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57
157. 인류의 배신자 데온 하르트(5)
“오래전… 그러니까 대략 이삼백년 전, 인간계와 마계가 크게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게 인간계의 각 성에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었거든.”
당연하다. 진은 주술의 일부이고, 주술은 마법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인간들은 기어이 마족들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를 묶어두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때 설치된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거나, 방법이 소실되지 않아 새로 설치했거나… 대충 그런 모양이야.”
이로써 마족들의 손발에 또 하나의 쇠사슬이 감겼다.
상황을 정리하면 할수록 마족들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고 있었으나, 데온 하르트는 침착했다.
아니, 오히려 감탄하고 있었다.
‘계산보다 성의 함락이 늦었다고 뭐라 할 게 아니었군.’
마족에 대해 무지한 총지휘관의 말에 따라 움직여놓고도 함락한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느냐 따질 생각은 없다. 마왕에겐 가치 증명을, 군단장들에겐 유능함을 보여야 하는 주제에 먼저 묻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니까.
대신 그는 질문을 던졌다.
“……최악을 가정해야 하니 일단 방법이 소실되지 않았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겠군요. 말씀하신 진의 범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술사의 역량과 의도에 따라 제각기 달라서 확언할 수 없긴 한데… 일단 성에 설치된 것들 대부분은 반경 2~3km까지 마법 억제가 가능했던 것 같아.”
“공성전에서 마법은 기대할 수 없겠군요. 정말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겁니까? 아주 강한 마법으로 깬다거나….”
“나나 내 계약자가 아닌 한, 그 안에서 마법 자체를 사용할 수 없을걸. 깨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테고.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이라면 쉽겠지만.”
“다른 방법…?”
“진은 핵심만 알면 깨는 건 어렵지 않아. 주축으로 삼은 물건이나 장소를 조금 어지럽히기만 하면 깨지거든.”
그 탓에 진의 주축이 지나가던 멋모르는 행인의 발에 치여 깨지는 경우도 몇 번 봤다.
“물론 핵심을 찾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찾기 어렵다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다시 계약 건으로 돌아가죠.”
“그전에 이것도 들어두는게 좋을 텐데.”
“……무슨….”
희미하게 장난기가 서린 목소리를 눈치챈 데온이 반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굳이 되묻지 않아도 말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마족들의 마법을 억제하는 방법은 진(陣)만 있는 것이 아니야. 개인에게 특정 부적을 소지하게 하면 상대하는 마족은 마법을 못 쓰더라고. 정확하겐 반경 3m 내의 마족들이라고 해야 할까.”
자비를 베풀 듯 정보가 던져졌다.
“이 방법이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넌 알아두어야 편하지 않겠어?”
마왕이 눈을 휘어 웃는다.
마왕과 황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때, 데온은 묻지 않는 정보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복수인 것일까. 마왕은 그때의 데온이 그랬던 것처럼, 데온이 제 편으로 돌아선 이후 ‘묻는 정보에만’ 착실히 답을 내놓곤 했다.
데온 하르트는 총지휘관이고, 총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다름 아닌 정보임에도.
그 상황에서 던져진 공짜 정보다. 데온에게 있어서는 나쁠 것 없는 상황일 터. 오히려 이득이라고 봐야 하는데…….
데온은 차마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이득이 순전히 마왕 본인의 재미와 흥미를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걸 알아서.
“……네.”
데온의 눈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
싱글싱글 웃는 저 얼굴에 대고 무슨 말을 한들 먹힐 리가 없다. 애초에 그럴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고.
마왕을 물끄러미 본 것도 잠시, 데온은 본래 주목하던 주제로 돌아갔다.
“계약을 통해 인간계에 나가는 쪽이 제약이 적다면 일반 병력은 바뀌는 것 없이 경계선으로, 군단장 같은 핵심 전력은 계약을 통해 인간계로 나가면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거….”
마왕이 말꼬리를 늘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계약도 인간 측에서 먼저 불러야 가능한데, 경계선이 생기며 계약을 하지 않아도 인간계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되었잖아? 오히려 계약자라는 짐이 생기지 않으니 어찌 보면 더 편하기도 하고.”
“설마…….”
“응, 마족을 소환하는 방법 자체가 인간계에서 거의 소실되었어. 소환되어도 다들 계약을 거절했거든.”
인간의 염원을 하나 들어주는 대가로 인간계에 머무는 것을 정당하게 허락받는다.
그것이 본래 마족들이 인간계에 나가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지만, 경계선이 생겼는데도 그런 귀찮은 방식을 고수할 마족은 없다.
인간의 입장에선 마족을 소환하는 방법도 까다롭거니와, 소환한다 해도 계약을 거절당하니 마족 소환 및 계약하는 방법이 소실되는 것이 당연했다.
‘아예 소실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왕궁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고서이자 금서라고 했었고, 반-계약을 맺으며 태워버렸으니 더 이상은 없겠지.
저를 소환했던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를 떠올린 마왕이 이내 모른 척 웃었다.
데온은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마족과 계약하는 방법을 작성해 인간계에 뿌리는 것이….”
“힘들걸.”
기껏 다시 내놓은 방안은 마왕에 의해 끊겼다. 줄줄이 설명이 이어졌다.
“일단 군단장급 마족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그릇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인간도 적고, 현 시국에 마족과 계약하는 방법이 알려져봤자 술수가 노골적이라 경계심만 높아질 거야. 물론 인간 중에 미친 인간이 없는 것은 아니니 그 와중에도 시도해보려는 정신 나간 인간도 있겠지만, 경계심 높아진 황제의 눈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마족 소환에는 같은 인간의 목숨이라는 거창한 제물이 필요한데?”
“…….”
환경도 척박하거니와 이를 뚫고 마족을 소환한다 해도 잔챙이일 확률이 높다.
데온은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입에 댔다. 쿨럭, 하는 작은 기침과 함께 검은 손수건이 피비린내를 머금고 축축하게 물들었다.
피를 뱉는 입과 달리 분노와 짜증을 담고 형형히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에 그를 지켜보던 군단장들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짧은 침묵 끝에 침착을 가장한 목소리가 들끓듯 낮게 흘러나왔다.
“설명… 감사합니다.”
“…….”
“결론은 꼼수는 통하지 않고 순수하게 병력 운용으로 맞부딪혀야 한다는 뜻이군요.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죠.”
그가 차분하게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고 군단장들을 돌아봤다.
“일단…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겐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네.”
무미건조한 표정과 별개로 극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총지휘관으로서의 발언이니 말은 낮춰서.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내 무지로 인해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는 불상사가 발생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귀한 시간 낭비하게 한 점, 사과하지.”
“아…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죄송합니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서…!”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데온이 화답하듯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리리넬이 감탄하며 초상화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요한 정보는 얻을만큼 얻었으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현재 벌이고 있는 지지부진한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현재의 전투라면, 파라스령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곳을 뚫어야 아미아블 영지로 진격이 가능하고, 그래야 일루스터 영지로 향하는 최단 루트를 뚫을 수 있거든.”
그의 목소리에 따라 테이블 위에 놓인 인간계의 지도를 살피며 이동 경로를 훑던 이델리아가 멈칫했다.
언제나 감겨 있어 그린 고양이 수염 같던 양 뺨의 네 개의 눈이 슬쩍 떠진다.
지도에 적힌 영지의 이름을 잘못 읽어 이상한 경로가 나온 것은 아닐까, 늘상 감고 있던 양 뺨의 눈까지 뜨고 각 영지의 이름을 재차 확인했으나, 착각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듯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파라스까지는 이해하지만… 아미아블과 일루스터 영지를 통하면 제국 수도까지는 조금 돌아가게 될 텐데요…….”
“그래서?”
“네…?”
손 끝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데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심하게 돌아서 가는 것도 아니잖아.”
산뜻함과는 거리가 먼, 진득하고 섬뜩한 미소.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상대를 짓누르려 드는 데온의 분위기에 이델리아가 움찔하며 입을 다문다.
마왕조차 잠자코 지켜보는 가운데, 침묵 속에서 군단장들을 훑던 데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좋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렴. 마왕군이 황궁으로 진격하는 것을 일루스터 공작이 가만히 두고 볼 것 같니? 응? 이델리아, 답해봐. 정말 그럴 것 같아?”
“…….”
“아니지? 공작은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인간이 아니야. 우리의 목적은 인간계 점령인데, 그냥 지나치면 분명 아주 귀찮은 적이 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물론 저 모든 말은 핑계이고 복수가 주목적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예 틀린 말도 아닌데.
설령 틀렸다 해도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이곳에서 밀릴 수는 없다. 이제 데온 하르트에게 권위는 목숨이 되었기에.
데온은 스티그마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상대가 알아서 분위기를 읽고 기도록.’
턱은 적당히 들고, 목소리는 높낮이의 폭을 줄여 차분하게.
눈은 상대를 보고, 낮잡아 보이지 않도록 말투는 우아하게.
“총지휘관은 나란다. 그러니 엉뚱한 곳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내놓은 의제에 집중하렴.”
감히 내게 대거리를 하려 들 기미가 보였으니, 미리 싹을 죽여놓아야 한다.
마왕의 편에 선 이후 우습게 보이지 않는 것에 주력하며 스스로의 빈틈에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데온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델리아로서는 봉변이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희게 질린 그녀가 얌전히 물러난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뜨고 상황을 지켜보던 드벨라니아가 천천히 눈을 휘며 손을 들었다.
“현재의 전투에 집중하기 이전에 르웨체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오. 지금 파라스령에 일정량의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고 있는 게 르웨체 왕국이라서요.”
“……생각보다 끈질기게 버틴다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드벨라니아의 말대로 르웨체부터 치워야겠네. 이참에 본보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동맹을 맺은 인류를 향한 경고를 날리는 것만으로 그들이 동맹을 해제할 리 없다. 그럴 바엔 애초에 동맹 자체를 맺지 않았겠지. 분명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리라.
그럼에도 그가 직접 경고를 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체를 밝혀 인류에게 충격을 주고, 황제의 동맹 및 내부 귀족들과의 기싸움에 타격을 가하는 것과─ 밑밥을 깔아두는 것.
경고는 밑밥이다. 르웨체는 경고를 어긴 대가의 본보기가 되겠지.
“르웨체의 국왕에 대한 소문이 있었는데….”
딱.딱.딱.딱.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책상을 두드렸다.
분명 쓸만한 정보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데온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드벨라니아, 르웨체 국왕의 가족 관계를 읊어보련. 죽고 못사는 가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죽고 못사는 가족이라면….”
한 차례 눈을 굴린 드벨라니아가 곧장 답을 내놓았다.
“아버지가 다른 동복동생이 있네요. 대외적으로는 비밀이고, 현 르웨체의 장군이죠.”
“아 맞아. 그랬지.”
정확하게는 공공연한 비밀이라 할 수 있겠다.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수군거리는 소문. 거의 당사자 앞에서만 자제하지 대놓고 떠드는 수준이라 소문에 관심 없는 저조차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상 깊은 우애이기도 했고.
데온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