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43
143. plaudite!(2)
약 한 시간 전, 크루엘은 검을 점검했다.
아주 작정한 듯 검뿐만 아니라 허벅지에도 비수를 여러 개 챙기고 몇 번 뽑았다 집어넣는 모습에 한쪽 구석에서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수하 센제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
“따르겠습니다.”
“아니.”
철컥. 준비를 마친 크루엘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뒤에서 묵묵히 받쳐 왔던 수하가 저를 보고 있었다.
그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더라. 공작의 밑에 들어가기 전부터 함께했으니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리라 장담한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어도 믿고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아니 신뢰했던 수하.
덕분에 크루엘은 한 가지 배울 수 있었다.
“센제르.”
“예.”
“네가 나를 ‘주군’이라 부르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지?”
배신의 척도는 함께한 시간에 따라 갈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을 해 봤다. 공작은 어떻게 쪽지를 얻었을까. 조금만 시야를 넓히자 답은 금방 나왔다.
크루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동자가 방황하는 듯 그 위를 덮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도대체 언제부터.”
들킨 진실의 대가가 목숨인 것에 비해 답은 더없이 초라해서.
“공작의 눈이 된 거지?”
차마 표하지 못한 참담함을 눌러 삼켰다.
쪽지의 존재와 루트를 알고 가로챌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센제르는 크루엘이 무언가를 할 때, 늘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24시간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크루엘이 데온 하르트를 구하기 위해 사냥 대회에 참여할 때 굳이 따라가서 보지 않고서도 정황을 조합해 공작에게 보고했던 것처럼, 센제르는 크루엘의 의뢰 내용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보고했겠지.
“……그것이 중요합니까?”
센제르가 잠시 아래를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리며 크루엘을 마주했다. 보는 사람이 말문이 막힐 정도로 당당한 시선이 녹안을 직시했다.
“……아니.”
언제 동요를 드러냈냐는 듯 녹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신경을 낭비해야 할 때가 아니다. 크루엘은 능숙하게 눈을 돌렸다.
“따르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하지만 저는….”
안다. 공작의 명을 받아 나를 감시해야 하겠지.
하지만 그걸 내가 굳이 배려해 주어야 할까.
“나는 중요한 일에 배신자를 곁에 두고 움직일 정도로 비위가 좋지 않아서.”
“…….”
“실패하면 죽이면 되는 것을, 굳이 따라가서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나? 너 말고도 몰래 숨어서 나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을 텐데.”
“……알겠습니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는 즉시 감시자들이 움직이겠지.
센제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
***
톡. 코끝에 차가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아, 눈이…….”
이제 막 내리기 시작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가득 메우며 흩날리는 눈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새하얀 눈과 정반대로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빌어먹을 내 팔자야. 전쟁이 고달파지겠네. 눈발이 굵은 걸 보면 꽤나 쌓일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 새끼는 도대체 어디까지 날 끌고 가려는 거야?’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내 손목을 잡아끄는 마디 굵은 손을 노려보았다.
내 따끔한 시선이 느껴질 만도 했으나 조금 전 몸부림을 치며 욕을 퍼부었을 때도 풀리지 않은 손이 고작 그 정도에 풀릴 리 없다. 이미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힘을 뺀 상태였기에 나는 이내 포기하고 놈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이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마족들의 함정에서 간신히 탈출했다가 길을 잃어 또 다른 마족 무리를 마주치고, 용케 그 개 같은 상황에서 살아 귀환한 이후.
귀환할 때의 상황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팔다리가 미친 듯이 아프고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내 상황에만 집중하기에도 바빴거든. 미친개들이 날 실어 나른 것은 기억나는데……. 아무튼 무사 귀환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영웅이 되었지! 원래도 영웅이었지만…!
‘젠장. 그 길이 보급로였을 줄이야.’
내가 마주친 마족들이 보급품을 나르던 녀석들이었단다.
‘그렇지 않아도 많던 내부의 적이 더 늘게 생겼네…….’
으레 그러하듯 권력에 가까워질수록 누군가 승승장구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지 못하는 자들 또한 과격해진다.
견제도 심해지겠지. 분명 습격자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벌써부터 역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길을 멋대로 끊어 버린 것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
물론 누가 들어도 개소리라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모양이긴 한데, 그래도 억울하다.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란 말이야.
‘미친개들이 날뛰다가 산사태를 일으킨 탓에 끊어진 걸 나보고 어쩌라고…….’
죽을 뻔했던 탓에 그것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땐 거기가 우리 무덤이 되는 줄 알았으니까.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거추장스러운 짐 덩이인 나를 절대 떨어트리지 않고 고이 챙긴 녀석들의 행동은 조금 감동이었지만, 죽을 뻔한 원흉 또한 그놈들인 탓에 썩 고운 말이 나오진 않았더랬다.
‘그래도 금방 괜찮아져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덕분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미친개들이 도착하자마자 의원부터 부르짖으며 날뛴 덕분에 몸은 괜찮다. 몸에 큰 문제는 없고, 무리한 움직임 탓에 근육이 많이 상했댔나. 아, 다리뼈가 살짝 어긋났대서 다시 제대로 맞추기도 했고.
길은 우리 유능한 리엔이 간신히 찾았다 들었다.
‘길 찾으랴 미친개들 통제하랴… 고생했겠네 리엔 경…….’
아무튼.
정면을 보았다. 앞장서 걷는 검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간신히 치료가 끝나고 배정된 막사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쳐들어와 끌고 나와서는 이렇게 하염없이 걷기만 하고.
“도대체 할 말이 뭔데? 난 들을 생각 없다고 했잖아.”
“…….”
“……빌어먹을 새끼.”
빌어먹을 크루엘 하르트.
감정을 잔뜩 담아 욕설을 짓씹었다. 이동하는 내내 줄곧 멈추지 않던 그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데온.”
차앙!
손목을 놓아준 것까진 좋았는데, 크루엘이 검을 빼 들었다.
……내가 욕 좀 했다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익숙한 산맥의 입구를 배경으로 한 손에 검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제법 살벌해 주춤 물러서는데, 아예 성큼 거리를 좁힌 그가 붕대가 감긴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잡았다.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널 죽이려는 자들이 있다.”
“그거야….”
“이번에 아주 작정했지. 영웅 하나 죽일 만한 병력에 나까지 보냈으니.”
“…….”
늘 그랬다는 말은 쏙 들어갔다.
영웅 하나 죽일 만한 병력은 그렇다 치고, 크루엘을 보냈다고? 날 죽이기 위해?
‘……미친.’
크루엘의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일부러 사람 없는 곳까지 끌고 와서 죽이려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불필요할 정도로 너무 멀리, 오래 이동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 탓에 감각이 둔해지기라도 한 걸까, 당장 이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그가 몸을 틀며 산맥 방향으로 내 어깨를 툭 밀었다.
“‘저쪽’으로 가라.”
“……!”
익숙한 산맥 입구, 굳이 이곳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고, 그 방향으로 날 밀친 크루엘.
상황 파악은 빨랐다.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크루엘은 내가 마계에 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따져야 한다. 녀석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잠긴 듯 들려 망설인 것도 잠시, 착각일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너….”
그러나 미처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어디선가 비수가 날아왔다.
정확히 내 왼쪽 눈을 노린 그것을 번개같이 검을 휘둘러 쳐 낸 크루엘이 재촉하듯 나를 돌아본다. 드물게 감정이 드러난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미지의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이대로 산맥의 경계선을 넘을 수도 없는 게…….’
이곳의 경계선은 마왕도, 황제도 일부러 모른 척 숨기고 있는 경계선이다. 자칫하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를 습격자들을 안내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되면 마왕이 날 죽이지 않을까…?’
살기 위해 이동했는데, 도리어 죽을 상황이 될 수도 있…!
나를 지킨 크루엘도 적으로 간주한 듯 눈송이 틈에 섞여 수많은 비수가 날아온다. 광범위하게 두 사람을 노리고 비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것이 맞으면 고슴도치가 될 모양새다.
심지어 눈 때문에 비수의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나는 허허로이 웃었다.
‘그래,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인 모양이야.’
그래도 산맥 넘겠다고 힘 빼다가 죽는 건 아니니 나름 괜찮은 죽음 아닐까.
치료를 받아 거동이 가능해졌다지만 전투 등의 격렬한 움직임은 아직 힘든 상태라 반쯤 포기하고 서 있는데, 크루엘이 나를 잡아당기며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강! 푹!
……푹?
“너…!”
몸에 통증은 없다. 내가 맞은 게 아니란 뜻이다. 눈을 조금 굴리자 크루엘의 오른팔에 전에 없던 단검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왼손에도 붕대가 감겨 있던데 오른팔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네.
나를 위했기 때문일까, 빈정거림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왜….”
피가 방울방울 스며 나오고, 옷을 붉게 물들이며 소매까지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마치 환상 같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감싸고도 고작 단 한 개의 공격만 허용했으니 크루엘 혼자였다면 전부 쳐 내고 피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크루엘이 날 대신해서 맞은 거지?’
크루엘은 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날 이렇게까지 위한 거지? 설마….
“생각하지 마.”
시야가 어두워졌다.
나직한 목소리가 바쁘게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 냈다.
“늘 그랬듯, 합리화하고 외면해.”
챙, 채앵! 푹! 서걱!
시야가 가려져 예민해진 청각이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살을 가르고 베어내는 소리를 잡아낸다. 붕대를 감아서 그런 것일까, 눈을 가린 커다란 손이 마치 시체처럼 차갑다.
“하지만….”
몸의 방향이 바뀌고, 시야가 트였다. 크루엘과 습격자들은 내 시야 반대편에 있는 듯,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 전보다 더 가까워진 산맥 입구뿐.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짚은 크루엘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굳이 눈을 뜨고 싶다면.”
여전히 배경엔 살벌한 소리가 깔려 있다. 푸욱! 하고,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날붙이에 찔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돌아보려는데 어깨를 짚은 손이 힘을 주어 제지한다. 대신 멀쩡하다는 것을 알리듯 평소와 다름없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전에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들을 마주하도록 해.”
“…….”
“이제, 가.”
어서.
***
하나뿐인 동생의 손에 백작저가 피로 뒤덮였던 날, 크루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데온을 죽여 복수해야 하는가, 유일한 핏줄이 되어 버린 그를 감싸야 하는가.
크루엘의 선택은 후자였다.
동생이 무언가 오해가 있어 이러한 일을 벌였음을 안다. 그것이 8년 전쟁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그런 상황에서 그 아이를 죽여 복수해 봤자 얻는 것은 거대한 상실감뿐.
크루엘은 그 막대한 상실감 속에서 스스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복수를 해도 죽을 목숨, 차라리 동생에게 쏟아붓기로 결심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움직여.’
8년 전쟁에 데온이 참전하게 된 원인에 배후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가족은 이미 오해한 데온의 손에 죽었다. 진실을 알게 된 아이가 죄책감과 복수에 미쳐 사방에 검을 겨누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들까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더.’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가 데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작의 명령을 왜곡하고 순화시키기 위해 그의 곁에 있길 자처했다.
‘난 무엇을 해야 하지?’
크루엘 하르트는 미끼가 되었다.
데온의 분노를 제게 집중시켜 8년 전쟁 참전 상황에 의문을 갖지 못하게 했고, 데온을 향한 공작의 살의를 한 차례 걸러 내는 거름망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데온이 의문을 가질 만한 증거를 지우는 것은 덤.
그래서 그때 주술사가 그런 말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정 죽을 것 같거든, 그 아이를 죽이고 죽거라.]안다.
내가 죽으면 늦든 빠르든 그 아이는 진실을 알게 되겠지.
죄책감에 짓눌려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될 것이라는 것도, 복수를 위해 뽑아 든 검이 검을 휘두르기 위해 복수의 대상을 찾게 되는 상황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것도, 전부 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