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76
176. 승리를 위하여(3)
국왕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위치가 위치인 탓에 슬픔에 잠겨 사는 와중에도 소식은 꾸준히 흘러들어왔다. 그렇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전에 없던 신비한 약초를 유통하는 것으로 입지를 굳혔다는 그 상단 아닌가.
‘상처가 즉각 낫는 등, 효능이 어마어마하다지.’
얼핏 듣기로는 잘려나간 팔을 다시 붙이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동생을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슬픔에 마비된 이성이 헛된 희망을 꿈꾼다.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국왕은 기어이 거절의 말 대신 허락을 입에 올렸다.
“만나보겠다. 들이도록.”
…….
상단주라는 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감히 왕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무례를 참지 않고 내쫓았을 테지만, 당장 아쉬운 것은 이쪽이기에 국왕은 별다른 지적 없이 운을 뗐다.
“덴 상단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한창 바쁠 시기일 텐데. 상단주가 예까진 무슨 일인가.”
사내가 공손히 답했다.
“르웨체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런 것은 따로 신청을 넣으면 될 텐데?”
“그렇게 하기엔 절차가 너무 오래 걸려 부득이하게 무례를 무릅쓰고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며 사내가 넉살 좋게 웃는다.
국왕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네. 덴 상단의 지부라면 이쪽에서 환영이니.”
“감사합니다.”
사내가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국왕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는 알현을 허락했던 본 목적을 꺼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네만.”
“말씀하십시오. 아는 것이라면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자네의 그 신비한 약초 중…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약초는… 없는가?”
국왕답지 않게 망설임과 긴장이 여실히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단은 그를 보다가 가려진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입 밖에 나오는 목소리는 안타까움을 여실히 담고 있었다.
“슬프지만 없습니다.”
“아… 역시 그렇군…….”
내리깔린 눈에서 짙은 체념이 묻어난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단은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장군님의 일은 들었습니다. 유감입니다.”
“!”
흠칫한 것도 잠시.
“그래…….”
힘없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다행히도 화를 내진 않는군. 소중한 이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위로라 할지라도 상처를 헤집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예민한 반응을 각오했으나 지친 건지, 체념한 건지, 예상과 전혀 다른 순한 반응에 단은 살살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을 이었다.
“제국에 많이 화가 나셨겠습니다.”
“…….”
“하기야, 태혼국에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했으니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하겠지요.”
“……뭐?”
국왕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을 똑바로 보며 그가 두 눈을 형형히 빛냈다.
“방금… 뭐라 했나?”
“태혼국에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했다고… 정말 모르셨습니까?”
“…….”
“이런, 죄송합니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실 텐데….”
“자네.”
압박을 가하듯,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게 바라는 게 뭔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왕을 우습게 보지 말게. 이래 보여도 한 나라를 책임지는 자인데, 정녕 눈치가 둔할 것 같던가?”
왕은 많은 것을 배우고 책임지며 맞서 싸워야 하는 자리다.
안으로는 귀족들을, 밖으로는 타국을 상대하며 왕권과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 앉은 자의 눈치가 둔할 리 없지 않은가.
간혹 그러지 못한 이들도 존재했으나 그런 이들은 언제나 다른 이의 손에 끌려 내려오며 역사의 뒤편으로 비참히 사라지곤 했다.
“고작 지부 따위를 위해 직접 찾아왔을 리가 없지. 그러니 터놓고 말해보게.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가?”
“…….”
단은 눈을 굴렸다.
자신의 말에 넘어간 르웨체의 국왕이 분노해 제국을 공격하여 인간계에 혼란을 야기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자네가 데온 하르트와 연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네. 만일 마족의 편에 서길 바라는 것이라면 미안하군. 제국에 대한 악감정과 별개로 나는 이미 그쪽에 서지 않겠노라 약속했으니.”
저 태도를 보아하니 어려울 것 같군.
뭐,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단은 태연히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이시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저, 잠시 눈만 감아주셨으면 합니다.”
딱 마족들이 르웨체를 통해 제국의 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동안만.
대규모의 이동도 아니니 국왕만 조금 돕는다면 다른 인간들에게 들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눈을 감아달라고.”
“네, 마계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닌 그저 눈을 감는 겁니다. 르웨체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
턱을 쓸며 고민에 잠긴 것도 잠시.
“……다시 조금 전의 대화로 돌아가 보지. 정말 황제가 태혼국에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암묵적인 긍정에 단이 슬쩍 웃었다.
아무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할까. 사실 제국을 탓하기 이전에 경계선의 존재 사실을 제국에 알리지 않은 태혼국의 잘못이 크지만, 말하지 않는 쪽이 유리하므로 그는 침묵했다.
“네, 필요하시다면 제 상단도 걸겠습니다.”
“……됐네.”
둘의 만남이 있고 시간이 조금 지나, 르웨체와 가까운 곳에 있는 제국의 남부 어느 한 지역, 로우펠 영지 근처에서 마족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경계선과 연관이 없어 황제조차 방비를 소홀히 해둔 영지에 마족이 출몰한 것이었다.
***
덴 상단이 부적에 더해 인간계에서는 본 적도 없는 신비한 약초를 유통하며 입지를 키웠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렇게 키운 덩치로 과거 자신을 견제했던 상단들을 역으로 짓누르고 있다지.
게다가 무슨 악재가 겹친 건지, 나름 안전한 남부에 있던 로우펠 영지에 마족들이 출몰했다는 소식이 뒤이었다.
남부에서 바르바이족을 소탕하던 스티그마는 이들이 끝내 제게 연락을 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 한껏 비웃었다.
참, 우스웠다.
“나보고 가문의 수치라 하더니, 꼴 좋구나. 그 수치가 사라져 주었으니 잘 돼야 할 텐데 말이야.”
제국의 두 번째 영웅, 스티그마 프리미로.
이전 이름은 스티그마(stigma) 로우펠.
로우펠가의 수치이자 오점이며 장애물인, 더러운 사생아.
빨리 죽어버리라며 전쟁터에 던져버릴 땐 언제고, 위험해지니 핏줄을 언급하며 저를 찾는 꼴이 실로 가소롭다. 그는 입가에 띤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내가 그쪽의 연락은 무시하라 했을 텐데. 로우펠가에 관한 소식은 멸문 소식이면 충분하다고.”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황제는 귀족들의 사병을 경계선 근처에 있는 영지 위주로 배치하고, 최소한의 분배 이후 남은 거의 대부분의 병력을 밀레르 영지에 쏟아부었다.
즉, 경계선과 거리가 먼,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는 영지에는 병력 배치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이 출몰했으니, 반응이 어떻겠나.
“폐하, 이는 안전한 영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증명입니다. 경계선 근처의 영지뿐만 아니라 소신들의 영지도 언제 마족이 나타나든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방비가 필요하는 뜻이지요. 한데, 폐하께서 사병을 거둬가셔서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부디 저희의 병력을 돌려주시어 방비를 할 수 있게 해주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분명 그쪽엔 경계선이 없었는데, 어떠한 전조도 없이 마족이 등장했다. 불안할 만도 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마법이라도 쓴 건가? 하긴, 마법 사용을 억제하는 진은 각 성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다. 제국의 전 지역을 뒤덮지 못하는 한, 마법 사용은 충분히 가능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귀족들이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을 보니 이것 역시 제게만 보이고 느껴지는 환각의 일종일 테지. 황제는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펴며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이동할 확률은?’
마법이든 무슨 다른 방법을 썼든, 소수만 출몰한 것을 보면 대규모 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 소수만 출몰했지.’
소수, 출몰, 공격은 가하지 않는 움직임.
핵심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황제는 주어진 정보를 조합하여 하나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건….”
“허수군요.”
“…….”
부드럽지만 작지 않은 목소리가 이목을 끌었다.
운을 떼던 황제조차 입을 다물고 공작을 보는 가운데, 많은 이들의 시선 가운데서 그가 눈을 휜다. 여유로운 목소리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침착하고 상황을 다시 보시지요. 발견된 것은 소수의 마족들입니다.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했고 개중 일부가 발견된 것이라 하기엔 아직도 공격을 가하지 않고 있고요.”
“……아.”
“제국을 불안하게 만들고 흔들기 위한 허수입니다. 아마 마족들은 지금의 상황을 바랐겠지요.”
귀족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한 황제가 병력을 모든 영지에 재분배하거나 사병을 돌려준다면 그야말로 마족들이 바라던 최상의 상황이 되었겠지.
보라색 눈동자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않고 앞장서서 소란 떨던 이들을 훑는다.
몇몇 이들이 움찔하며 수그러들고, 덩달아 불안함으로 소란스러워졌던 장내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대규모 이동은 불가능한 방법일 겁니다. 대규모 이동이 가능했다면 로우펠 영지는 물론이고 진작에 각 영지를 휩쓸었을 테니까요.”
로우펠 자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공작은 그에겐 시선도 던지지 않고 싱긋 웃었다.
“그러니 침착하시지요. 마족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로우펠 자작이 반박하고 싶은 듯 어물거린다. 거기서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가 나섰다.
공작이 전부 설명한 덕분에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이 결론만 내리면 되는 상황이다. 힐긋 공작에게 시선을 던진 그가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려 로우펠 자작을 보며 말했다.
“일단 마족이 확인된 것은 사실이니 로우펠 영지에는 지원을 보내 두도록 하지. 그 근처 영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병을 돌려주는 것까지는 너무 나간 것 같군.”
그거야말로 마계 측에서 바라는 것일 테니까.
더 할 말이 없는 듯 잠잠해진 좌중을 둘러보며 황제는 이후 병력을 일부 빼며 불안해질 밀레르 영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병력을 빼 지원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다른 곳엔 이미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한 채 거의 모든 병력을 그곳에 보냈기에.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남하하기 전에 남겨둔 기사단을 지원 보내야겠군.’
시간이 없으니 이 자리를 파하고 바로 움직여야겠다.
***
토산을 쌓자.
로우펠 지원을 위해 밀레르 영지에 주둔하던 병력이 일부 줄었다지만 결국 그뿐이다. 그래 봤자 성을 끼고 버티는 건 똑같기에 데온으로서는 저 성벽 너머로 진입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
“마침 흙 퍼 나르기 좋은 환경이네.”
뒤에 숲도 있고.
불붙은 담배를 허벅지의 벨트에 지져 끈 데온이 느리게 검은 손수건을 꺼내 들며 돌아섰다.
“난 들어가서 좀 쉴 테니 너흰 그동안 토산을 쌓고 있으렴.”
아, 당연한 거지만 주위에 경비 두는 것 잊지 말고.
가볍게 내뱉은 총지휘관의 한마디에 산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흙을 나른다. 아미아블 변경백은 성벽 앞에 쌓이기 시작하는 흙을 보는 즉시 데온 하르트의 생각을 눈치챘다.
“토산을 쌓아 성벽을 넘을 생각이군.”
물론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다.
변경백은 빠르게 쌓여 가는 흙을 보며 나직이 명령했다.
“궁병 준비. 그리고 조금 전 도착한 프리미로 기사단을 부르도록.”
토산을 쌓는다니, 방해가 없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거기에 방해까지 얹어진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들까.
‘시간 끌며 최대한 버텨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좋지.’
운이 좋으면 수성전에 성공할 수도 있을 터.
텐더 아미아블은 굳건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