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64
164. 소란(3)
위에서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전투 중의 약뿐. 전투 중이 아닐 때 사용하는 것을 걸렸다간 즉결 처분감일 터. 그리고 무엇보다….
“전투가 아닐 때도 약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망가진다. 전쟁이 끝났을 때의 후유증도 생각해야지. 약에 중독된 상태로 일상을 살 수 있겠어?”
나는 흐리게 웃었다.
“살고 싶다며. 너희는 돌아갈 곳이 있잖아. 돌아가서 일상을 살아야지.”
“…….”
“그러니까 하지 마. 전투가 아닌데도 약을 하려는 놈이 있다면 목을 쳐서라도 말려.”
“목을 치면 죽….”
“뒷목을 치라고.”
“아.”
더 길게 이야기 끌 것도 없다. 이놈들과 길게 대화를 나눠봤자 오르는 건 내 혈압 뿐이니.
나는 다른 길로 샐 기미가 보이는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 짓기 위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약을 빼앗고 사탕이라도 쥐여 주든가.”
***
찝찝한 꿈을 꿨다.
미친개들이 나오는 꿈을 꾸다니, 예감이 영 좋지 않아.
머리를 한 차례 쓸어올리며 잡생각을 털어낸 데온이 곱게 말린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데온 님, 약은…!”
움찔하며 금방이라도 입에서 담배를 빼갈 기세인 주치의를 손을 내저어 제지한 그가 테이블 위의 양초로 불을 붙이고 고개를 든다. 촛대 옆에 놓여 있는 보드게임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충 완성된 것 같은데.”
요 며칠간 가만히 있기도 좀 그렇고, 꿈자리도 찝찝해서 잡생각을 떨쳐낼 겸 만들어 보았는데, 생각 외로 결과물이 괜찮다.
흡족한 눈으로 게임 말을 하나 집어 만지작거리는데, 옆에서 게임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에드와 함께 치우며 판을 힐긋거리던 단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붙였다.
“이게 뭡니까, 마스터? 처음 보는 게임인데요.”
“체에스.”
“……체스요? 물론 체스와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뭔가 많이 다른….”
“체스가 아니라 체-에-스. 체스를 기반으로 만들어본 전략 게임이란다. 체스의 직업군 대신 궁병, 창병, 검병, 방패병 등의 각종 병과가 있고 물자와 말이 존재하지. 말은 궁병과 합치면 궁기병, 창병과 합치면 창기병이 되고….”
섬세한 게임 설명을 듣던 단이 조용히 경악했다.
‘분명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찝찝하니 집중할 거리가 필요하다며 대충 뚝딱거리지 않았나?’
저게 충동적으로 만든 게임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잔뜩 만들어 유통해도 될 정도로 섬세한 게임이다.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되어먹은 건지.
이따금 머리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만… 이런 쪽으로 두각을 드러내실 줄이야….
‘아니, 전술에서 두각을 드러내야지, 왜 이쪽에서…만 그런 건 아니구나. 생각하고 보니 지금도 나름 괜찮게 병력을 운용 중이시지.’
내심 고개를 끄덕이던 단이 문득 아직도 데온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했다.
“…그리고 물자 보급을 세 번의 턴이 돌아올 때까지 하지 않으면 운용 가능한 병력이 1/3씩 줄어든단다. 90의 병력 운용이 가능했다면 그 다음은 60의 병력만 운용이 가능해지고, 거기서 또 세 턴 동안 물자 보급이 없다면 40의 병력으로 줄어들게 되지. 숫자가 딱 떨어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 게임 시작 전에 상대와 올림을 할지 내림을 할지 미리 정해두는게….”
“자, 잠시! 잠시만요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분위기가 이상하다 했다. 무슨 진지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나 했더니만, 그냥 정신줄을 놓고 있었구나.
“데온 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제정신이 아니라니.”
“그럼 그쪽은 지금 마스터가 제정신으로 보이나 봅니다?”
“……인간들은 그런 걸 두고 인간미라….”
그놈의 인간미. 만능이네.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에드도 본인의 말이 가당치 않다는 것을 아는 듯 슬그머니 시선을 옮긴다. 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당연하게도 하얀 연기와 함께 깊은 한숨을 뱉어내는 데온이 있었다.
“……단만 남고 다들 물러가렴.”
“데온 님.”
“어서.”
무엇이 그리도 걸리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머뭇거리던 벤이 끝내 에드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간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데온이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느슨하게 의자에 기대며 단에게 테이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편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만든 김에 나와 한 판 하자. 규칙은 설명했으니 대충 알고 있겠지?”
“……음….”
“몰라도 하다 보면 익히게 되겠지. 내가 흑, 네가 백을 잡는 것으로 하고… 일단 시작 병력은 몇으로 할까?”
드르륵. 게임 말 몸통의 숫자가 새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데온이 물었다.
단은 조용히 말을 살폈다. 체스 말과 별다를 것 없지만 몸통에 0000에 맞춰져 있는 숫자가 보인다. 그것을 슬쩍 손가락으로 굴리니 틱 하고 0001로 바뀌었다.
아, 이 숫자를 돌려서 병력 규모를 정하거나 바꿀 수 있구나.
“처음이니 간단하게 전부 100으로 할까?”
“……예.”
판 위에 0100으로 맞춰진 말들이 놓였다.
이후로는 간혹 던져지는 질문과 설명만 오갈 뿐, 대체로 침묵이 방 안을 장악했다.
“왜 두 칸 이동을…?”
“기병은 두 칸씩 이동이 가능해.”
“아하.”
짧은 탄성과 함께 단이 말을 옮긴다. 데온은 그것을 눈으로 좇다가 병력을 둘로 나누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네 상단은 어떻게 되었지?”
“전쟁 물자 유통 허가서를 마스터의 이름으로 받아낸 전적 탓에 제제가 심합니다. 감시도 붙어있고요.”
“그래도 용케 살아있는 모양이네.”
“일단은 덩치 큰 상단 중 하나이니 살려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면 모를까, 아직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특히 전쟁 중의 상단은 중요하니까.”
단이 나뉜 병력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 흑의 기병이 뒤로 빠졌다.
“상단을 더 키우도록 해.”
“……네?”
“아예 그 바닥을 집어삼키면 더 좋고. 인간계가 네 상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백의 진영은 특정 병과에 주력하는 불균형한 상태였다.
흑의 방패병이 앞에 나섰다. 나뉜 병력의 일부가 보급로를 끊기 위해 움직이고, 다른 병력은 백의 진영을 공격한다.
단은 판단했다. 보급로보다는 눈앞의 병력을 막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따각- 손이 움직이고, 주력 병과가 진영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바닥을 집어삼키고 다른 상단이 성장하지도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계에서 철수하는 거야.”
“……타격이 크겠군요.”
백의 주력 병과가 흑의 나뉜 병력을 쳐내며 돌격한다. 그대로 방패병과 맞붙기 직전, 뒤에서 잠자코 대기하고 있던 흑의 기병이 움직였다.
방패병을 향해 돌격하는 백의 병력을 크게 우회해 둘러싸며 포위한다. 뒤늦게 깨달은 단이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급히 병력을 뒤로 뺐으나 이미 일부는 포위망에 집어삼켜진 뒤였다.
데온은 태연히 빼앗은 말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주술을 펼치는데 필요한 부적용 종이를 만드는 이들과 접촉해서 유통 선점하도록 해. 그게 네 상단의 주력 상품 중 하나가 될 거야.”
“……부적이요?”
이로써 보급로도 끊기고 주력 병과도 줄었다. 패배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황.
안타깝다는 듯 아직 판 위에 남은 제 병력의 말을 들어 만지작거리던 단이 고개를 들었다.
“주술의 초기 목적은 마법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앞으로 많이 사용될 테고, 아마 지금도 많이 사용되고 있을걸. 그리고 은근슬쩍 숫자 올리지 마라. 분명 거기 0032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어디서 장난질이야.”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내가 이러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숫자 돌리는 부분을 뻑뻑하게 만들었거든. 돌리는 소리 다 들린다. ……그 전에 시작 병력이 100이었는데 0132라고 되어 있으니 눈치채는 게 당연하지 않냐?”
“젠장. 아무튼 알겠습니다. 부적용 종이 선점, 그게 전부입니까?”
보급이 끊긴지 세 턴이 지났다. 백의 진영에서 사용 가능한 병력이 1/3 줄었다.
흑의 승리가 잠정적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데온은 느긋하게 말을 옮겨 백의 진영을 휘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마력석도 일부 유통이 가능해지면 그야말로 네 상단이 시장 바닥을 꽉 쥐게 될 텐데…. 이건 마왕과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고, 요정족의 약초는…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제쳐두고……. 아, 그래. 마족들의 능력을 억제하는 부적이 있을 거야.”
“…….”
“그걸 구해오도록 해. 구할 수 있다면 한 뭉치 정도.”
게임이 끝났다. 흑의 승리였다.
탁. 잡은 지휘관을 판 밖에 내려놓으며 데온이 웃었다.
“그리고 약이 다 떨어져 가는데 그것도 좀 구해오고.”
“…….”
별 생각이 없이 긍정의 답을 내놓으려던 단이 입을 다물고 그를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붉은 눈동자가 태연히 시선을 마주해온다. 짧은 침묵 끝에 단이 입을 열었다.
“마스….”
“데온 님, 실례합니다.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똑똑.
익숙한 목소리에 데온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걸음을 떼기 전, 불만스럽게 입을 다문 단을 힐긋 본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친 것 같아서 그래?”
“…….”
“잠시 넋을 놓았다고 사람을 미친 것처럼 보면 곤란하지. 난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끝으로 단의 표정도 살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희게 질린 에드와 눈이 마주쳤다.
“에드? 표정이 왜….”
“죄송합니다. 데온 님. 마왕성 정문에서… 웬 인간들이 인질을 잡고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키고 에드를 보았다. 이 녀석도 마족이다. 마족 앞에서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
티 없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무시하고 그냥 죽이렴.”
“인질이….”
“인간들에게 잡힐 정도면 별 볼 일 없는 마족일 테니….”
“인질이 7군단장입니다.”
“…….”
……걔는 왜 거기에 붙잡혀 있대니.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입가를 매만지며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데온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나를 부르는 거니? 나보다는 마왕님께 보고를….”
“대장… 아니, 0군단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 그들의 조건입니다.”
“……하아.”
어쩐지 꿈자리나 사납더라니.
‘대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간 부은 인간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데온은 끝내 참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
“대장을 만나게 해달라!”
“해달라!”
“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인질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없다!”
“없다아!!”
언제나 조용하던 마왕성 앞에는 때아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마족이 마왕성 앞에서 농성을 벌여도 경악할 판에, 인간들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그것만으로도 전례 없는 일인데, 심지어 인질까지 잡았다.
그 인질이 평범한 마족이기라도 했다면 죄다 쓸어버렸을 텐데, 하필이면 7군단장이라 함부로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
마족들은 진귀한 구경거리에 성문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저들의 땡땡 부은 간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 7군단장 실루아는….
“그러니까, 정말로 데몬… 아니 데온 님이 너희들의 대장이라는 거지? 너희의 전투 스타일이 그분과 닮아서 믿긴 하겠는데… 다시 들어도 정말 놀랍네.”
“우리야말로 우리 대장이 이곳의 0군단장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거든?”
인질범들과 태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