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79
179. 너를 위하여(2)
상단 운영을 통해 자연히 각종 정보와 가까워지며 침묵의 중요성을 배웠다.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이전보다 더 성장한 눈치가 그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 통로는 어디로 이어지는 겁니까?”
“……저택 내부도 있고, 이 영지 어딘가의 으슥한 곳으로 연결되는 곳도 있고.”
“다양하군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도망치기 위함이니까. 외길이어서는 곤란하지.”
“마스터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어둠이 눈에 익자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은 소매를 잡은 손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선 데온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되짚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답을 찾은 그가 한 방향으로 단을 이끌기 시작했다.
“저택. 얼굴 한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욕심 많은 가신들이 세운 허수아비 방계 가주.
분명 가장 먼저 도망쳤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어찌하여 이곳에 남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미 그는 데온이 조금 겁을 준 것만으로도 한 번 본 저택에서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이곳 별장에 머무르고 있던 것일 테고.
한 번 도망쳤는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배신을 당한 것인지, 자의로 남은 것인지. 어느 쪽이든 데온은 가주의 얼굴을 직접 보고 명확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상대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렇게 둘이서 가시려는 겁니까? 위험할 텐데요.”
“네가 지켜줄 거잖아.”
“네?”
“너 이젠 검 잘 쓰지 않아?”
단이 조금 놀란 눈으로 앞서 걷는 데온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잘 띄는 하얀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검에 능숙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날 믿지 않는 주제에, 이 확신 넘치는 발언은 또 뭐라고 해야 할지.
어쩐지 우스웠으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짧은 침묵 끝에 느리게 말을 꺼냈다.
“저는 마스터가 싫습니다.”
“알아.”
“상당히 원망스럽고, 조금은 증오하죠.”
“그것도 알고 있어.”
“그런 주제에 제게 목숨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절 믿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더니만.
데온이 피식 웃었다.
“믿지 않는다니? 이런 쪽으로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너와 단둘이 있지도 않았겠지.”
“…….”
“내가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데온은 단이 저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한다. 죽이지 않는 것을 넘어 지키려 들 것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다.
“네가 생각하는 미래의 중심에는 반드시 내가 있을 텐데, 어떻게 내 죽음을 방관하겠어.”
“…….”
“난 네게 있어 목표를 이루어줄 도구이자 ‘목표’ 그 자체야. 그렇지?”
재앙의 앞잡이라는 예언과, 예언대로 따르겠다는 다짐. 그리고 ‘재앙’인 데온 하르트.
이미 단은 이쪽에 오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 섰다. 남은 것은 나아가는 것뿐인데, 등불이자 이정표인 데온 하르트를 어찌 죽게 두겠는가.
‘…….’
단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데온이 더 빨랐다.
손끝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어느새 도착한 막다른 길에서 데온은 검지를 제 입술 위에 올리며 짧게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쉿, 다 왔다.”
“…….”
단이 입을 다물고 데온이 천장을 더듬었다. 출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대로라면 이곳은 집무실 책장 뒤의 비밀공간과 연결될 것이다. 별장에 와서도 일해야 하는 바쁜 가주를 위한 장소.
이제 이걸 밀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보다 무겁네.’
도대체 누가 설계한 거야? 이러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갇혀 죽겠다.
짜증을 삼킨 채 단을 툭툭 건드리고 출구를 가리켰다. 눈치 빠른 그가 곧장 나서 그것을 밀어 올린다. 손쉽게 들어 올려진 그것에 더한 짜증이 치밀었으나 이건 약과였다.
“풋.”
……빌어먹을.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단을 돌아봤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두 손으로 허공을 잡고 들어올리는 시늉을 한다.
‘올려드릴까요?’
‘개새끼.’
정말이지, 이거 설계한 사람을 잡아 족쳐야 한다. 아, 이미 고인인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 기세 좋게 출구에 매달렸으나 팔만 부들거릴 뿐, 도통 몸이 올라가질 못한다. 결국 한참을 끙끙거리던 데온은 매달린 채 단에게 사납게 턱짓했다.
‘올려.’
‘네네.’
신뢰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어색해진 분위기는 진작에 풀렸다. 단은 피식피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재수 없는 꼴에 데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니다, 엎드려.’
‘네?’
‘내 발판이 돼라.’
‘…….’
잠시 뒤,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데온과 등 한가운데에 신발 자국이 난 단이 나란히 섰다. 단을 시켜 나온 출구도 꼼꼼하게 다시 덮은 데온이 시야를 꽉 매운 책장을 확인하고 슬쩍 웃었다.
‘제대로 왔네.’
가주 녀석은 어디에 있으려나. 집무실 아니면 침실에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집무실 쪽으로 와봤는데.
시야를 가리는 이 책장은 여기를 누르며 밀면 빙글 돌아가며 열릴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책장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병력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지. 너도 나가서 이 저택이나 지켜!”
“하지만 기본적인 호위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이 영지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거든? 나가, 나가!”
역시 성벽을 지키는 대신 저택을 지키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구만. 황명에 따라 영지민들은 대피한 상태일 테고.
확실히 마왕군이라면 성벽을 막은 것도 아니고 제 저택에 틀어박힌 별 볼일 없는 인간을 굳이 전투까지 치러가며 끌어낼 필요가 없을 테니 그냥 지나칠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도망치는 편이 더 안전할 텐데, 멍청하게 왜 남아서는.’
지금도 그렇다. 호위 하나 정도는 곁에 두는 편이 좋을 텐데, 그는 싹 다 물리고 혼자 남길 택했다.
……어쨌든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겠지.
단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 책장 한 부분을 누르며 밀었다. 책장이 돌아가며 열리기 무섭게 소리 없이 뛰쳐나간 단이 가주의 뒤에서 언제 빼든 건지 모를 검을 놈의 목에 겨누었다.
“……!”
“소리 지르면 죽이겠다. 누군가 이곳에 들어와도 죽일 거야. 살고 싶다면 눈치껏 처신하는 게 좋겠지.”
협박까지 깔끔하군.
금방이라도 소리 지를 듯 벌어지던 놈의 입이 급히 닫혔다. 데온은 책장을 원 상태로 돌리고 느긋하게 녀석의 등 뒤부터 책상을 빙 둘러 나와 마주 보고 섰다.
데온을 알아본 녀석의 눈이 커졌다.
“너는…!”
“쉬이- 착하지? 목소리 낮춰.”
“어떻게 여기에…! 아니, 목숨만… 제발 목숨만은…….”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근처 의자를 질질 끌고 와 놈의 책상 앞에 앉았다.
마계에서 늘상 바짝 긴장하고 다니던 태도는 집어치우고, 한결 느슨하고 삐딱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앉은 데온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냥 내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말이야.”
“…….”
“왜 도망치지 않은 거야? 저택만 집중적으로 지키는 걸 보면 병력도 넉넉지 않은 것 같고, 영지도 텅 비어있는 것 같던데.”
“…….”
“대답.”
재촉하듯 단이 검을 더 들이민다. 날붙이가 목에 살짝 파고들며 서서히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위협을 느낀 듯 다급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 가주의 인장을 잃어버렸다.”
“…….”
“……잃어버렸습니다.”
딱히 그것 때문에 침묵한 것은 아니다만. 뭐, 얌전해지면 나야 좋지.
그보다, 다른 속셈이 없다는 건 다행이긴 한데… 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일단 몸을 피했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도 될 텐데.”
“네겐 고작일지라도 내겐 그게 전부…!”
“목소리.”
“……제게 남은 건 이 자리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없으면 전 명분상의 가주로도 취급받지 못할 겁니다.”
그깟 인장이 목숨보다도 중요해서 이곳에 남았다.
데온은 잠시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렇다면 가신들은 이 상황을 모르겠군.”
“네, 들키지 않기 위해 나중에 뒤따라가겠다고 하고 먼저 보냈습니다. 급한 상황이다 보니 이유를 캐묻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도망가버리더군요.”
“흐음… 좋아.”
이곳에 남은 병력이 있지만 위협적이긴 커녕 저택 하나 간신히 지킬 수 있을까 말까 한 귀여운 수준이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도 뒤통수가 근질거리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병력.
그리고 눈앞의 가주란 자는 죽일 가치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니. 데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긋 웃었다.
“살려주지.”
“!”
굳이 건드려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어차피 제국이 망하면 놈이 애타게 찾는 가주의 인장도 무용지물이 될 테고, 무엇보다 이유가 있다지만 도망치지 않은 것 하나는 칭찬할 만하니까.
데온은 저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녀석을 향해 눈을 휘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이곳에 머물지 않고 지나갈 거야. 그러니 괜한 수 쓰지 말고 닥치고 얌전히 있어.”
마족이 지나간 영지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가주라는, 의심을 잔뜩 받을 법한 오명은 알아서 감당해야겠지만.
냉정히 돌아섰다.
“이제 1분간 눈 감고 있어.”
“……?”
“그 전에 눈 뜨면 죽일 거야.”
“!”
화들짝 놀라 눈을 질끈 감는 녀석을 확인하고 단을 보았다.
‘가자.’
‘예.’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인 둘의 움직임을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운 것 없는 허수아비 방계 가주가 알 리 없다. 때문에 착실히 숫자를 세며 눈을 감고 있던 가주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에 멈칫했다.
‘데온 하르트가…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전보다 더 재수 없게 반반해진 것 같던데.
***
“역시 데온 님…! 몸소 성문을 여셨군요!”
“산책하듯 나가셔서 성문을 열고 돌아오셨어!”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단이었나? 인간 너는 왜 등짝에 발자국이 나 있냐?”
“…….”
“다들 그만하고 출발하자. 이곳엔 머무르지 않을 거니 괜한 곳 기웃거리지 말고 바짝 따라오렴. 이탈자는 탈영으로 간주하마.”
***
산국의 왕이 통신을 걸어왔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슬슬 알 때가 되긴 했지. 아니, 모를 수가 없으려나.
높은 언성이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음에도 황제는 동요 한 점 없이 나른히 황금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에겐 할 말이 있는데, 이리 먼저 연락을 해주니 반갑군.”
지나치게 태연한 태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듯 통신석 너머의 상대가 침묵한다. 황제는 언제부턴가 아물어가는 왼손등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봄 햇살이 녹아 스민 듯 평화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산국과의 동맹 파기를 통보한다.”
– ……!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내가 살아있는 한.”
– …….
“제국의 행보에는 신경 쓰지 말도록.”
괜히 기웃거리지 말 것이며, 제국을 돕지도 마라.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황제인 제국과 산국의 연은 여기까지이니.
– 그게 무슨… 아니, 잠시…….
그대는 머리가 좋으니 무슨 뜻인지 얼추 눈치챘겠지. 확실하진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은 없다. 그대가 어디까지 눈치채고 느꼈는지는 이쪽의 관심 밖이기에. 황제는 느리게 손을 들어 통신기 위에 올렸다.
“그럼 일이 바빠서 이만 연락을 끊도록 하지.”
– 잠…!
뚝.
가차 없이 통신이 끊겼다. 등받이에 느슨히 기대고 있던 것도 잠시, 황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쁘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회의를 소집한 것도 아닌데, 귀족들이 몰려와 황제를 뵙겠노라 외치고 있으니까.
‘회의장에서 기다리라 했으니 그곳에 있겠지.’
또 무어라 말하며 그들을 누르고 설득해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진득한 피곤이 발목을 휘감고 올라와 머리를 꾹꾹 누른다.
생생히 느껴지는 무게감에 고개가 숙어질 만도 하건만, 황제는 한치의 수그림 없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