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55
155. 인류의 배신자 데온 하르트(3)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거절할 생각도 없었고.
제아무리 제국이라지만 마계에 홀로 맞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산국의 왕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리 당당할 수 있는 거겠지.
황제는 조용히 손등을 매만졌다.
산국의 왕이 동맹 이후의 기싸움까지 염두에 두고 미리 준비를 한 뒤, 지금 이렇게 혀를 놀린다는 것을 안다.
‘조금 아쉽군.’
산국에 속국이라는 패가 없었다면, 있어도 사용할 줄 몰라 르웨체와 제국이 가진 것의 시너지 효과만 말하며 중개를 했다면, 앞으로 있을 동맹에서 산국의 발언권을 낮춰둘 수 있었을 텐데.
상대의 지력을 얼추 느낀 황제가 앞으로 꽤나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 모습이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는지 산국의 왕이 덧붙였다.
“가장 우선시해야 할 적은 마계이니까요.”
“……그래.”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지만, 확실히 먼저 물을 수 없어 삼키고 있던 의문이기는 했다.
마계의 주장대로라면 이 전쟁은 제국 때문에 벌어지는 것인데, 괜찮은 것인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전까지 정복 전쟁을 벌이던 제국인데 정녕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건지.
섣불리 입 밖에 내었다간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기껏 삼키고 있었건만, 산국의 왕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는 괜찮다.’
앞으로의 동맹에서 조금 불리할 수도 있으나, 고작 그 정도에 주눅들 정도로 제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애초에 그 때문에 멈칫한 것도 아니었다. 황제의 얼굴에 소리 없는 조소가 희미하게 퍼졌다.
‘분명 저주는 주술사를 통해 떼어냈을 텐데.’
전쟁이 지속되어서 그런가, 환각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아무것도 못 본 척 고개를 들어 두 왕들을 마주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의견은 잘 들었다.”
“하면….”
“마계와 인간계의 전쟁이 아니던가. 기쁘게 받아들이지.”
***
데온 하르트가 마계의 편에 돌아섰다는 소식이 인간계 전역에 퍼졌을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은 누구일까.
데온 하르트?
인간계에 없는 사람에게 어찌 해코지를 가할 수 있을까.
인류의 배신자와 사람들의 오갈데 없는 분노. 그냥 삭이기에는 너무도 컸던 이들의 분노는 황제의 명에 따라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살인귀 기사단에게로 쏟아졌다.
퍼억!
“시발, 그래! 마족들 죽이기 전에 네놈들부터 죽이고 시작하자!”
“우리가 만만하냐?! 어? 만만하냐고!”
“어차피 오늘만 사는 인생, 네놈들만큼은 죽이고 간다!”
“폐하껜… 아 몰라! 우리가 두 기사단 몫을 하겠다고 하면 되겠지!”
“얘들아, 약 먹어라!”
퍽! 콰직!
얌전히 대기…했다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만큼의 차별과 모욕을 받고도 아직까지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인정해줄만 하다.
게다가 데온 하르트를 향해 도를 넘은 욕설을 퍼부은 자들에게 발끈하여 ‘우리 대장을 모욕하지 마’라는 말을 입밖에 낼만도 하건만, 괜히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듯 그들은 온갖 거친 말을 쏟아부으면서도 그 말만큼은 꾹꾹 눌러삼키는 눈치를 보였다.
그렇기에 황제도 살인귀 기사단의 행태를 어느 정도 묵인해준 것이고.
“그것도 이젠 한계야.”
인적이 드문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기사단원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고를 좀 치긴 했지?”
“슬슬 황제가 우릴 최전방에 세우려는 낌새를 보인다더라. 자칫하면 우리, 대장을 상대로 맞붙게 생겼어.”
“넌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냐?”
“집사님이 알려주셨는데?”
“집사님은 대체…….”
최근 들어 후작저에 횃불을 들고 쳐들어오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 존재한다며 허허로이 웃던 노집사의 목소리가 기사단원들의 머릿속에 스쳤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닌, 그가 비밀리에 건네준 통신기로 대화를 나누느라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무언가 무거운 걸 질질 끌어내는 소리가 들렸지? 마치 사람 시체 끄는 소리 같았….
“집사님이라면 알고 계셨을만 해.”
“응, 집사님이라면 인정.”
“솔직히 집사님은 뭘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아.”
어디서 어떻게 구한 건지 모를 귀한 통신기를 선뜻 건네준 것도 이젠 놀랍지 않다.
살인귀 기사단원들은 초기의 화제로 돌아갔다.
“대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으니… 튀자.”
“어디로?”
“어디겠어.”
마계.
……라고 말하려던 단원이 등골을 스치는 섬뜩함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도 같은 것을 느낀 듯 급히 서로의 입을 막으며 숨을 죽인다. 날짐승에 가까운 그들답게 감은 정확했다.
“어디까지 갈까 늘 궁금했다만, 그 끝을 보기도 전에 내가 화병으로 죽겠구나. 내 영역에서 당당하게 도망치겠다 말하다니.”
저벅. 압박이 담긴 발소리가 들렸다.
그의 걸음에 따라 단발에 가까운 녹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갈색 눈이 조소를 담고 살인귀 기사단을 향했다.
황제의 명으로 살인귀 기사단원들을 임시로 맡고 있는 제국의 두 번째 영웅,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싸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후배님의 기사단만 아니었으면 수백번은 더 죽였을 텐데.”
수십도 아닌 수백.
노골적으로 흘러나오는 살기에 살인귀 기사단원들이 저마다 히익- 하고 기겁하며 몸을 낮췄다. 그중 가장 겁대가리 없는 밀란이 간신히 고개를 들고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장난기를 담아 입을 뗐다.
“프리미로 후작님께선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또 교육이라도 시키시려고요?”
“일전에 교육은 포기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어릴 때 이후로 내 분노를 그렇게까지 끌어낸 자들은 너희가 처음이란다. 그날 화병으로 죽을 뻔했으니.”
“죽을 뻔한 건 저희 아닌가요. 그날 칼 뽑으셨….”
쾅!
“세상 어느 누가 너희에게 교양을 주입할 수 있을까.”
“…….”
“후배님을 위해 너희를 가르치려 했다만, 근본이 글러먹었으니 어쩌겠니. 그냥 마음 편하게 기사단이 아니라 후배님이 기르는 개새끼들이라 생각하기로 했단다.”
“방금 개새끼라고….”
“내가 그런 상스러운 말을 했다고?”
후두둑. 스티그마가 친 벽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슬쩍 눈을 굴려 살피자 벽이 움푹 파여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
“아닙니다!”
미친개들도 생존을 위한 눈치는 있다. 기사단원들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매일같이 사고치는 살인귀 기사단원들을 제어하는 것이 버거워진 황제가 스티그마에게 떠넘긴 이후로 그들은 스티그마의 무서움을 강제로 경험해야 했다.
데온 하르트에게 인류의 배신자라는 칭호가 붙었음에도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후배님의 기사단’이라 칭하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들개 같은 후배님의 기사단에게 교양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제 휘하의 기사단장과 부단장에게 교육을 맡겼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둘 모두 첫날에 포기를 선언하고, 의아함을 느낀 스티그마가 차라리 직접 교육하겠다며 나서기 전까지만.
그는 선뜻 교육을 위해 살인귀 기사단의 앞에 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귀가 어느쪽 귀니?]검을 뽑았다.
[아무래도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필요 없어보이는데 내가 잘라줘도 되겠지?] [히이익!] [가만히 있으렴, 자칫하다간 귀가 아니라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잖니.]그거 분명 진심이었다. 눈빛이 맛이 갔었어.
아무튼 그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이후 스티그마 역시 포기 선언을 했다. 사상자가 없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큰 소동이었던 탓에 그 뻔뻔한 살인귀 기사단원들도 한동안은 스티그마의 그림자만 비쳐도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
오들오들 떨고 있는 기사단원들을 물끄러미 보던 스티그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밑에서 도망치는 것은 안 돼. 너희가 폐하조차도 제어가 힘든 기사단이라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명을 받아 너희를 맡았단다. 너희가 도망친다면 그걸 놓친 내 명예는 어떻게 되겠니.”
기사단원 클레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명’인 탓에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명예’ 탓에 놓치면 안 되는 것이라고?
그렇다는 것은…….
“폐하께 말씀드려 너희의 소속을 옮겨주마. 어디로 갈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소속을 옮기는 것은 가능할 거야.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는 것을 이유로 들면 이해해주시겠지.”
다 듣고 있는데, 너무하시네.
“공식적으로 인정된 죄인은 후배님이지, 너희는 아직 죄인이 아니니 소속을 옮겨 이동하게 된다면 죄인을 호송할 때처럼 감시가 철저하진 않을 거란다. 동행하는 병력 또한 비교적 적겠지.”
어디까지나 죄인에 비교한 것이지만.
공식 죄인이 아닐 뿐, 예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기에 감시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들의 실력으로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을 터.
“그렇다면…….”
“그때 너희가 탈영한다면 내 명예에도 큰 흠집이 생기진 않겠지. 너흰 이미 내 손을 떠난 상태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구였어도 이와 같은 상황을 맞이했을 테고.”
물론 그가 허점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던 귀족들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얼마든지 방어 가능하다. 고작 그 정도에 깎일 명예였으면 애초에 없던 것이라 봐도 되겠지.
스티그마는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붙잡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나 역시 하루 빨리 너희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심정이니.”
“거… 말이 너무 심하신 것….”
“뭐라고?”
“아닙니다!”
***
짤깍짤깍-
큐브가 거칠게 돌아간다. 데온 하르트는 마왕의 바로 아래 자리에 앉아 시큰둥한 표정으로 큐브를 돌렸다.
담담한 표정과 달리 그의 속은 상당히 뒤틀려 있었다.
‘생각보다 성과가 적어.’
계획대로라면 좀 더 빨리 제국의 성 하나를 무너뜨렸어야 했다.
마왕이 마법 금지령을 내렸다지만 마족들의 타고난 육체 능력이라면 순조롭게 돌파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마족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마계에서 좀 지냈다 하여 마족에 대해 샅샅이 아는 것도 아니거늘, 오만했어. 계획을 세우기 전에 아군에 대한 정보부터 확실히 알아두었어야 했다.
스스로의 무능함에 대한 짜증인지, 조급함이 만들어낸 짜증인지. 절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이러다 곧 시작될 회의에서 정당하지 못한 짜증을 낼 것 같아 데온은 불만스럽게 입가를 만지작거리다 눈을 감았다.
힐긋 그를 눈에 담은 마왕이 아무것도 못 본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회의실을 훑었다.
“올 마족은 다 온 것 같은데… 그럼 시작하지. 이델리아, 인간계에 대한 새 소식이 있다고 했지?”
4군단장 이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간계 요주의 왕국들이 동맹이 맺었어요. 제국, 르웨체, 산국. 유일하게 동맹에서 빠진 에스페라네스는 아주 작고 폐쇄적인 왕국이니 없는 셈 치면 거의 모든 인간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죠.”
“……결국.”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놀라움이나 충격 따윈 없는 담담한 목소리가 올게 왔다는 듯 체념을 드러냈다.
“현 제국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긴 한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은 아니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늦었다고 봐야 옳겠지.
마족들은 올게 왔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팔짱을 끼거나 의자에 몸을 기대는 등, 긴장하고 있던 육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럼 이제 방안을….”
“……방안?”
짤깍, 큐브를 돌리던 손이 멈췄다.
쾅!
다 맞춘 큐브가 내리치듯 거칠게 책상 위에 놓인다.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해지고, 모든 마족들의 이목이 한 곳을 향했다.
“방안이랄 것이 있습니까?”
백발의 사내가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어차피 다 쓸어버리게 될 것을.”
“……하핫!”
저를 똑바로 봐 오는 붉은 눈을 마주한 마왕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을 철저히 부숴달라는 부탁을 한 이후, 데온 하르트는 이따금 이런 식으로 제게 불만을 표하곤 했다.
사직을 청하며 제 신세에 대한 한탄을 표하던 이전의 방식과 달리 이제는 은근히 비꼬며 인간계 점령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달까.
‘그럴만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