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35
135. 외줄타기(9)
신음처럼 새어 나온 억눌린 경악에 나를 힐긋 본 황제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남은 마물들을 훑더니, 검을 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볍게 긋는다. 동시에 두 마리의 상하체가 분리되었다.
‘누구는 죽을 뻔했는데….’
새삼 황제의 실력이 실감난다.
나머지 정리는 순식간이었다. 고요해진 숲에서 검을 가볍게 휘둘러 마물의 체액을 털어 낸 그가 검집에 잘 갈무리하고 나를 돌아본다.
“……거동이 힘들다고 보기엔 생각 외로 괜찮아 보이는데…….”
“……아, 제국에 영광을…!”
“그건 아닌가 보군. 독기였던가.”
서둘러 인사를 하려다 끝내 무너지는 육체를 그가 무 뽑듯 쑥 잡아 올렸다.
……팔을 잡아 줬으니 나름 부축이라고 봐야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쪽팔릴까.
그의 손 하나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나를 훑던 황제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이 말을 꺼냈다.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군. 그렇지 않은가, 0군단장?”
“……!”
“통신기와 통신석을 헷갈린 모양이던데. 둘 다 마력석이니 헷갈릴 만도 하다만, 다음부터는 주의하는 것이 좋겠군. 첩자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쓰겠나.”
통신석이 왼쪽이었구나…!
몸 안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간신히 제 색을 찾고 있던 세상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세상 그 무엇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질려 있겠지.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은 듯 억누를 새도 없이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확 솟구쳤다.
“우욱…! 콜록!”
“이건 내상인지, 저주 탓인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붉은 액체를 보며 나직이 혀를 찬 그가 천천히 나를 자리에 내려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눈의 초점이 잘 맞지 않는데.”
“아… 이건…….”
“변명은 됐으니 이것만 대답하도록. 일시적인 현상인가, 영구적인 부상인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
조금 느릿할 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상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공포를 티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죽을… 뻔했다.’
조금 전 황제의 분위기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닌 물건의 쓸모를 재는 분위기였다.
영구적인 부상이라 답했으면 난 분명 이 자리에서 죽었겠지. 눈을 잃으면 스파이로서의 활용성도 뚝 떨어지고, 전투 능력도 거의 상실하게 되니까. 황제는 망가진 검을 정 때문에 수중에 두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아마 마왕 역시 마찬가지일 터.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데, 바로 옆에 웬 보따리가 툭 던져졌다.
“깨끗한 옷이다. 몰래 나온 것 같던데, 그 꼴로 돌아갔다간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겠나.”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붕대와 약을 건네려다 잠시 멈칫한 황제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시야가 흐려질 만도 하군. 그대는 지금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긴 하나? 거의 물 흐르듯 나오고 있는데.”
“예…?”
아 맞다. 몸 상태 파악할 때 옆구리에서도 고통이 느껴졌었지.
살짝 고개를 내렸다. 옷 전체가 붉게 물들어서 못 보고 지나쳤던 듯 뒤늦게 찢긴 옷 사이로 피가 흐르는 환부가 보였다.
고통 때문에 앞이 하얗게 물든 것이 아니라 피가 부족해서 그런 거였구나.
“상처가… 마치 도려낸 듯한 모양인데, 왜 그런 거지? 저주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나?”
“…….”
“아니면 몬스터의 공격으로도 그런 상처가 나올 수 있었던가…. 방심한 모양이군.”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것과 도려낸 듯한 상처의 모양이 어떻게 엮이는 거죠.
그리고 왜 실력 부족일 것이란 생각은 안 하냐고. 마왕도 그렇고 황제도… 도대체 내 실력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거야?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황제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소독약과 지혈제를 꺼내 늘어놓고 붕대를 꺼내 들었다.
“어쨌든 어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군.”
“네, 감사합….”
“옷을 벗도록. 아니, 벗는 과정에서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그냥 자르는 게 낫겠군.”
“……네?”
“가만히 있어라. 자칫하면 상처를 하나 더 늘릴 수도 있으니.”
아니아니, 자칫하면 저 죽겠는데요?!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검으로 내 옷을 자르겠다고? 나까지 같이 자르는 게 아니라?
‘그거 조금 전까지 마물들 썰던 검이잖아! 나, 나 그냥 치료 안 받을래. 그거 들이밀지 마, 제발…!’
사, 살려…….
상대가 황제여서 도망칠 수도 없다. 떨리는 눈으로 검을 든 황제를 보던 나는 결국 체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나까지 두 동강 내지만 않아 줬으면…….
살벌한 치료가 끝났다.
검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옷을 자른 뒤로는 정석대로 잘 치료해 주더라. 이걸 의외라고 해야 하나.
“가…감사합니다.”
“인사는 됐으니 어서 옷이나 입도록.”
깔끔하게 붕대가 감긴 옆구리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다가 황제가 던져 준 보따리에서 깨끗한 셔츠를 꺼내 주섬주섬 팔을 끼웠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 팔짱을 낀 채 서서 셔츠 단추를 끼우는 나를 지켜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단추 잘못 끼웠다.”
“아.”
황제 앞이라 긴장이 되어서.
잘못 끼운 단추를 찾아서 알맞게 고쳐 끼우는데, 그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나를 불렀다.
“걸을 수는 있겠나?”
“……네.”
아마도.
대놓고 망설임이 담긴 대답을 황제가 믿을 리가 없다. 그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다가와 발목을 잡았다.
……?!
‘아니… 황제 폐하…?!’
댁 머리 위치가 내 눈높이보다 낮아졌는데…?
나도 수그려야 하나. 앉은 상태에서 어떻게 몸을 낮추지.
“계속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닙니다.”
어정쩡하게 수그렸던 상체를 슬그머니 폈다.
미묘한 눈초리로 나를 보던 황제가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을 택한 듯 다시 시선을 내려 잡은 발목을 살피며 못다한 말을 재차 꺼냈다.
“계속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던데…….”
“…….”
“황제가 서 있는데 감히 앉아 있을 정도로 그대가 예의 없는 인간도 아니고….”
“근육이 조금 상한 것뿐입니다.”
황제 앞에서 방자하게 군 것으로 비치는 것보다는 몸 상태 때문에 피치 못하게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이 낫다.
지나칠 정도로 빠른 대답에 발목과 정강이, 무릎 순으로 뼈를 만져보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것 같군. 뼈에는 이상이 없다.”
“…….”
“붕대를 줄 테니 적당히 감고 알아서 잘 귀환하도록. 며칠 뒤에 호출이 있을 테니 그때까지 몸 관리를 잘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호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대가 이번에 마왕의 말을 따라 움직였으니 다음번엔 짐의 말대로 움직여야 공평하지 않겠나.”
와… 세상에…….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진짜 미치겠네.
황제가 던져 준 붕대를 반사적으로 받아 챙기고 다시 혼자가 될 때까지도, 나는 빠져나간 넋을 붙잡아 올 수 없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제국 내에서 서로 대립 중인 황제파와 귀족파의 두 수장, 황제와 공작의 사상이 어느 정도 비슷한 탓에 귀족들은 파벌을 따지지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관련된 기본적인 상식은 갖추고 있다.
이를 테면 나라와 제국민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든가.
그럼에도 왜 이리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귀족들이 많느냐 묻는다면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때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실제 행동이 어떠하든 현 귀족들의 머리 한구석에는 귀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상식이 확실히 박혀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가 하면─
“나라를 우선시하는 이 제국의 귀족으로서 데온 하르트 명예 후작에 관한 소문의 진상은 확실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위 여부에 따라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소문이니 말입니다.”
데온 하르트 명예 후작에 관한 소문이 있다.
바로 그가 뱀파이어라는 소문!
“제가 고서를 찾아왔습니다. 마족들의 수와 영역이 압도적으로 넓어 그다지 인간계에 노출되진 않았지만 확실히 마계에 ‘뱀파이어’가 존재했다더군요.”
“과거형이지 않습니까?”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르트 명예 후작이 마지막 남은 일족일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겠지요.”
“확실히 수상하긴 하지. 전투 스타일이 과도한 피를 보는 방식인 것도 그렇고!”
“눈도 붉죠.”
“그 창백한 피부는 또 어떻고요. 햇빛에 오래 노출하지도 못한다던데, 책에 적힌 뱀파이어들이 딱 그렇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이들은 진지했다.
고서에 적힌 대로라면 뱀파이어와 마족들은 같은 마계에서 지내는 것인데, 그럼 인간계와 마계가 전쟁을 치를 때 마계의 편을 들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마치 인간계 내의 다양한 왕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다가도 ‘마계’에 맞서기 위해 분쟁을 멈추는 것처럼!
“이번에 확실히 알아 두어야 하오.”
“맞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를 감싸고 도시니…….”
“공작 각하께 말씀드려 보는 것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쫓겨났습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공작에겐 어디까지나 멍청한 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했으니 당연했다.
“역시 우리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오.”
“이미 하르트 명예 후작 쪽에 눈과 귀를 붙여 두었습니다.”
“저도 붙였습니다만… 혹, 소식이 끊기진 않으셨는지….”
“그러고 보니…….”
“죽은 모양입니다. 그도 영웅이니 기감이 발달했겠지요.”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군.
이 자리의 모든 귀족들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최대한 조심스러운 녀석들로 뽑아 다시 붙여야겠습니다.”
“그럼 나는 혹시 모르니 멀리서 지켜볼 녀석들을 따로 붙이겠소.”
“그런데… 그가 정말 뱀파이어일 경우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
황제가 싸고도는 이를 확실히 치울 수 있을까?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혀 봤자 바뀌는 것은 데온 하르트에 대한 적의가 더 강해진다는 것 뿐, 황제가 유용한 검을 쉬이 버릴 것 같진 않다.
어쩌면 알고 감싸는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정보만큼은 확실히 통제하고 있으니. 오히려 뱀파이어가 제국의 편을 든다는 것을 긍정적인 여론 형성에 활용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래요. 아직 진위 여부가 판별나지도 않았잖습니까.”
답 없는 문제에 봉착한 대다수의 인간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외면이다.
귀족들은 복잡하고 머리 아플 것이 분명한 불편한 가정을 회피했다.
“아, 그리고 0군단장과 데온 하르트의 전투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소문이 돌던데… 설마 둘이 동일 인물인 것은 아닐까요?”
“허허허, 농담도! 그럴 리가 있겠소? 황제든 마왕이든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하하, 맞습니다. 0군단장의 존재가 공공연한 비밀로 떠오른 지 2년이 넘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마계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마계가 선전포고하던 날 보셨잖습니까? 그런 설전을 벌인 당사자들이 2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모르고 있었을 리가요. 재미있는 농담이었습니다.”
“아하하, 역시 그렇죠?”
와중에 한 귀족이 독특한 가설을 내세웠으나, 이는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으로 치부되어 웃음과 함께 가라앉았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신빙성이 없는 가설이었으나, 오히려 그 탓에 분위기가 풀렸다.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 그 귀족의 재치 있는 농담을 칭찬하며 ‘데온 하르트 뱀파이어설’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