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81
181. 너를 위하여(4)
젊어서 세상에 나와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 지금까지 몇십 년간 착실히 중개인의 역할을 하며 다른 이들보다 많은 권한을 얻은 사람이 바로 레멤베르다.
공작의 의뢰는 중개인이 받아들여도 위에서 거절할 의뢰이지만, 그 중개인이 레멤베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에게는 한 번 정도 위에서 거절한 의뢰를 통과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까.
때문에 레멤베르는 딱 잘라 거절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돈은 섭섭지 않게 주겠다 하셨지요.”
“네.”
“얼마입니까?”
암묵적인 승낙!
가장 큰 고비를 넘겼으니 됐다. 여유를 되찾은 공작이 웃었다.
“공작가의 모든 재산.”
“……진심이십니까?”
“설마 제가 지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애초에 돈에 그리 연연하는 편도 아니고, 재산과 가문을 물려주어야 할 후계도 없다.
평생 펑펑 써도 남아도는 거, 이참에 싹 다 써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후의 일은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상당히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던 그가 혼인을 하지 않은 이유 또한 내 것을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니.
‘내가 살아있을 때만 화려하면 되는 것을, 내가 왜 죽고 난 이후를 생각해야 하지?’
그러니 아낄 것 없다.
공작가의 모든 것은 오로지 내 손아귀에서만 굴러다니는 내 재산이다. 어디에 쓰든 그건 내 마음이기에.
무엇보다 용병을 지원받아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대가는 바쳐야 무게추의 균형이 맞는다. 사실 이것도 부족하다 할 수 있겠지만, 공작가의 ‘모든’ 재산이라는 점에서 가산점을 줄 수 있으니 눈앞의 노인도 긍정적으로 고려할 터.
아니나 다를까.
“……상황을 보아하니 가능한 빠른 지원을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만….”
긍정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손님께서 만족하실 만큼의 규모는 파견 절차가 복잡하고 이동 속도도 느려 단기간 파견이 어렵습니다.”
……내용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마왕군이 지금 어디까지 왔다고 했더라. ‘여기까지 왔구나’하고 한 숨 돌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영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으니 필시 빠른 시일 내에 수도에 도착할 것이다.
‘잘 때 빼고는 거의 쉬지도 않고 달리는 모양이던데, 이동수단도 마계의 말이 주를 이루고 있는 데다 인간계의 말은 소모품처럼 중간중간 탈취해 교체하고 있으니….’
한 열흘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기간을 어림잡던 공작이 대충 계산을 끝낸 듯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는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에스페라네스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이 대화가 끝나는 즉시 연락을 넣어 파견 요청을 해야겠군요. 백 명까지는 복잡한 절차 없이 즉시 파견이 가능합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참고로 수가 늘면 늘수록 이동 속도가 느려지니 염두에 두고 답해주시길.”
“……이런 쪽으로는 저보단 당신이 더 잘 알겠죠. 믿고 맡기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은 레멤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적으로 일흔 명 정도를 기한 내에 보내고, 후발대의 개념으로 상당량의 병력을 뒤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한 가문의 발자취이자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대가로 약속받았는데, 고작 일흔 명으로 퉁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해냈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던 공작이 뒷말에 고개를 들었다.
당장 필요한 것은 기한 내에 도착할 병력뿐이다. 그 이후의 후발대는 아직 필요하지 않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니.
공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후발대 말입니다.”
***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마왕군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 확률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한 시라도 더 벌기 위해, 공작은 거침없이 진격하는 마왕군의 발목을 잡을 방법을 생각했다.
……사실, 고작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닌 마왕군 자체를 물러가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미 시도해봤고, 실패했지만.
‘마왕과의 협상.’
마왕을 설득하면 마왕군이 멈춘다. 잘만 하면 그들 전체가 인간계에서 물러나는 것도 가능할 터.
마침 공작은 마왕의 반-계약자다. 절대 적대적이지 않은, 오히려 우호적이라 볼 수 있는 관계와 약간의 마력만 사용하면 마왕과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유리한 위치.
그는 단단히 각오한 뒤 마왕에게 연락했고.
[아, 필요 없어.]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무슨 생각으로 연락했는지는 안 들어도 뻔하지. 마왕군을 물려달라거나, 잠시라도 멈춰달라거나, 뭐 그런 종류일 거 아니야. 어느 쪽이든 난 들어줄 생각 없으니 알아서 해.] […….]단호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고작 이 정도에 포기하고 물러설 수는 없다. 공작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저렇게까지 단호한 것을 보면 마왕군을 물려달라는 것은 절대 통하지 않을 테고, 그나마 잠시라도 멈추는 쪽을 노리는 게 성공 가능성이 크겠군.’
어차피 소기의 목적도 그것이었던데다 이쪽이 아쉬운 입장이니 걸릴 것도 없다.
……이전에 그는 내기 제안을 받아들였었지. 본래 실패할 뻔했던 계약도 일부나마 이렇게 받아냈었다.
그러니 설득이 안 된다면 내기로.
[내기를 제안하겠습니다.] [아, 그것도 필요 없어.] [……!] [내기 따위보다 더 재밌는 것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그걸 할 필요가 없잖아? 난 요즘 충분히 즐겁단 말이지.]……잊고 있었다.
이전의 내기는 마왕의 권태로움을 바탕으로 성사되었다. 데온 하르트가 마계에 간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치르며 새로운 사건과 소식이 들어오는데, 고작 내기 따위가 그의 성에 찰 리 있나.
결국 공작은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하고 연결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현 전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데온 하르트였다.
생각하고 보면 우습지. 그의 인생이 망가진 시발점이 저와 마왕의 내기 탓이었는데, 그는 지금 마왕의 밑에서 가장 앞서 싸우고 있으니.
그렇게 비웃어 놓고도 곧장 이 방법을 떠올리지 못할 줄이야. 너무 다른 곳에 생각을 빼앗겼던 모양이다. 깊이 생각하지 못한 스스로를 질타하며 공작은 확신했다.
‘데온 하르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걸 알리기만 하면 마왕과 그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터.
옅게 웃으며 줄을 당겼다.
“사에린을 부르세요.”
***
이번에도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이대로 수도까지 길을 열어줄 생각인가. 황제가 드디어 미친 모양이군.
어쨌든 곧 해가 질 시간이니 일단 여기서 쉬어 가야 한다. 바로 출발하고 싶어도 내가 한계야. 이 이상 달리면 분명 중간에 낙마할 것이다.
“여기서 쉬어 간다.”
가볍게 명한 데온이 말에서 내렸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아파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내색 않고 걸음을 뗐다. 당연하다는 듯 옆에 따라붙은 단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둘러보실 겁니까?”
“어, 뭐.”
“당연히 영주의 저택부터 들르시겠지요?”
“그렇지.”
“따르겠습니다.”
힐긋 그를 본 데온이 다시 시선을 정면에 되돌렸다. 암묵적인 허락에 단이 씩 웃으며 데온의 속도에 맞춰 발을 옮겼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말에서 내리실 때 멈칫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전에 비해 꽤 건강해지신 것 같던데, 이걸 보면 아닌 것 같군요. 부축해드릴까요?”
“꺼져.”
내 몸에 손대면 죽인다.
거리가 멀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아직 마족들의 시야 범위 안이다. 그들 앞에서 부축받는 꼴을 보일 수는 없기에 데온이 정색하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편해진 건지. 웃음기를 머금은 단이 서둘러 그 뒤를 쫓다가 제 생각을 깨닫고 지레 흠칫했다.
‘편해졌다고…?’
……그럴 리가.
단의 얼굴이 굳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듯 데온 하르트가 눈동자만 굴려 저를 봐 온다. 무심결에 마주한 붉은 눈에서 한 가정이 떠올라 멈칫한 것도 잠시, 단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태연한 얼굴과 달리 등 뒤로 감춘 손은 지그시 주먹을 쥔 상태였다.
‘……이래서 마스터가 마족들과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거였군.’
전혀 과한 게 아니었어.
괜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모시는데, 정이 안 들 수가 없긴 하지.’
정들어 버렸다. 짧지만 낯선 문장을 입안에서 굴렸다.
적어도 그를 놀릴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해지고 편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데온 하르트가 ‘재앙’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저조차 그 이미지를 무시하고 장난칠 정도로, 그걸 또 받아줄 정도로 ‘정’은 무서운 것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가늘어진 눈매 사이에서 붉은 눈동자가 의심을 담고 빛난다. 단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
자신은 여전히 그와 적당한 감정적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 그때 비밀통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싫다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원망하고 증오한다고.
동시에 내 삶의 목표이자 이정표이며 예언의 대상이기에 좋다지만, 그것으로 인한 ‘좋음’은 ‘싫음’을 상쇄시키지 못한다. 두 가지는 서로 공존하며 애증이란 단어를 만들어냈으니, ‘정’ 또한 이처럼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겠지.
그에게 가진 감정에서 ‘싫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데온 하르트를 온전히 좋아하거나 편하게 여길 일은 없을 터.
그래도 전에 비해 친숙해진 것은 사실이므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앞으로라도 조금 거리를 두고 경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지만….
‘그러면 오히려 더 의식하는 셈이 되니까.’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모시는 대상이나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자꾸만 머리 한구석에서 특정한 가정이 존재감을 발했으나, 단은 부러 대충 넘기며 조금 느려진 걸음을 재촉해 조금 벌어진 거리를 좁혔다. 곧장 수상함을 담은 눈빛이 따라붙었으나 모른 척 무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장난감처럼 보이던 영주의 저택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쯤, 흠칫- 데온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단 역시 움찔하며 검에 손을 올렸다.
‘인기척이…!’
데온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사람이 남아있었나. 느껴지는 인기척으로 보아하니 작은 무리도 아니고 달랑 한 명이다.
……적어도 싸우러 온 건 아닌 모양이네. ‘영웅’도 아닌 것 같은데, 고작 한 명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단이 긴장했으니 됐어.’
약간의 경계만 남기고 긴장을 풀었다. 데온은 힐긋 단을 올려다보았다.
저야 살기 위해 토끼처럼 기감이 예민해졌다지만, 이 녀석은….
‘진짜 검 쓰는 놈 다 됐네.’
기감은 도대체 언제 키운 건지.
그 사이,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 하나 없이 이쪽이 목적인 듯 똑바로 걸어온 그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 경계하는 단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데온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이건….”
“받으십시오.”
익숙한 형태에 데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통신석… 아니, 통신기? 누구의 것이지?”
“받으십시오.”
“…….”
“받으십시오.”
더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겠군.
주술이나 대충 그 비슷한 종류에 홀리기라도 했나?
손을 내밀어 통신기를 받았다. 그제야 제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녀석이 인사처럼 한마디 뱉고 돌아섰다.
“구원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