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61
161. 인류의 배신자 데온 하르트(9)
허를 찌른 중요한 공격을 슬쩍 넘기려 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발언 또한 먹음직스럽게도 찌르기 좋은 허점이 보이니까.
역시나.
– ……하, 마족의 말을 어찌 믿…!
– 인간인 내가, 마계의 대표로서,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쉽게 낚인 상대의 모습에 데온은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묵직한 발언에 침묵한 세상을 두고,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애초에 마족들은 믿을만한 족속이 못 된다는 소문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었어. 너희들이 마족과 협상할 생각도 못한 이유가 바로 그 소문 때문이 아니었나? 그따위 유언비어에 휘둘리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 …….
– 마왕은 인간인 나를 받아들였다. 뒤통수를 치지 않고, 말을 뒤집는 일도 없이 아주 후한 대우를 해주고 있지.
데온 하르트의 배신 소식이 퍼진 이후, 그에 대한 소문은 끊임 없이 돌았다.
대체로 마계에서의 그의 처우에 관한 소문이었다. 분명 마계의 편에 섰다고 했는데, 무려 제국의 영웅이었던 자의 이름이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은 정말 이상했으니까.
마족에게 뒤통수를 맞고 지하에 갇히거나 죽었다는 소문이 우세했으나, 이것도 오늘부로 뒤집히겠지.
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세운 채 손잡이에 두 손을 겹쳐 얹고 곧은 자세로 앉아있던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화면을 보며 낮게 웃었다. 웃는 얼굴과 달리 그의 고개는 절레절레 흔들리고 있었다.
“틀렸어 후배님. 후배님의 이름을 건 약속은 신뢰의 근거가 되지 못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차근차근 반박하기 시작했다.
– 우선.
– …….
– 누군가의 이름값은 그 사람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약속의 당사자가 생각하는 본인의 가치에 따라 정해집니다.
말의 의미를 파악한 듯 화면 속 데온 하르트의 얼굴에 한순간 균열이 생겼다. 순식간에 본래 표정으로 돌아왔으나, 집중해서 후배님을 살피던 스티그마는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저 화면의 반론자도 보았을지 모른다.
– 당신은 인류의 배신자입니다. 사회의 인식은 바닥이죠. 그리고 당신 스스로도….
거기서 말을 멈춘 남자, 폴은 잠시 데온 하르트의 표정을 살피기라도 하듯 화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 …본인을 그리 귀히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 …….
– 그런 자가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요.
한 방 먹었다.
데온 하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폴이 기세를 이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 마왕이 인간인 당신을 받아들였다고 하셨습니까. 후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했지요? 그야 그럴만도 하죠. 당신은 인간보다는 마족에 가까우니까.
날조다.
– 붉은 눈, 흰 머리, 창백한 피부. 인간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에 더해 잔인한 손속까지! 마족으로서도 거부감이 덜했을 겁니다.
반박해야 한다.
데온이 입을 열었으나, 폴이 한 발 더 빨랐다.
– 무엇보다 당신은 가문의 사람들을 죽이고도 모자라 기어이 마지막 남은 친형마저 죽인 천륜의 배반자 아닙니까! 이런 자를 어느 누가 인간이라고 생각할까요.
“……뭐?”
사고가 멈췄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완전히 예상치 못한 공격이다. 데온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래, 인간계에서는 내가 형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구나. 그럴만도 하다. 내가 최악의 적이 되어야 인간계는 더욱 하나로 뭉칠 테니. 진실을 아는 자들도 전부 눈과 입을 닫고 내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것이다.
‘표정, 표정 관리를 해야….’
머릿속이 백지로 뒤덮인 와중에도 일말의 이성은 화면이 송출되고 있음을 인식했다.
이 상황에서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릴 수도 없으니 이성을 챙기고 침착하게 저 날조를 뒤엎어야 한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책상 아래의 손이 덜덜 떨린다. 어깨까지 진동이 전해지지 못하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이 한계여서, 분명 난 침착하게 사고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의 반응이 너무 당혹스러워서….
입을 열었다가 목소리마저 떨릴까, 데온은 가능한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사람들이 그의 침묵을 답을 하기 전의 호흡이 아닌 ‘침묵’으로 인식하기 직전, 폴이 발언권을 다시 가져가려 했을 때였다.
무표정에 걸맞은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이없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모르겠군. 지금 네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자각하는게 좋겠어. 전 인류 앞에서 거짓을 고하다니, 간도 크지. 적어도 날조가 아닌 사실을 말했어야지.
–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기서 대화를 끊으려는 듯 데온이 말을 이었다.
– 전 제국의 세 번째 영웅이자 현 마왕군의 0군단장으로서 다시 한번 말하지. 황제는 믿을만한 인간이 못 되고, 우리로서는 제국을 치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치울 수밖에 없다.
– ……!
– 그리고 마계는 인간에게 0군단장이라는 지위를 줄 정도로 편견이 없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는 인간에게 마계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이상.
슬며시 웃는 창백한 얼굴을 끝으로 모든 화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륙 전역, 아니 인간계를 넘어 마계까지 소란이 일었다.
***
“……후배님은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무려 0군단장이라니. 스티그마가 웃었다.
화면 속 남자를 향해 간이 크다고 하더니, 정작 간이 큰 쪽은 후배님이었다. 0군단장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8년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니, 제 후배님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제국의 세 번째 영웅과 마왕군의 0군단장을 동시에 역임했다는 뜻이 아닌가!
아마 황제의 명으로 어디론가 자주 오갔던 것도 마계를 오가기 위함이었으리라.
‘황제는 믿을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발언도 그렇고, 폐하께서도 데온 하르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
막판에 정신이 무너져 속수무책으로 지는가 싶더니.
“아주 큰 폭탄을 던져놓고 가는구나. 역시 후배님이야.”
살인귀… 로프티 기사단이 아미아블 영지로 이동 도중 탈주했다는 소식이 담긴 서신을 책상 위에 두고, 스티그마는 화면으로 보았던 데온 하르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이런 것들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어디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다만, 혹 문제가 있다 해도 이젠 괜찮겠지.
그 개새끼들이 제 주인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진 않을 테니.
그들이 데온 하르트에게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놈들이라면 지옥에서도 대장에게 가야 한다고 왈왈거리며 악마가 뒷목 잡고 넘어가게 만들 테니까.
그리고 그 악마도 뒷목 잡고 넘어가게 만들 개새끼들은 산을 넘는 중이었다. 정확하겐 조금 전 허공에 뜬 화면에서 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본의 아니게 잠시 멈춰 쉬는 상태였다.
화면이 꺼지고 지금까지 줄곧 이어진 이루 말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누군가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와우, 우리 대장… 0군단장이었어?”
“0군단장의 존재는 대장이 마계에 가기도 한참 전부터 있던 거 아니야? 그 말은 즉….”
“제국의 영웅과 0군단장이라는 자리를 동시에 역임하고 있었다는 거지. 임무 핑계로 어디론가 장기간 오가시던게 그것 때문이었나. ‘임무’ 핑계였으니 황제 역시 알고 비호하고 있었다는 거고.”
“뭐?”
클레터의 냉정한 분석에 밀란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른 기사단원들도 저마다 감탄하던 것을 멈추고 클레터를 쳐다보았다.
“그건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그거 정말….”
“…….”
“말도 안 되게 멋진데!”
“역시 우리 대장!”
“안쓰러울 정도로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지!”
“……네놈들이 그럼 그렇지.”
클레터는 깊은 한숨과 함께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이 새끼들아 감탄할 때가 아니야. 지금이 아니면 대장 만날 기회가 없다고. 여기서 잡히면 모든게 끝이야, 끝!”
“아, 그렇지. 철저하게 감시당하려나.”
“고문당하지 않을까?”
“그 전에 단장한테 죽을 것 같은데? 우리 쪽지 하나만 남기고 튀었잖아.”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취조당하느라 자주 볼 일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단장이다. 그간의 정과 나름의 미안함을 담아 살인귀 기사단원들은 도망치기 전, 리엔 라이너에게 쪽지 한 장을 남기고 갔다.
[단장 죄송]“이… 빌어먹을 놈들이…!”
쪽지가 처참히 구겨진 것을 알 턱이 없을 텐데도, 본능적으로 섬찟함을 느낀 단원들이 허리를 뻣뻣이 세웠다.
“……잘은 모르겠지만 역시 잡히면 죽을 것 같아, 응.”
“잡히면 끔찍한 일이 기다릴 것 같은데. 감이 안 좋아.”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입 그만 놀리고 움직여 망할 놈들아!”
이렇게 떠들고 있을 시간에 몇 미터는 더 갔겠다!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두드리던 클레터가 주먹의 방향을 바꿔 동료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재촉했다.
***
제국의 세 번째 영웅인 데온 하르트와 마왕군의 제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동일인물이다!
마왕은 데온 하르트가 대중 앞에 서는 순간에 맞춰 이 사실을 밝혔다. 충격적인 소식인만큼 거의 모든 마족들이 여기에 집중했으나, 생각보다 혼란은 적었다.
[데몬 님께서 데온 하르트래.] [진짜?! ……그런데 그게 뭐? 결국 우리 편이라는 거잖아.] [그…렇지? 이중첩자 노릇을 하고 계셨던 거니까.]그의 과거가 어땠고 정체가 무엇이건 결국 현재의 그는 마왕군에 속해 있는 명백한 ‘우리 편’이다.
놀랍긴 해도 부정적일 것도 없는 소식이었기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범상치 않다 했더니 제국에서 영웅까지 하고 계셨을 줄이야. 역시 장난 아니시네.] [인간의 몸으로 0군단장이 되신 분이니까. 평범하실 리가 없지.]그보다 이젠 데온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데몬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소란도 잠시, 마족들은 금세 다른 고민에 빠져들었다.
***
저들이 주술로 화면에 간섭을 했다지만 결국 핵심은 이 책상 위에 있는 마력석이다. 화면의 제어권이 넘어가는 낌새가 보였을 때 바로 껐어야 했다.
설마하니 제어권을 가져가기 무섭게 멋대로 꺼버리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릴 줄이야.
[그래봤자 결국 마왕의 편에 선 배신자의 발언일 뿐.]그 발언이 나옴으로써 데온 하르트는 멋대로 상대편의 화면을 끌 수 없게 되었다.
강렬한 등장에 강렬한 발언이었다. 거기서 그냥 화면을 꺼버리면 보던 이들의 뇌리에 녀석의 마지막 말이 강하게 박히게 된다. 그뿐이랴, 그 타이밍에 화면을 끈다는 것은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 즉 저 말을 인정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 되니 데온으로서는 싫어도 상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차분히 손을 뻗어 두 화면 모두 동시에 꺼버린 데온이 조용히 검은 손수건을 꺼내 입에 댔다.
초반에 목적으로 했던 바를 떠올리면 적어도 패배하지는 않았다. 역 선동도 막아냈고, 더 나아가 황제와 나라 간의 동맹, 제국 내정까지 전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폭탄을 던지고 껐으니 저쪽도 정신이 없을 터.
하지만….
“드벨라니아….”
정신적으로는 패배했다.
검은 손수건 밑으로 누군가의 이름이 웅얼거리듯 뭉개져 나왔다. 또렷하게 상대를 부르기 위해서는 입에서 손수건을 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데온은 손수건을 치우는 대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지나친 감정에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사납게 성대를 긁어내리며 마왕성을 울렸다.
“드벨라니아!!!!!”
왈칵. 검은 손수건이 축축하게 물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