 내리자 상의 대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정신 차리고 보니 몸 상태가 이 꼴이 되어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던지. 기억은 없지만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것 같다. 내 몸뚱이를 이렇게 섬세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거든.
‘어지간히 위험한 상황이었구나, 나….’
그나마 정상적인 몸 상태로 단 한 번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육체적 한계를 넘은 힘을 끌어와 사용하는 것.
‘아니면 패닉에 빠져서 무작정 기술을 사용했다든가….’
그걸 버티지 못한 육체가 작살나는 것은 당연했다.
……어떤 상황이었든 일단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어?”
멍청히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고통만 느껴질 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고 몇 번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던 내 시도는 간신히 일어섰다가 한 걸음 내디디기 무섭게 거하게 넘어지며 욱신거리는 손목으로 바닥을 짚고 나서야 끝났다.
소리 없이 바닥을 구를 정도로 끝내주게 아팠거든.
“하하, 망했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기어가야 하나. 여기서부터 군막까지의 거리가 어떻게 되더라. 그사이에 또 마물이 오면 어떡하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일단 마왕님한테 보고하자…!’
그리고 나 좀 어떻게 수습해 달라고 하는거야! 가벼운 인간 하나 챙기는 것은 다수의 병력이 아닌 마족 하나만 보내도 충분하니까!
고통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잘게 떨리는 손을 품에 넣어 뒤적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전투 후유증 때문인지 정신이 멍해서 그런데… ‘통신석’이 오른쪽이었지?
***
– 명을 완수했습니다. 바로 제국에 돌아갈 생각인데, 부상을 입어 거동이 힘듭니다. 도와줄 마족 하나만 보내 주시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
통신이 끊겼다.
의자에 몸을 느슨히 기댄 채 가만히 ‘통신기’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없이 망토를 걸치고, 검을 챙긴다. 제 상태를 대충 훑고 밖으로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네메세우스가 다가왔다. 황제는 익숙하게 따라붙는 그를 제지하고 손짓으로 다른 병사를 불러 명했다.
“구급약과 깨끗한 옷 한 벌 가져오도록.”
“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네메세우스가 불쑥 말을 붙였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
구급약까지는 그렇다 쳐도 고작 산책 가는데 깨끗한 옷을 챙겨갈 리 없다. 심지어 말도 준비했는데 이게 어찌 산책일 수 있을까.
……하나, 제게도 산책이라 둘러댄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평소라면 그의 뜻대로 물러났겠으나,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잠시 침묵하던 네메세우스는 입을 열어 통하지 않을 시도를 했다.
“제가….”
“됐다. 따라오지 말도록.”
당연하게도 단칼에 잘렸지만.
준비된 물건들을 챙긴 황제가 미련 없이 돌아선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망토 자락이 펄럭였다.
장군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계산하다가 제 불충을 깨닫고 눈을 감았다.
***
누워 있던 것을 조금 전 그 마물들에게 들켰다. 결국 완전히 쫓아내지도 못한 모양이다.
그래… 이 새끼들은 단순해서 한 가지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 한순간의 공포보다는 지속적인 허기가 더 영향력이 강할 것은 당연하다.
‘가만, 이거 거의… 임무 실패 아닌가?’
마물들을 쫓아내고 자리를 떴어야 했다. 그래야 멀리 가지 않은 마물들도 내가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르니 몸을 사리며 내 영역으로 유추되는 곳 밖까지 멀리 도망치지.
임무는 실패하고, 몸도 망가지고, 지금 내 목숨은 간당간당하고…….
하하. 자신감 넘치는 기세로 내게 달려오는 마물들을 보다가 웃었다.
‘좋네. 아주 좋아.’
물론 반어법이다.
생존본능에 의거한 의지를 끌어올려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고 간신히 일어섰다.
고통 탓인지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뚝뚝 떨어지는 식은땀은 어쩔 수 없지만 표정은 감출 수 있다. 단검을 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정면이라 유추되는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전 공포의 여파가 완전히 가시진 않은 듯 거침없던 발소리가 일순간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그냥 가라… 제발. 응?’
안 그럼 죽는다고. 내가.
기대가 무색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발소리가 다시 빨라졌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땅의 진동이 저들의 거친 기세를 내게 전달한다.
희뿌옇던 시야가 서서히 개이며 세상이 망막에 비치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로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코앞까지 당도한 마물과─
서걱!
─그것을 두부 자르듯 가르는 검 한자루였다.
‘……마왕이 보낸 마족인가?’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검을 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겨 그 주인을 보았다.
찬란한 금발과 맹수 같은 금안. 아주 익숙한 분위기.
“어…….”
댁이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