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39
139. 금이 간 둑(4)
전쟁도 제대로 안 겪어 본 애송이들이 감히 누구를 상대로 영웅 자격을 논하는가.
애초에 ‘영웅’이란 용사의 파편 유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영웅은 별게 아닌 듯하면서도 참으로 특별한 칭호이니─
불이 난 집에 뛰어 들어가 사람을 구하는 이가 바로 영웅이요, 하다 못해 불이 났다고 대피하라고 외친 이도 영웅이다. 길가의 어린아이에게 선의를 베푼 이는 그 아이의 영웅이 되며, 올바른 부모는 자식의 영웅이 되기도 한다.
얻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바로 ‘영웅’이란 칭호인데, 이조차 모르고 탐내는 자에겐 영웅의 자격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물며 살인귀 기사단은 8년 전쟁에서 데온 하르트에게 구원받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 작은 손에 이끌려 산 사람들이 많다. 제국이 그를 인정하지 않아도 이들이 영웅으로 인정할 정도인데, 눈앞에서 저렇게 데온 하르트를 영웅으로 인정하지 않는 꼴을 보이면… 미친개들의 반응이야 뻔하지 않은가.
“질투하냐?”
“……뭐?”
“야, 얘들아. 이 새끼들이 우리 후작님을 질투 중이다!”
“얘네가? 우리 후작님을? 주제도 모르고? 감히?”
전쟁 중에 몰래 칼침을 놔주마.
난리통에 하나 정도는 아군에게 죽어도 모르겠지.
무엇보다 8년 전쟁에서 처음 만난 데온 하르트는 너무 어렸다.
기사단원들과 그의 나이 차이가 아무리 적어도 장성한 형과 늦둥이 동생에서 평균 삼촌과 조카 수준으로 많이 나는데 다른 쪽의 정이 쌓이지 않을 리가 있나.
정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몇몇은 아버지와 아들 수준으로 차이 나기도 한 데다, 그들의 대장은 전투와 심리전, 사기 조성에 있어서는 괴물 수준이지만 그 외의 것들은 결국 서툰 어린아이였기에 알게 모르게 은근히 챙기는 과정에서 자연히 ‘내 새끼’라는 인식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속옷을 입히는 건 실패했지만…….’
속옷이 피에 젖어 들러붙으면 움직이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했었나.
그게 습관이 된 나머지 전쟁이 끝나고도 속옷은 안 입는 상태로 굳어졌고.
‘전쟁이 애를 다 망쳐 놨어.’
쩝. 입맛을 다신 밀란이 ‘영웅 후보’들을 향해 건들건들 나서며 히죽 웃었다.
“아서라, 후작님은 너희 따위가 감히 질투할 정도로 수준이 낮지 않으시다.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봐야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어떡하냐. 그냥 깔끔히 포기하지 그래?”
“……하!”
물론 용사의 파편이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정면으로 이들과 맞붙으면 백이면 백, 진다는 것도.
그래도, 내 새끼가 무시당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특히 우리 대장은 전투 스타일 특성상 무시당하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신단 말이지.
“용사의 파편도 없는 주제에!”
“이름도 없는 기사단 주제에!”
“기사단의 이름은 전투력과 관계없거든?!”
“우리도 용사의 파편 따위 없어도 잘 싸우거든!”
“……제대로 맞붙으면 지는 주제에!”
“줴뒈뤠 맺부트뭰 쥐눈 주줴웨에-.”
“너!”
멱살을 잡아 오는 녀석을 보며 키득거리다 정색하고 검을 뽑았다. 긴 시간 손발을 맞춰 온 이들답게 다른 녀석들도 저마다 자세를 잡으며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영웅 후보들이 흠칫한 상황에서 밀란은 검을 쥔 손목을 몇 번 빙글빙글 돌리다 어깨에 턱 걸치며 삐딱하게 웃었다.
“싸우자고? 우리야 눈에 뵈는 게 없지만, 너흰 아닐 텐데?”
“…….”
살인귀…가 아니라 로프티 기사단은 데온 하르트 직속이다.
8년간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하고 그 뒤로도 함께한 정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기에 욕을 할지언정 어지간한 사고는 넘어가 줄 테지만, 눈앞의 ‘이름 없는 기사단’은 황제 직속이다.
황제와 동고동락할 일도 없었고, 황제가 정 따위에 휘둘릴 일도 없으니 사고를 쳤다간 그대로 모가지일 터.
“아, 영웅 후보이니 죽지는 않으려나.”
황제는 인재를 아끼니까.
“대신 뭐, 불이익이 없지는 않겠지.”
“우린 욕만 먹으면 되지롱.”
“단장님이 좀 때리시겠지만.”
“아, 맞다. 그게 있었네.”
그렇게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대치하고 있길 잠시,
“너네 뭐 하냐?”
“아, 후작님!”
데온 하르트가 왔다.
밀란은 즉시 반색하며 검을 집어넣고 돌아섰다. 잠시 후드를 들췄던 듯, 윗부분이 조금 접힌 흰 후드가 보인다.
우리 대장, 아직도 이렇게 겉옷 정리를 못 해서 어떡하냐.
“별일 아닙니다!”
슬쩍 손을 뻗어 그 부분을 정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었다.
***
그리고 전투가 있었다. 제국으로 진격하는 마왕군을 막기 위한 전투.
─아니, 막는 것이 아니라 ‘말살’이었나.
마왕이 머리를 좀 썼다고 한다. 최단 거리의 경계선으로 밀고 들어가는 척하다가 다른 경계선을 통해 인간계에 진입했다고.
‘경계선’은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다. 집 문 하나 열려 있다고 밖에서 집 안 구석구석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멀리서 육안으로 움직임을 유추하는 것이 불가능한 탓에 첩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마계에서는 인간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간계에서는 마계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여러 정황을 조합하여 마왕의 생각을 대충 눈치챈 황제가 제법 빨리 병력을 보냈으나, 이미 들어온 그들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단다. 오히려 상당히 위험한 위치까지 밀려서 아예 주요 병력을 총집합시키다시피 한 것이고.
두 번째 영웅인 스티그마 프리미로와 세 번째 영웅 데온 하르트.
거기에 더해 마족들을 상대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영웅 후보들까지.
‘아주 호화롭네.’
단 하나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말살’ 명령이 이해가 간다.
이 조합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상성은 안 좋았지만.’
오전에 있었던 영웅 후보들과의 충돌을 떠올린 살인귀 기사단원 클레터가 한숨을 내쉬며 마족의 배를 갈랐던 무기를 회수했다.
퇴로를 막고 도망치는 놈들을 죽이는 역할은 프리미로 후작과 그의 기사단이 맡았기에 살인귀 기사단은 부득이하게 영웅 후보들과 함께 적들을 죽여야 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으르렁댔는데 전투가 시작된 후라고 얌전할까.
“너! 죽을 뻔했잖아!”
“어이쿠, 이게 왜 그쪽으로 가지? 미안-.”
“이 미친 새끼가…!”
눈먼 무기가 희한하게 영웅 후보들의 뒤통수만을 향한다. 나름 같은 편이라고 자중한 건지 방어에 실패한 자들도 팔다리에만 가볍게 상처가 났을 뿐, 급소를 다치는 일은 없었다만…….
“적당히 해라!”
눈앞에 적을 두고 아군끼리 싸워서 좋을 건 없다. 역시나 단장 리엔 라이너의 분노 어린 외침이 들렸다.
평소였다면 단장이 나서기 전에 먼저 말려 보려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클레터도 모른 척 외면했다. 후작님을 우습게 봤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뭐… 이제는 우습게 볼 엄두도 못 내겠지만.’
힐긋 눈을 굴려 전쟁터 한구석을 보았다.
그 어느 곳보다 진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곳. 마족이었던 것으로 유추되는 붉은 고깃덩어리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공포가 자욱하게 깔린 그곳에 활짝 웃고 있는 자신들의 대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터프하시네, 우리 후작님.’
의식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의식이 거부감을 표한다.
약에 의존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나도 다른 녀석들처럼 약을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치민다.
그만큼 데온 하르트가 벌인 참상은 맨정신으로 보기 어려웠다.
‘마족이 상대라 약을 안했다만…….’
지금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번 전쟁은 같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마족과의 전쟁이었기에 기사단 내에서도 약을 하는 이와 하지 않는 이가 갈렸다.
인간을 닮은 마족을 맨정신으로 처리할 수 없어 약을 하기로 결정한 자들과, 그래 봤자 결국 인간과 다른 부분이 한 군데 이상은 존재하는 마족이니 몬스터와 동급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자들.
클레터는 ‘이성’을 버리고 싶지 않아 후자를 택했다.
‘후작님의 행동을 고려하지 못했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간다.
이건 마치 우연히 마주친 맹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
잠시라도 시선을 돌렸다간 저 맹수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다는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감각이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저조차 이럴 정도인데, 오늘 처음 마주한 영웅 후보들은 어떻겠는가.
‘쫄았네.’
공포에 질린 놈들의 시선이 데온 하르트에게 고정되어 있다.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잘만 싸우던 녀석들도 우연히 데온 하르트를 시야에 둔 뒤로는 시선이 묶인 듯 쉽사리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투 중에 한눈을 파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이는 마족들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었기에 생각보다 피해는 적었다.
클레터는 무심하게 영웅 후보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나도 다음부터는 약을 해야 하나.’
짜증나는 영웅 후보들 따위, 고려 대상도 아니다.
데온 하르트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족을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시간을 벌어 체력을 회복한 그가 이 빌어먹을 전투를 빨리 끝내기 위해 다시 무기를 들었다.
제아무리 변변찮은 검술 하나 익히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몇 년을 전쟁터에서 구르면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
클레터는, 살인귀 기사단은 이제 무작정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지 않는다.
분위기 조성은 데온 하르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전투 시작하고 처음에만 기선 제압을 위해 잔인하게 굴 뿐, 이후 그 분야는 대장에게 맡겨 두고 최대한 많은 적들을 처치하여 전투를 빨리 끝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 잔인한 손속은 체력이 부족할 때 시간을 벌기 위해 꺼내 드는 패였다.
이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약에 취한 와중에도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이니.
기뻐해야 하는가, 씁쓸해해야 하는가.
‘일단은… 좋게 생각하자.’
생각을 멈춘 클레터가 움직였다.
***
당연하지만 전투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원을 보내는 마왕, 바뀌지 않는 ‘말살’ 명령.
그나마 군단장급을 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이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데온 하르트를 나름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그가 관찰한 데온 하르트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전쟁터라서 그런가.’
정확히 무어라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금이 간 둑에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치고 있는 느낌. 작은 돌멩이 하나만 떨어져도 파동이 일어 철렁- 하고 물이 넘치니 다른 의미로 눈을 뗄 수가 없다.
보기만 해도 위태로운 꼴이었으나 남이 보완해 줄 수 없는 영역이다. 스티그마는 정녕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약간의 한심함을 담아 잠시 의문을 가졌다가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허리를 곧게 세우렴. 어깨는 펴고 턱은 적당히 들어. 걸음걸이는 건들거리지 말고 흔들림 없이 곧게. 사람과 대화할 때는 눈을 마주치고 말투는 우아해야 한다.”
‘선배’로서의 조언.
얼떨결이긴 했지만 그가 저를 ‘선배’라 불렀고 저 역시 그를 ‘후배’로 인정했으니 선배로서 무언가 도움은 주어야 옳겠지.
데온 하르트의 전투 스타일은 스티그마와는 정반대다. 그러니 이쪽으로는 손댈 수도, 손대서도 안 될 테고, 그가 할 수 있는 조언이라고는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는 법’ 정도가 될 터.
고상한 언어로는 ‘귀족으로서의 자세’가 되지 않을까.
“수하들이 너를 무시하면 다른 사람들도 너를 무시한단다. 그러니 존중받는 상관이 되렴. 어떤 방식으로든 상관없어. 공포로 인한 존중이든, 애정으로 인한 존중이든. 타인에게 네가 존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데온 하르트를 관찰하면서 얻은 정보 중에는 그의 직속 기사단인 로프티 기사단에 관한 것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데온 하르트를 무시하는 줄 알았더랬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보였다.
“후배님은 이미 넘치도록 사랑받고 있으니 기사단만 교육하면 되겠구나. 애정하는 상관에 대한 ‘존중’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말이야.”
데온 하르트를 향한 그들의 맹목적인 애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