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85
185. 너를 위하여(8)
– 지금쯤 육신이 회복되고 있을 겁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를 만나지 않았어도 일은 진행되었을 겁니다.
그럼 난 왜 너를 만난 거지? 너는 나를 살리기 위해 남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면의 세계라 감정이나 생각이 솔직하게 드러나기라도 하는지, 의문을 읽은 용사가 자연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 저는 당신의 의지를 존중합니다. 당신의 삶과 과거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히 생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앞으로 당신의 목숨이 위험하다 한들 제가 나설 일은 없겠죠. 그러니 쓸모없어진 전 이번 용사 각성을 계기로 사라지고자 합니다. 인수인계로 약간의 도움을 주면서요.
……인수인계?
– 본래 몸이 약한 체질이시더군요. 그 긴 시간 동안 세계가 힘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개조했음에도 아직 약간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대로면 힘은 온전히 받을 수 있어도 그 과정이 상당히 괴롭겠죠.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아파야 할 텐데, 아무런 느낌도 없다. 내면세계라 그런가?
– 아마 깨어나시면 몸이 산 채로 부서지는 기분이실 겁니다. 용사가 되었으니 쇼크로 죽을 일은 없을 테지만….
쇼크사까지 나왔으니 더 들을 것도 없다. 그 인수인계라는 거,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눈치챘을 텐데, 용사는 크게 웃는 대신 한결같은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이 친절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본래 용사 간의 인수인계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용사의 힘은 대상을 정하고 넘길 수 없으니까.
그러나 정말 우연히도 이번에 용사가 힘을 넘기고자 시도한 대상과 세계가 선택한 대상이 겹쳤다. 게다가 이미 용사의 힘이 한 차례 그를 통과하며 작은 흔적을 남긴 덕분에 본인이 개입하기 쉬워졌다고.
– 지금을 마지막으로 전 사라질 테지만, 그래도 당신의 생을 위한 말 몇 마디는 남기고 싶습니다. 한때 당신을 살리고 싶어 했던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해도 되겠죠.
용사가 한 걸음 다가섰다. 내게 손을 뻗고, 희미한 빛을 불어넣는다.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많은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럴 리가.
– 여기, 죽어서도 당신이 살길 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어요.
뻗은 손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쇄골 위, 목과의 경계를 스쳤다. 마왕이 자주 건드렸던 자리이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낙인이 있는 곳이다.
–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당신이 바라는 삶을 살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사 본인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그야 그건 용사니까 가능한 것이다. 당장 현실만 봐도 내가 죽길 바라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덕분에 재차 깨닫는다. 용사는 이타적이다. 적어도 내 눈앞의 용사는 그랬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쳐 희생하는, 용사의 정석 같은 사람. 고작 마왕성까지 함께 온 마지막 동료라고 죽어서도 날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 사람.
그런 사람의 뒤를 이어 내가 용사가 된다니. 나 따위가 감히 그처럼 살 수 있을까.
이러한 마음조차 읽은 듯, 용사가 쓰게 웃었다.
– 저 같은 용사가 되고자 하지 마세요. 말했잖습니까. ‘얽매이지 않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전 제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길 바랍니다.
아, 이름.
– ……카시우스.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장례식 때,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나름 적지 않은 시간 함께 했음에도 난생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지. 처음엔 그 이름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깨닫지 못해 잠시 멍하니 있었다.
지나가듯 언급된 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왕이 살아있는 한 용사는 또 등장할 테고, 세상은 새로운 용사에 환호하며 이전 용사는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그래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시신을 수습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했다. 물론 이렇게 부르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놀란 듯 용사가, 아니 카시우스가 눈을 크게 뜬다.
그것도 잠시, 그가 녹아내리듯 사르르 미소지었다.
– 네, 그랬죠. 제 이름은 카시우스였죠. 어느 마을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습니다.
– …….
– 설마 기억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빛을 전부 불어넣은 듯 그가 손을 거두며 물러선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말하듯 온화한 미소가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 제가 보탠 짧은 말은 당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겠죠.
……안타깝지만 당연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강한 충격이나 오랜 과거에 기반한 누군가의 마음가짐은 고작 타인의 말 몇 마디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니까.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 거였으면 이 세상은 지금의 모습이 아닌 범죄도 개성도 없는 지루하고 단순한 획일화된 모습이었겠지.
– 불쌍한 사람.
헛소리.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카시우스의 몸이 흐려졌다.
그래도 마지막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그가 말했다.
– 아, 제일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군요. 당신이 악몽에서 쫓겨난 날, 저는 누군가에게 말의 전달을 부탁받았습니다.
얼핏, 부드러운 미소가 시야에 비쳤다.
– 흑발 녹안의 사내가 안부를 전해달라더군요.
– ……!
방금 뭐라고…!
빛이 터져 나왔다.
***
폭탄을 찬 빈민이 달라붙고, 폭발이 일었다.
직격으로 맞았다는 사실에 단이 얼어붙은 순간, 데온 하르트에게서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경악할만한데, 하늘에서 빛기둥이 그를 중심으로 내리꽂혔다. 대륙 전체를 밝힐 정도로 강한 빛이었으나 희한하게도 시력의 손상은 없었다.
경이롭고 신성하게 느껴지는 온화한 빛. 그 속에서 회복되어가는 너덜너덜한 데온 하르트.
상황 판단은 빨랐다.
‘용사 각성!’
예고도 없이 충격적인 사건이 연달아 휘몰아쳐 정신이 없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마왕군의 선두에 선 사람을 용사로 선택하다니, 완전히 미쳤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보단 폭탄을 차고 덤벼드는 놈들부터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분명 기척 하나 없던 저택 내부에서 갑작스럽게 빈민들이 등장하다니.
‘……공작이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야.’
이곳에 오기 전에 공작이 마왕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어설픈 빈민의 기척을 깔끔하게 숨길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여간 종교에 미친 새끼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 종교를 만든 공작도 제정신이 아니고.
단은 정면에서 달려드는 녀석의 목을 베며 가슴팍을 걷어차 다른 놈에게 보내고 급히 데온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펑! 하고 누군가의 생명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아직도 연결되어 있을지 모를 통신기부터 낚아채 창밖에 던져버리고, 그의 근처에 널브러진 시신을 거칠게 집어치웠다. 폭탄을 직접 차고 있던 시신답게 몰골이 끔찍했으나 단은 시선도 주지 않고 데온을 살폈다. 순조롭게 회복되어가는 상처 외에도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낙인이….’
너덜너덜해진 옷깃 사이로 선명히 보이던 시커먼 낙인이 사라지고 있다.
제국에서는 마왕의 저주라 알려졌던, 마왕이 직접 새겼다는 바로 그 낙인이.
***
하늘과 땅을 잇는 빛기둥이 등장한 순간, 마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그에게 들어온 정보는 하나가 아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드디어 숙적인 용사가 탄생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데온 하르트에게 새겨 두었던 위치 추적 낙인이 지워졌다.’
나름 공들여 새긴 것이다. 그가 ‘영웅’이 된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터인데.
하지만 용사라면 다르다. 용사의 육체는 마왕의 마법에 나름의 면역이 있으니까. 살상용 마법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이니, 육체에 새겨두는 자잘한 마법 따위는 흔적도 남기지 못할 터.
공교롭게도 용사가 탄생하는 순간에 데온 하르트에게 새겨 두었던 마법이 지워졌다? 이건 안 봐도 뻔하다.
‘데온 하르트가 용사가 되었구나.’
조용히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역안이 샐쭉 휘어지고, 이어서 큭큭거리는 억눌린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아, 어쩜.”
이리도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지.
내가 복덩이를 주웠구나. 그렇지 않아도 그를 만나고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미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더한 것을 터트려주다니!
얼굴 가득 자리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손을 뻗어 통신석을 잡았다.
“마계 전역에 알린다.”
기쁜 건 기쁜 거고, 할 건 해야지.
용사가 탄생했으니 이제 필요 없는 명령을 철회할 차례다.
“지금부터 마법 금지령을 해제한다.”
영원할 것 같던 명령이 거두어졌다. 마족들도 곧 알게 되겠지. 눈치 빠른 자들은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저들의 0군단장이 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기뻐하리라. 무려 마왕과 용사가 한 편이 된 것이니까. 전력이 대폭 늘었다며 이제 자신들의 세상인 줄 알고 좋아하겠지.
‘과연 그럴까.’
……뭐, 기쁘긴 나도 매한가지니까.
그냥 이 행복을 즐기게 두자. 마왕은 싱글벙글 웃으며 통신석을 내려놓았다.
***
주치의 벤은 마왕성을 탈주하여 데온 하르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유는 간단했다. 각혈 신호를 받았으니까. 그 밖에도 몸을 아끼지 않는 듯, 이따금 신체 곳곳에서 이상 신호가 전달되곤 했으니 주치의로서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냥 이번 기회에 죄다 치료해버릴 생각으로 무작정 마왕성을 벗어나 인간계에 진입했다. 빠르게 이동되는 위치를 쫓아 열심히 움직이는데…….
‘무슨 속도가 이렇게 빨라…!?’
도통 거리가 좁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자꾸만 멀어진다!
인간계의 성문은 무슨 짚으로 만들어졌나? 그냥 건들면 열리게?
전투에 시간이 지체되어야 정상이건만,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공성전에 발목이 묶일 테니 금방 따라잡겠지, 하고 움직인 것이 무색하게도 데온 님이 이끄는 병력은 한곳에 오래 머무는 일 없이 부지런히 전진하고 있었다.
‘역시 데온 님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기뻐해야 해, 말아야 해?’
이대로면 따라잡는 것은 요원하다.
파라스령에서 잠시 쉬며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고민하는데, 어느 순간 데온 님의 이동 경로가 바뀌었다.
완벽하게 왔던 경로를 되짚어 돌아가는 움직임! 벤은 환호했다.
‘만날 수 있다!’
왜 갑자기 되돌아 오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호가 약해져서 자잘한 상처는 다쳐도 알 수 없으니 만나면 꼼꼼히 확인해 봐야지. 특히 허벅지에 화상이 늘진 않았는지 꼭 살펴볼 것이다.
그렇게 벤은 데온 하르트가 돌아오고 있는 방향으로 마중을 나갔고.
“데온 님, 데온 님! 잠시…! 저 벤입니…!”
두두두두두!!
흙먼지가 일었다. 벤은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리를 허망히 쳐다봤다.
‘무시당했다….’
내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신 듯했다. 정말 완벽하게 무시당했어.
‘하지만 나는 포기를 모르는 주치의지.’
담당 환자의 건강을 위해서라면야, 얼마든지 더 움직일 수 있다.
마력석 목걸이를 들어 데온 님의 위치를 확인했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지만….
‘그래도 전보다 거리가 벌어지지는 않았네.’
이 정도면 할만하다. 벤은 다시 여정을 떠났고, 용케 일루스터 영지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거대한 빛기둥. 간당간당한 주제에 심각하게 울리더니 기어이 끊겨버린 신호.
벤은 멍하니 신호가 끊긴 마력석 목걸이와 빛기둥을 번갈아 보았다.
저 빛기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아마 인간계와 마계를 통틀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용사의 탄생….’
그렇다면 신호가 끊긴 이유는….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데온 님이… 용사가 되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