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82
182. 너를 위하여(5)
그 말을 들은 순간 배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구원을 위하여’라니 참으로 노골적이고 사이비스럽기도 하지. 황제뿐만 아니라 공작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비웃음인지 황당함에 나온 헛웃음인지 모를 바람 새는 소리를 흘린 데온이 손에 들린 통신기를 보았다.
“언제까지 입 다물고 계실 겁니까?”
– …….
“연결되어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말씀하시죠, 공작님.”
통신기를 건넨 자는 멀리 사라졌고, 마족들과는 떨어져 나와 걸은 지 꽤 됐다.
단이 있긴 하지만 그는 괜찮으니까. 눈치 빠른 단이 잽싸게 없는 척 기척을 죽이는 것을 확인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통신석… 아니, 통신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지만, 제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피차 잘 알고 있을 텐데, 모른 척은 그만하시죠.”
– 하하.
날 선 데온의 태도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 혹시 다른 누군가 듣고 있을지도 몰라 쉽게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한데 반응이 너무 날카롭군요.
“우리가 웃으며 대화 나눌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 뭐, 그렇지요.
“그래서, 하실 말씀이….”
– 그 전에, 진격 속도가 터무니없이 빠르더군요. 거의 최소한의 잠만 자는 것 같던데,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십니까?
대화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빙빙 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린 데온이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정말 제가 대답할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닐 테죠.”
– ……뭐….
“구원교 신도까지 이용해가며 통신석을 전달한 것을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쉽게 말을 꺼내지 않으시는군요.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 인내심도 짧으시지. 앞으로 꺼낼 주제가 상당히 무거워서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드리려 했는데, 달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쭙잖게 배려인 척 포장하지 마시죠.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더 기다리게 하면 끊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신기에서 선명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데온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단이 조용히 눈을 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소를 머금은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했다.
– 후회할 텐데요.
“……이만 끊겠.”
– 하지만 당신의 뜻에 따라 본론을 꺼내자면, 그래.
잔인한 즐거움을 한껏 담아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통해 뇌까지 도달했다. 망치로 때려 박듯 정보가 들어왔다.
– 나와 황제를 노리는 주제에, 마왕의 옆에는 잘만 붙어 있군요.
“…….”
– 데온 하르트. 지금 당신은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데온이 짐짓 미소지었다.
“공작님께서는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 것 같습니까?
–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내게 날을 세우는 것을 보니 적어도 당신을 노리고, 크루엘을 죽인 자들의 배후가 나라는 것은 분명 알고 있겠죠. 어쩌면 그 이상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공작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배후’까지만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 이상을 알고 있다면 황제가 있는 수도를 향해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일루스터 영지부터 노렸을 테니까.
공작의 죄는 황제 따위보다 훨씬 컸다.
– 하지만 완전히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마왕군에 소속되어 앞장서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
– 진실을 위해 짧게나마 과거를 짚어드릴까요? 8년 전쟁 때, 나는 몸이 약해 저택에서만 지내던 한 귀족가의 아이를 전쟁터로 끌어낸 적이 있습니다. 흰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과연 인간인지 의심이 가는 독특한 아이였지요.
무슨 이야기인지 눈치챈 단이 조용히 눈동자를 떨었다.
철저하게 소리 죽인 경악이 데온과 통신기를 오간다. 그러나 당사자인 데온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이어지는 발언에 주목했다.
유리알처럼 반질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미동 없이 통신기를 향했다.
– 딱히 그 아이에게 악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왜’.
드디어 이 주제가 튀어나왔다. 마계에 있을 때는 결코 답을 얻지 못했던 질문. 만마(萬魔)를 통솔하는 마왕도, 그 유능한 2군단장 드벨라니아조차도 답을 들고 오지 못했던 질문이 공작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데온은 비웃었다. 동공의 흔들림은 없었다. 눈은 웃지 않은 채 입꼬리만 올라간 상태로, 태연히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 …….
“틀렸습니다, 공작님. 완전히 틀렸어요. 공작님께서 저를 얼마나 머저리로 보신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요. 저는 감히 똑똑하다 자부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 해서 어리석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이쪽에 넘어왔다. 데온은 통신기를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기세를 몰아 말했다.
“과거, 폐하의 명을 받아 구원교를 소탕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발언이었으나 공작이라면 듣는 즉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때 구원교 교단에서, 마법이 사용되었더군요.”
– …….
“나름 주술로 위장한 것 같지만 유능한 주술사가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배후는 공작님이시죠.
덧붙여진 발언에 곁에서 듣던 단이 뒤늦게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구원교 소탕에 직접 따라온 적 없는 단조차 눈치챘으니 공작은 어떻겠는가.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작이 말문을 열었다. 조금은 실망했다는 듯, 느릿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퍼져 나왔다.
– 내가 당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이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하죠.
하지만.
– 설마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실망입니다. 구원교 마법 사용의 범인은 후보를 뽑으려면 수도 없이 뽑을 수….
“물론 여기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 마족이 와서 마법을 썼을 수도 있고, 어느 누군가가 마족과 계약을 맺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문제는 그 다음, 마계로 돌아가 마왕에게 보고했을 때였다.
“제가 마계에 돌아가 마왕에게 인간계에서 마법이 발견되었다 보고했을 때, 마왕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 …….
“처음에는 의문, 그 다음은 당황이었습니다. 본인이 아닌 누군가 감히 인간계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면 분노해야 정상일 텐데, 그저 순수하게 당황하고 얼버무리더군요.”
즉, 인간계에서 사용된 마법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마왕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즉시 파악하지 못해 짧은 의문을 띠었다. 마왕이 의도하고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마왕이 직접 인간계에 넘어가 마법을 썼거나 마족을 보내 마법을 사용하도록 명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니.
남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멋대로 인간계에서 마법을 쓸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마왕이 어떠한 분노도 표하지 않을만한 자.’
마왕의 계약자.
그렇다면 그 계약자는 누구일까.
“형이 저 대신 죽어서, 그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한 조사를 부탁했던 적이 있습니다. 무려 마왕과 2군단장에게 부탁했었죠.”
– …….
공작은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치며 침묵했다.
그런 부탁을 했다면 본인을 8년 전쟁에 끌어낸 사람이 저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괜히 입 아프게 설명했어.
……시간을 끌었으니 된 거지만.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건만, 공작의 생각을 읽고 답하듯 데온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 공작님이시더군요. 그래서 복수를 위해 다시 공작님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 …….
“공작님의 약점 따위는 손쉽게 조합할 수 있을 정도로, 온갖 정보가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저조차도 정리하는 내내 질릴 정도였다면 설명이 될까요. ……한데.”
정말 희한하게도.
“공작님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도 없더군요.”
데온 하르트가 퍼즐을 잘 맞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 흔한 단서 하나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역으로 알 수 있었다.
─‘왜’라는 정보에 마왕이 연관되어 있구나. 마왕과 공작이 연관되어 있어.
“구원교의 배후인 공작님과 그곳에서 사용된 마법,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왕의 미적지근한 태도, 공작님에 대한 특정한 정보를 숨기려는 마왕까지.”
– …….
“뻔하잖습니까. 둘이 계약이라도 한 모양이죠.”
그리고 지금, 공들여 연락하여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는 공작 덕분에 확신했다.
“저는 그 계약의 제물이라도 되었나 봅니다?”
– ……정답입니다. 대단하군요.
그러고도 스스로를 어리석지 않다 표현하는 선에서 그치다니, 너무 겸손하다. 공작이 감탄을 표했다.
개중에는 시간이 한참 흘러 대수롭지 않게 잊을만한 것도 있었다. 그것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적절하게 꺼내 조합할 줄이야.
– 당신은 내기의 희생양입니다. 당시 마왕은 권태에 찌들어 쉽게 계약하지 않으려 했기에 흥미를 끌기 위해서라도 독특한 제물이 필요했죠.
잔인하고 노골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열넷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생사를 걸고 내기를 진행했다는 것까지 들은 단은 아예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했다. 이건 제가 듣고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정답을 맞혔다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기반한 것일 뿐, 세세한 내용까지는 알 턱이 없으니 분명 처음 듣는 진실이련만, 데온은 분노조차 표하지 않고 묵묵히 공작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더 말을 이어야 할지 공작이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쯤.
– 마왕은 노골적인 흥미를 보이며 내기에 참여했습니다. 내기를 진행하는 내내 즐거워했죠.
“……더 들을 것도 없군요.”
데온이 말을 끊었다.
태연한 음성에 단이 고개를 돌려 데온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명백히 웃고 있었다.
“공작님도 실패를 예감하셨겠죠.”
– …….
“진실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만큼 그다지 충격이 없고, 공작님의 목적을 알고 있기에 동요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작의 목적은 아마 분노에 찬 제가 병력을 돌려 일루스터 영지로 향하거나, 마왕에게 따지거나 덤비며 불화가 생기는 것을 바랐겠지.
하지만 이성을 챙긴 데온은 냉정했다.
“우선순위는 명백합니다. 마왕을 향한 복수는 공작님에게 복수한 이후예요. 또한 말씀드렸잖습니까. 공작님의 ‘약점 따위는 손쉽게 조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받았다고. 제가 진로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마왕이 제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세세하게 알지 못해 복수의 순서를 뒤로 미뤘다만, 지금은 그 이유가 다르다.
제 위치를 비롯한 각종 상황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데온은 공작의 말을 듣고 마왕을 명백한 복수 대상으로 낙인찍으며 한 가지 생각을 했으니까.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또한, 공작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공작 본인을 죽이는 것이 아닌 황제를 죽여야 한다. 그러니 공작의 뜻대로 일루스터 영지에 갈 일도 없을 것이다.
단호한 데온의 태도에서 이를 읽어낸 공작이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쩔 수 없군요.
만약을 대비해 두 번째 수를 준비해두길 잘했다.
마법을 상대하고, 악령을 이용하기도 하는 주술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어지간해서는 고인을 건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늦기도 했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 형의 머리를 되찾고 싶지 않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