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41
141. 금이 간 둑(6)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줄곧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듯 스티그마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후배님은… 본인의 분위기가 극과 극을 오간다는 것을 알고 있니?”
“예?”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데, 문제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묻고 싶구나.”
“네?”
“……내가 손댈 영역이 아니니 어떤 대답이 나오든 결과는 똑같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가 손을 뻗어 내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그래도 지금은 울지 않는구나. 그나마 다행이지. 이번과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면 곤란할 것 같으니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길 바라마.”
“…….”
다 봤구나.
짧은 침묵이 흘렀다.
군의관만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조금 전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처리된 듯 끝난 줄 알았던 잔소리가 이어졌다.
“분명 그때 후배님은 피할 수 있었어. 그렇지 않니?”
“……네.”
“물론 장수를 죽이는 것은 중요하단다. 그러나 그 방법이 적의 무기에 몸을 들이대고 부상을 감수하며 죽이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최악의 점수를 주고 싶구나. 그때 후배님은 차라리 피했어야 했어.”
갈색 눈동자가 다시금 치료 중인 상처를 살핀다.
마취해서 잘 모르겠는데, 도대체 얼마나 심각하길래 그런 거야? 슬쩍 고개를 틀어 상처를 살피려던 찰나, 스티그마가 내 머리를 꾹 눌러 왔다.
“치료에 방해될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마렴. 그보다 후배님이 마족 장수를 죽였을 때, 적들이 어째서 물러간 건지 알고 있니?”
그야… 장수가 죽었으니까?
“근처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단순히 후배님이 장수를 죽인 것이 전부였다면 부상 입은 좋은 먹잇감을 두고 그냥 물러갈 리가 없잖니. 물러가더라도 후배님은 죽이고 물러갔겠지.”
“…….”
“알겠니? 오늘 후배님이 내린 판단은 최악이었단다.”
아주 뼈를 때리시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프다.
“장수를 죽였지만 후배님도 큰 부상을 입었고, 아군의 사기 증진에도 실패. 그렇다고 적들의 사기를 깎아내리지도 못했지. 결과적으로 아군은 물러가는 적들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고. 왜? 이곳에서 높은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 중 하나인 후배님이 큰 부상을 입었으니까.”
“…….”
“빨리 전투를 멈추고 후배님의 상처를 살펴야 하는데, 퇴로를 계속 막고 있으면 전투는 끝나지 않으니까.”
일개 병사야 죽든 말든 전투가 계속되지만, 직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그 사람의 죽음과 부상에 예민해진다. 그 영향력은 전투를 멈추고 물러가는 것까지 좌우할 정도.
“후배님의 행동 자체가 최악이라는 것은 아니야. 판단이 나빴을 뿐이지. 그러한 행동은 상황을 잘 살펴서 정말 방법이 없을 때나 사용해야 한단다.”
“…….”
“후배님이 이유 없이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을 리는 없을 테고….”
뭐든 굳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그냥 내가 이 정신 상태, 몸 상태로 싸울 자신이 없어서 장수 하나 잡고 생색내려고 그런 거였거든.
“후배님의 심상치 않은 상태가 원인이 된 것 같은데, 그 탓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 보였으니 말이야. 따지고 보면 이 어깨도 전쟁 중에 아예 넋을 놓아 버린 탓에 생긴 상처 아니니.”
정신 차리고 보니 한창 전쟁 중이어서 당황하긴 했지.
아, 다시 생각하니 또 약 땡긴다.
“……또, 넋을 놓았구나.”
“아.”
“됐다, 후배님도 피곤할 텐데 푹 쉬어 두는 게 낫겠지. 마침 치료도 끝난 것 같으니 들어가렴. 뒷정리는 내가 하마.”
그가 자리를 떴다. 군의관마저 치료가 끝났다며 떠나고, 치료가 끝난 어깨의 붕대를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부상 소식을 듣고 뛰쳐나와 치료 내내 근처에서 서성이던 단이 얼른 다가와 외투를 걸쳐 준다. 그렇지 않아도 맨살에 싸늘한 공기가 닿아 추웠기에 냉큼 받아 외투를 여몄다.
“……매번 느낀 거지만, 각 기사단의 개성이 강하군요.”
“음?”
바로 안으로 안내할 줄 알았더니,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람.
힐긋 단을 보았다가 그의 시선을 좇아 눈을 돌렸다.
‘……아.’
단의 시선은 스티그마의 지휘하에 정렬한 세 기사단에게 닿아 있었다. 정확하게는 세 기사단의 옷차림에.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살인귀… 로프티 기사단.
평범하게 전투를 치른 듯 적절히 피가 튄 의복 차림의 이름 없는 기사단.
기이할 정도로 말끔한 차림새를 유지한 스티그마의 기사단.
‘아니, 스티그마는 싸울 때 거의 적들을 찢어발기는 수준이던데 어떻게 그렇게 말끔한 차림새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그의 기사단도 마찬가지다.
주인을 닮은 그들은 절대 얌전한 전투 스타일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지.
목줄 풀린 맹수.
그래, 딱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래놓고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깔끔함이라니….
가만히 서서 감탄하고 있던 때, 눈을 바삐 움직이며 세 기사단을 살피던 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람이 피에 젖어 가는 세 단계….”
“풉.”
“…….”
“…….”
들어가자.
***
후배님은 알고 있을까. 틈만 나면 본인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섞여 든다는 것을.
전쟁터에서도, 그나마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주는 군막에도.
“끄윽-.”
“쉬이, 괜한 소란은 피우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하렴. 그렇지 않아도 전투로 다들 피곤한데, 너 하나 때문에 쉬지 못해서야 쓰겠니.”
네 목숨은 그 정도의 가치가 없단다.
스티그마가 목을 조른 손에 힘을 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보냈니?”
후배님이 정치적 위치상 적이 많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쉴 틈 없이 많은 사람이 올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한두 명씩 보내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이 집요하게 여러 사람을 보내는 것이겠지. 그 사람만 찾아서 죽이면 일은 깔끔하게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후배님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은데, 거기에 이런 날파리들까지 꼬여 가지고.
“이번 전쟁의 위험성도 모르는 머저리들이.”
아주 그냥 인간계를 망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
우득.
“……이런, 실수.”
그냥 죽여 버렸네.
순간 힘 조절이 안 되고 말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체를 툭 놓은 그가 고개를 들어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는 이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니?”
“…….”
“대답이 없구나. 네가 후배님에게 오는 습격자들을 처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너 역시 내 손에 죽었을 거란다.”
아마 후배님도 그것을 알기에 살려 두고 있는 것이겠지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픽 웃은 스티그마가 흥미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부디 후배님을 잘 지켜 주길 바라마.”
***
평소와 다름없이 본인의 집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연 크루엘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멈칫했다. 익숙한 기시감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지 않고 뭐합니까?”
“……공작 각하.”
언제였더라,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그때도 공작이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지.
이미 한 차례 겪어 봤다고 그새 익숙해진 건지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나, 멋대로 가구 구조를 바꾼 듯 방 가운데에 놓인 작은 원형 탁자는 조금 의외였던 탓에 시선이 절로 바뀐 가구에 닿았다.
“크루엘 경.”
“…….”
짧은 재촉에 탁자 위에 놓인 체스판과 그 앞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공작을 번갈아 보던 크루엘이 말없이 마저 문을 닫고 들어와 섰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공작이 맞은편 자리를 권하며 싱긋 웃었다.
평소에도 줄곧 웃고 있었지만, 기분 탓인지 유독 위화감이 드는 미소.
“보아하니 체스를 즐기는 모양이던데, 나와 한판 두지 않겠습니까?”
불길하다. 검사로서 단련된 본능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는 상황.
“……기꺼이.”
크루엘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따각. 딱.
망설임 따위는 집어던진 듯 체스 말이 거침없이 놓인다. 시간적 딜레이 없이 턴이 휙휙 바뀌고, 각자의 눈이 바삐 움직이며 상대의 움직임과 그로 인해 바뀐 판을 살핀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작은 세계에 집중하기에도 바빠서, 위에서 조율하는 자들의 대화는 사치였다. 오죽하면 둘 사이의 대화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한 대화가 마지막이었을까.
[무슨 색을 잡을 겁니까?] [……백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군요.]크루엘이 백, 공작이 흑.
─딱.
‘…….’
흐름이 깨졌다. 보라색 눈동자가 판에서 눈을 떼고 크루엘을 느릿하게 훑는다. 철저하게 감정을 감춘 눈이 상대를 속셈을 파헤칠 듯 집요하게 살피고 있었다.
백색의 말이 엉뚱한 곳에 놓였다. 미끼도 아니고 공격은 더더욱 아닌, 허수라 하기에도 어설픈 장소.
“……제가 상당히 재밌는 쪽지를 입수했는데.”
판세는 분명 크루엘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공작은 모른 척 느리게 말을 집어 옮기며 말문을 열었다.
“경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직접 왔습니다.”
“…….”
따각.
판세가 뒤집혔다. 크루엘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겠지.
─아니, 저게 과연 실수가 맞을까.
기세등등하던 백의 진영이 무너진다. 틈을 놓치지 않은 흑의 말들이 서서히 숨통을 조여 가고, 결국.
“체크메이트.”
공작이 이겼다.
손을 뻗어 백색의 킹을 집어 든 공작이 손 안에서 그것을 굴리다가 던지듯 툭 내려놓았다. 크루엘의 앞에 던져진 것은 체스 말뿐만이 아니었다.
체스 말의 옆에서 함께 나뒹구는 작은 쪽지 하나.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크루엘이 펼쳐 보라는 공작의 눈짓에 못 이겨 천천히 손을 뻗었다.
“…….”
늘상 오던 보고 쪽지였다.
문제는 공작이 아니라 크루엘이 개인적으로 의뢰한 내용의 보고 쪽지라는 것이지만.
오늘만 데온 하르트를 몇 명이 습격했고, 몇을 처리했는지, 데온 하르트를 지키라는 의뢰에 대한 보고.
녹색 눈이 다시 제게 맞춰지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공작이 시선을 마주하고 싱긋 웃었다.
“안타깝게도 의뢰주의 이름은 없더군요.”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저 쪽지를 입수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쪽지가 오가는 루트를 모르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궁지에 몰아넣은 쥐에게 숨통을 트여 주듯, 제 목을 쥐고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루엘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쪽지가 들통난 이상 그는 숙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공작이 크루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쪽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크루엘 경. 이 쪽지, 당신 겁니까?”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크루엘은 그가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
“…….”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먼저 시선을 피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둘은 조용히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고, 그 미묘한 긴장감은 공작이 먼저 눈을 휘어 보이며 끊어졌다.
그가 쪽지를 다시 집어 들며 여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역시 그렇지요?”
화르륵.
벽난로에 던져진 쪽지가 삽시간에 불타 없어진다. 크루엘의 시선이 그쪽을 향한 것도 잠시,
“꿇으세요.”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공작의 단정한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에, 녹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답도 없이 담담히 공작을 보던 크루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는다. 조용히 그를 보던 공작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더.”
“…….”
웃음이란 가면을 집어치우고 드러난 서늘한 무표정이 크루엘을 응시한다. 잠시 그와 시선을 맞추던 크루엘이 눈을 내리깔고 남은 무릎마저 굽혔다.
“…….”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음에도 대답이 없다.
그에, 두 손바닥이 바닥을 짚고 머리가 숙어진다. 무언가 답이 있을 때까지 숙어진 머리는 이마가 바닥에 닿고 나서야 멈췄다.
완벽한 부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