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78
178. 너를 위하여(1)
미심쩍다는 듯 황제를 살피던 황태자가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고기를 확인하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전장에 오래 있던 사람들은 피 냄새에 예민하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고기를 바짝 익혀 내오라 해야겠군요.”
“…….”
글쎄, 그것 때문은 아니다만.
그동안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냐며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황태자를 향해 황제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 황태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황제는 황녀까지 전부 식사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테이블 한쪽의 종을 흔들었다.
테이블 위의 그릇들이 치워지고 후식이 나왔다.
세팅을 마친 사용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황태자가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식사를 잘 하지 않는 황제의 앞에서 무거운 주제를 꺼낼 수 없어 후식 시간까지 기다려온 질문이 던져졌다.
“밀레르 남작령이 무너졌다고 들었습니다. 아미아블 변경백은 전사했고요.”
오늘 전해진 소식이다. 이제 곧 귀족들도 들을 테고.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지는 피곤한 상황에 황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마왕군은 지금도 수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을 테지요.”
“그것도 맞고.”
“한데,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이?”
황태자의 얼굴이 답답함에 일그러졌다.
“병력을 더 보내 막아도 모자랄 판에, 왜 전부 물리셨냐 이 말입니다.”
아미아블 변경백이 밀레르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황제가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밀레르부터 수도까지 오는 직선 경로의 모든 제국민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단지 그뿐이면 이해하련만, 그 다음으로 그가 한 행동은 그 경로에 머무르던 귀족들과 병사들을 물리는 것이기에 황태자로서는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으면 예상 경로에 병력을 집중해야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행동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수도까지 길을 터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천도를 위해서, 라고 말해두지.”
“……수도를 옮긴다고 하셨습니까? 이 상황에?”
“이미 대부분의 준비는 마친 상태다.”
“아니, 하루 이틀로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 도대체 언제….”
“글쎄.”
황제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삐딱하게 턱을 괬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황태자와 황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언제부터 준비했느냐 묻는다면 데온 하르트가 저를 찾아와 원망을 쏟아붓고 나간 순간부터, 라고 봐야 정확하겠지.
‘물론 그전에도 은연중에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본격적인 것은 그때부터였으니.’
황제는 크루엘에 대한 사과이자 경의의 표시로 그의 뒤를 이어 데온 하르트의 증오를 제게 집중시켰다. 황제에게 증오를 품은 데온 하르트가 완전히 마계의 편에 설 것은 쉽게 예측 가능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뿌린 씨앗은 당사자가 거두는 것이 옳으니.
“현 시국을 고려하여 가장 어울리는 장소를 골랐으니 걱정 말도록. 당연히 본궁으로 쓰기 적당한 별궁 또한 그곳에 있다. 후에 시국이 안정되고 차차 확장해 나가면 될 터.”
“지금 제가 그것 때문에 그러는 게…!”
“에스페라네스만큼은 못해도 상당히 튼튼한 요새다. 식량도 옮겨두었고, 안에서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구조이니 최악의 경우 사방이 포위되어도 버틸 수 있겠지.”
불길함을 느낀 황녀가 고개를 돌려 황제를 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녀의 감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는 황제 또한 잘 알고 있기에 황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꿋꿋이 황태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깐 채 그의 말을 듣던 황태자가 고개를 들지 않고 나직이 질문했다.
“언제 옮기는 겁니까?”
“곧.”
“현 수도는 시간을 벌 미끼가 되겠군요.”
“그들이 도착했을 땐 텅 비어있겠지.”
“그래도 그들의 진격 속도가 생각보다 빠를 때를 대비하여 시간을 끌 병력을 중간에 배치해두는 편이 좋을 텐데요.”
“몇몇 고집 센 이들이 물러나지 않고 경로에서 버티고 앉아있더군. 그것으로도 충분하니 이 이상 쓸데없는 희생을 늘리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병력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걸 병력이라고 칭하기엔 영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정말 완전히 이동하기 전에 그들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걱정도 많군.
황제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당연히 그때를 위한 대비 또한 되어 있다. 네가 걱정할 것은 없어.”
***
텐더 아미아블이 무너지고 마왕군은 미친 듯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발악에 잃은 병력이 적지 않아 보충해야 하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마왕군은 그럴싸한 전투 하나 없이 수월하게 나아갔다.
도착할 때마다 대다수가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있는 성이었으니까. 성문은 잠겨 있었으나 그건 사다리로 성벽을 넘어가 열기만 하면 됐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만.
‘찝찝해.’
더할 나위 없이 찝찝하다.
수도로 향하는 것이니 저항이 거세야 할 텐데,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데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간혹 사람이 남아있는 곳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대비하고 있다’가 아닌 ‘남아있다’ 정도의 개념이었기에 그리 뚫기 어렵지도 않았다.
‘허수? 함정인가? 아니면 텐더 아미아블이 무너져서 포기한 건가?’
통신석을 들었으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뒤로도 쭉 비어있다는 것뿐. 드벨라니아조차 이유에 대해서는 조사 중이라고 했으니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보다 데온 님, 아직도 못 만나셨어요?] [누구를?] [아… 아직인가 보네요……. 어느 미친놈이 데온 님께 가겠다고 기어이 탈주했거든요.] […….]뒤의 대화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무시한 채 껄끄러운 마음을 안고 나아가길 한참.
“데온 님, 저기 성이 보입니다.”
“……아, 벌써.”
어느새 현 하르트 가주가 머물고 있다는 영지에 도착했다. 데온은 익숙한 성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약한 몸을 이끌고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없어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그림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본 것이라고는 제가 살고 있는 본가 저택밖에 없는 아이는 그림으로 세세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별장의 모습에 빠졌더랬다.
입가를 만지작거리던 데온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하르트가의 가주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네, 도망치지 않고 이곳 별장에 머물고 있다 합니다.”
“그것 참, 의외네.”
이 영지의 이름이 뭐였더라. 의미 없는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홀로 나아가는 데온의 행동에 놀란 이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경계하듯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린 단이 서둘러 곁에 다가왔다.
“마스터, 위험하게 혼자 나아가시면….”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미리 마법을 새겨둔 물품은 진(陳)의 영역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것 같던데.”
부관이자 부군단장인 에드는 마왕성에서 서류 처리 및 마계 내 주요 소식 전달을 맡고 있다.
새삼 만능이었던 그의 부재를 실감하며 데온은 그 대신 저를 따라온 이름 모를 마계의 장수를 돌아보았다.
“순간이동 마법을 새긴 물품 같은 건 없니?”
“죄송합니다. 물건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나마 마력석이 가장 마법을 잘 받아들이기에 주로 사용한다지만, 그것 또한 한계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편의를 위한 소소한 마법밖에 새겨두지 못하는 겁니다. 순간이동은 범위를 한참 벗어난 고위 마법이고요.”
“그렇구나.”
뭐, 그럴 줄 알았다. 애초에 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데온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멈췄던 걸음을 뗐다.
“가주가 머물고 있는 것 치고는 성벽 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마스터, 함정일 수도 있으니 물러서심이….”
“글쎄. 난 함정보다는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이 가주가 있는 별장을 중심으로 지키고 있다는 쪽에 걸지.”
“그럼 지금까지처럼 사다리로 성벽을 넘어 문을 열면 되겠군요. 그런데 어딜 가십니까?”
“이번엔 내가 직접 문을 열어볼까 해서.”
“……예?”
귀를 의심하듯 돌아오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마족들을 향해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단이 따라붙었으나 데온은 그를 힐긋 돌아보기만 할뿐, 따로 떼어내지 않았다.
어느덧 도착한 견고한 성문 옆 벽돌에 손을 올렸다.
‘성문 기준 오른쪽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오랜 역사를 가진 정통 하르트가에서는 대대로 후계자에게 모든 하르트령 소속 영지 및 저택의 비밀통로를 가르친다.
‘직계’도 아닌 오로지 ‘후계자’에게만.
필시 가주 자리를 노린 다툼에서 후계를 지키기 위해서겠지. 가주 자리를 노리는 자들은 주로 형제나 그에 준하는 친족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아버지와 형은 교육의 장소에 기웃거리는 어린 둘째를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아닌 척 의자를 하나 더 내오고 무심히 수업을 진행했더랬다.
‘당시엔 경계할 가치도 없는 약한 녀석이라 그냥 내버려 둔 줄 알았는데….’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숨이 턱 막힌다. 데온은 내색 않고 두 번째 줄의 벽돌을 세며 성벽을 따라 이동했다.
돌덩이의 일부가 바스러져 심장에 박힌 듯 지끈거리는 가슴의 통증이 이어졌다.
‘나를 믿었던 거였어.’
그들은 나를 믿은 것이다. 아니, 믿는 것을 넘어 지키고 싶던 것이다.
그렇기에 규칙을 깨고 후계가 아닌 둘째에게도 비밀통로를 가르쳤다. 누군가 가르쳐준 것이 아닌 내 힘으로 스스로 익히고 배운 것이라고 자부하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 보다 넓은 시야로 과거를 돌아보았고, 깨달았다.
나의 배움은 그들의 암묵적인 허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다. 데온은 스스로를 향해 치솟는 살의를 꾹 눌러 담고 98번째 벽돌을 빼냈다. 생각보다 무거워 단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나 문제 될 건 없었다.
벽돌이 빠지고 숨겨진 장치가 드러나자 단이 눈을 살짝 키웠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는 하르트가의 직계였지.’
그래도 보통 이런 건 후계자에게만 알려주던데, 이걸 알고 있을 줄이야.
튀어나오려는 감탄을 삼킨 것이 무색하게도, 데온이 장치의 레버를 잡아당기자 그는 끝내 감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비밀통로라는 것을 증명하듯 소리 없이 바닥이 열린다. 그 흔한 흔들림 하나 없었다. 조용히 눈앞에 계단이 드러나고 그 아래로 시커먼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한 듯 넋을 놓은 단을 지나쳐 계단 통로의 벽을 더듬으며 데온이 한 마디 던졌다.
“벽돌은 제자리에 꽂아둬.”
“아, 네.”
단이 서둘러 벽돌을 제자리에 밀어넣고 통로에 들어온다. 그때까지도 벽을 더듬던 데온이 무언가 발견한 듯 꾹 눌렀다.
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통로 입구가 닫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단이 있을 법한 곳을 더듬은 그가 이내 상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가자.”
단은 말없이 앞으로 당겨지는 제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무거운 긴장감을 깨부수듯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횃불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습니다.”
“내가 길을 아는데, 굳이?”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보다 이런 비밀통로가 이 영지에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지리까지 외우고 계신 겁니까?”
“그야 하르트 소속의 모든 영지와 저택의 비밀통로를 외웠으니까. 후계자들이 후계 수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고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비밀통로 외우기거든.”
“마스터는 후계자가 아니었을 텐….”
기민하게 데온의 분위기를 눈치챈 단이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