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70
170. 그는 그를 아꼈다(1)
마왕과의 계약 방법이 적힌 책을 두고, 그가 말했다.
[이 책을 걸고, 거래를 요청합니다.]…….
***
파라스령의 함락 소식을 들은 공작의 심정은 꽤나 참담했다.
공작은 정치인이다. 전술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사병이라도 남아있다면 한 손 보탤 수 있으련만, 그마저도 혁명군에 의해 잃은 탓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원교를 이용한 여론전밖에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마법도 있긴 하지만….’
마왕의 반-계약자가 마왕군을 상대로 그가 준 마력을 사용한다면, 과연 이를 그냥 두고 볼까.
‘힘을 거둘지도 모르지.’
줬다가 다시 뺏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확신 또한 없다.
게다가 이 마력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아껴두었다가 단 한 번, 적절한 순간에 완전히 쏟아부어 확실하게 사용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렇기에 공작은 마법을 마지막까지 아껴두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다른 패를 찾아야 해.’
다른 패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많은 것을 손에 쥐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절대적인 권력 같은 것이.
공작은 말이 없어 체스판 위의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지, 말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손안에 쥐고 있던 말을 잃은 것은 할 말이 없지만….’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오만과 방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하니 황제만 조금 양보해주면 될 텐데.
‘고집 하나는 강해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권력을 이양받고 싶으나, 현 시국 자체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오히려 혼란이 커지고 반감이 생기며 내분이 발생하겠지.
‘어리석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 권력을 환영하는 사람이 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감수할 정도로 권력에 미친 인간이 있다. 어차피 위태로운 나라, 대신 손에 피를 묻히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왜 굳이 거절하여 꿋꿋이 미쳐가려 하는가.
손끝을 자주 비비며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을 보았다. 진득하게 묻은 무언가를 털어내겠다는 듯한 움직임은 공작이 그의 눈에만 비치는 광경을 유추할 수 있게 도왔다.
‘필시 피가 손에 묻어있는 것처럼 보였겠지.’
환각의 수준이 시각과 청각을 넘어 촉각마저 실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후각 역시 실현된 상태가 아닐까.
다시 생각해도 황제의 그릇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현 시대에서는 그랬다.
평화로운 시대에 평화로운 방법으로 즉위했다면 성군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황제는 망설임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알고, 그리 행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뻔뻔한 사람이다.
그래, 이를테면 나 같은.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형이나 동생이나 하나같이 유약한 주제에 쓸데없는 고집은 강해가지고.”
오래 전,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황제가 아닌 9왕자일 때 마주했던 1왕자가 떠오른다.
수많은 왕위 계승 후보들 사이에서 기어이 후계 자리를 굳혔던, 그러나 독에 당해 시한부가 되어버린 남자가.
‘어떻게 후계 자리를 굳힌 건지 의아할 정도로 유약한 사람이었지.’
그가 아득바득 후계 싸움에 참여한 이유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였던가.
자신이 아닌 다른 형제들이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과 가장 아끼는 동생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필시 죽게 될 테니까. 그는 이 사실을 아내를 잃으며 처절히 실감한 듯했다.
그깟 가족이 뭐라고. ‘가족’ 같은 흐물흐물하고 뜨뜻미지근한 단어는 공작과는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그림자 속에 숨어 이런 빛이 나는 부류의 사람들을 비웃곤 했다.
그래서 독을 먹였다.
그 빛을 꺼트리고 싶어서, 야금야금 생명을 갉아먹는 독을 먹였다.
마침 공작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휘둘리지 않는 1왕자가 아닌 허수아비가 되어줄 다른 후계들이었기에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랬더니, 시한부가 된 1왕자가 찾아왔다.
***
“공이 흥미를 가질만 한 책이 있습니다.”
제목 없는 책이 책상 위에 놓였다. 힐긋 시선을 내려 책을 확인한 공작이 다시 1왕자를 쳐다봤다.
예상과 전혀 다른 서두였다. 독을 먹인 당사자를 찾아와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 설마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독을 먹인 원흉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일까.
의문은 짧았다. 장단을 맞춰주다 보면 본론이 나오겠지. 공작은 일단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마왕과 계약 방법이 적힌 금서지요.”
“……!”
미쳤군.
시한부가 되었더니 정말 눈에 뵈는 게 없기라도 한 건지. 어떤 미친 인간이 이걸 외부로 반출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와 별개로 흥미가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위험한 물건이군요. 이걸 제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책을 걸고, 거래를 요청합니다.”
“거래, 라….”
이제야 알겠다. 이 책을 주는 대신 해독제를 요구할 생각이군. 어쩌면 해독제에 더해 후계 자리를 견고히 굳히기 위한 ‘일루스터’의 지지도 요구할지 모르겠다.
긴장이 한결 풀린 공작이 자세를 조금 느슨히 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제게서 받아갈 것이 무어 있다고, 이리 거래를 청하십니까.”
“조건은 내 아이들… 알레테아와 엘피디우스, 그리고… 에도아르도를 지켜주는 것.”
“…….”
완전히 예상을 빗나간 답이었다.
공작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였다.
……어리석다. 황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조건이었다. 정말 독의 주인이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 후계 다툼에서 끝내 정상을 차지한 1왕자가 정말 모른다고?
“공이 내게 독을 먹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왜 해독제를 요구하지 않느냐 묻고 싶겠지요.”
“……!”
“공의 야망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공의 욕심이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요. 이 거래를 통해 해독제를 얻어 왕위에 오른다 한들, 나는 마왕과 계약하여 힘까지 얻게 된 공을 통제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은 공작의 손에 끌려 내려오고, 제가 비호하던 가족들은 전부 공작의 손에 죽겠지. 1왕자는 쓰게 웃었다.
여러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 책 말고 다른 것을 조건으로 내걸 수는 없을까. 공작이 거래를 받아들일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제물이 내 수중에 없을까.
‘그만한 제물이 없을뿐더러, 공작이 마왕과 계약한 상태가 아니어도 내겐 그를 통제할 자신이 없어.’
공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의 경로를 틀었다. 이 책을 거래에 사용한다면 어떤 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할까.
‘내가 원하는 것은 아이들의 안전과… 내 목숨.’
‘공작이 원하는 것은 권력.’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가지 전부 챙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마왕과의 계약 방법을 알아낸다 해도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것이 조건이면 공작은 거절할 테니까. 애초에 너무 많은 것을 조건으로 내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공작이 받아들일 정도로 저울추에 맞는 조건을 내걸기 위해서는….
1왕자는 깔끔히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
“어떤 조건을 걸든 그것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왕위에 오른다면 나는 목줄을 차게 되겠지요.”
언제 끌려 내려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공작의 눈치를 보는 왕이 될 것이다.
“나는 공에게 목줄을 내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본인의 목숨은 포기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1왕자의 위로 황금빛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분명 독에 생명이 갉아먹혀 야위고 눈 밑이 그늘진 상태인데, 그럼에도 너무도 눈부셔서.
“……이해할 수 없군요.”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을 곁에 두고도 눈앞의 사내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 짜증이 났다.
“제가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어차피 가만 둬도 죽을 목숨, 전하께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예 오늘 돌아가는 길에 죽이고 그 책을 얻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요?”
“지금 이 자리에서 거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즉시 이 책을 태울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에 여러 사람들에게 공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해뒀지요. 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때 죽건 죽는 즉시 공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퍼지도록 마련해두었습니다.”
“…….”
“저라고 증거 하나 조작 못하겠습니까.”
즉, 그가 이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죽어도, 암습을 당해도, 하다못해 이동 도중 재수 없이 산적들의 습격을 받아 죽는다 해도 범인은 공작이 된다는 뜻이다.
“제가 전하께서 금서를 멋대로 반출했다고 신고하면….”
“거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즉시 이 책을 태울 것이라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조사를 받을 때가 되면 이 책은 이미 존재하지 않겠죠. 물론 서고의 빈 목록은 이미 반출할 때부터 처리해둔 상태입니다. 공은 감히 1왕자를 허위신고한 귀족이 되겠군요.”
“……거래를 받아들여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제가 손해인 것 같군요.”
거래를 받아들여도 조건에 1왕자의 목숨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 해독제를 받지 않은 1왕자가 죽으며 받게 될 피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왕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공이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저는 제 죽음의 원흉을 그라디스 공작으로 바꿀 겁니다.”
“……하.”
왕국에는 두 개의 공작가가 존재한다.
그라디스 공작가와 일루스터 공작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인 탓에 그렇지 않아도 권력욕이 있는 공작, 스타베 일루스터에게는 그라디스 공작가가 눈엣가시일 것은 당연했다.
“이제 보니 협박이었군요.”
“요청입니다.”
“……좋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죠.”
***
그 뒤로 1왕자는 기다렸다는 듯 주술사를 불러 계약을 맺었다.
가족에 매달리는 꼴을 보고 유약하다 비웃은 상대였다. 지킬 것 많은 가장이 이렇게 무서울 줄 어찌 알았으랴. 정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만을 노리도록 철저히 교육된 공작으로서는 한 방 먹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조건을 다시 말씀드리죠. 간단합니다. 내 아이들, 알레테아 데세르트와 엘피디우스 데세르트, 그리고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를 지키는 것. 단, 지키는 것에 목숨뿐만 아니라 자유의지 또한 포함됩니다.] […….] [공이라면 대충 어디 한 곳에 가둬놓고 ‘지켰다’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붙인 조건인데, 말하길 잘한 것 같군요.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자제분들과 9왕자 전하께서 저를 죽이려 들어도 자유의지로 치부하고 존중해드려야 합니까?] [공이라면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겠지요. 지키기 위해서는 공이 살아있어야 하니 그 순간은 예외로 치부될 테지만, 아이들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설명만 들어도 까다로워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짓을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다. 그냥 계약을 무를까 생각하는 순간, 1왕자가 말했다.
[기간은 10년.] [……?] [이 모든 계약은 10년 후, 해지됩니다.]1왕자 입장에선 손해 보는 짓이다. 왜 굳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의문을 놓칠 리 없는 1왕자가 빙긋 미소지었다.
[10년 이후는 아이들과 공에게 맡기지요.] […….] [10년이면 아이들이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는 시간이고, 공에게도 정들기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특히 에디는… 에도아르도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자식이 아닌 견제해야 하는 형제 중 하나임에도, 내가 사랑해버린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