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86
186. 너를 위하여(9)
그렇다면 그동안 신호가 점점 약해지던 것도 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을 테지.
일단 데온 님을 만나봐야 한다. 벤은 서둘러 열린 성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력석 목걸이는 효력을 다한 지 오래였으나, 거대한 빛기둥만 보고 달리면 됐기에 방향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빛기둥은 어느 저택 안에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뛰어 들어갈 것 같던 기세와 달리, 벤은 잠시 멈춰 서서 눈을 비볐다. 정문 앞에서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야, 저거.’
간이 붓기라도 한 건지.
폭탄을 찬 인간들이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족 병사들에게 덤벼든다. 몸을 아끼지 않는 공격에 마족들은 난색을 표하며 저마다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 간은 몰라도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넋을 놓은 것도 잠시,
‘데온 님이 우선이다.’
벤은 다시 정신 차리고 왕진 가방을 꾹 쥔 채 저 혼란의 틈바구니로 뛰어들었다.
“전부 다 비켜어어어!!”
막으면 때린다!
그의 가방이 휘둘러질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족과 인간들이 저 멀리 날아갔다.
…….
‘……저택에 들어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한숨을 내쉬며 왕진 가방을 휘둘렀다. 목이 꺾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인간 하나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저택 곳곳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척 보기에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곳을 향해 몰리고 있었다.
그뿐이랴, 무언가 펑펑 터지는 소리와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은 또 어찌나 불길한지. 날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어느 한 방문 앞에 몰린 인파를 확인한 벤은 앞뒤 잴 것도 없이 가방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불꽃놀이는 밖에서 해라, 이 무례하고 상식 없는 인간 놈들아!”
“……벤?”
간신히 폭발이 미치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검을 휘두르던 단이 벙찐 것은 당연했다.
상황 정리는 순식간이었다.
제아무리 마족이라 해도 고작 한 명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이리도 빨리 정리되다니.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던 단이 느릿느릿 검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틀어 벤을 보았다.
언제 미쳐 날뛰었냐는 듯 그는 빛기둥에 다가가 데온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미 한 번 폭발에 휩쓸리셨구만. 아주 너덜너덜해지셨어. 거의 다 회복된 상태라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
생각보다 반응이 얌전한데?
지금까지 제가 봐온 벤이라면 좀 더….
“네놈은 데온 님 안 지키고 뭐 했나?!”
역시나.
단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벤이 멱살을 쥐고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었다. 제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도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
‘나 하나만 믿고 들어오신 것이니, 확실히 지켰어야 했는데.’
이건 신뢰의 문제다.
데온 하르트의 신뢰는 물론이고, 저를 향한 마왕군의 시선까지 달린 문제.
‘그나마 살아서 다행이야.’
만약 여기서 그가 죽었다면 자신 또한 죽었겠지. 마족들의 입장에서 보증인이자 주인인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한 인간을 굳이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데온 하르트가 괜히 저를 믿고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
무심코 벤의 어깨너머에 시선을 둔 단이 잠시 멈칫했다.
찬란하던 빛기둥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내 그 가운데에서 데온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여전히 벤이 뭐라 외치며 분노하고 있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빛기둥은 분명 사라졌는데….’
왜 아직도 데온 하르트의 주위만 환하지?
상대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모를 벤이 아니다. 얼빠진 단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한껏 으르렁거리며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네놈, 내 말 안 듣고 뭐… 데온 님!”
눈앞에 있던 마족이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눈으로도 좇기 힘들만큼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단은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벤은 데온 하르트가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상자를 품에 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데온에게 손을 뻗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이 상자는 뭐지…?”
“아, 그건…….”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크루엘 하르트의 머리라고 말하면 이 주치의는 즉시 상황을 눈치챌 것이다. 데온 하르트가 사적인 일에 휘둘려 병력을 돌렸다는 것부터 결국 함정에 당했다는 것까지, 전부.
결코 데온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터.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벤이 어깨를 으쓱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치료를 위해 잠시 빼두는 게….”
콱.
벤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상자를 향해 뻗어진 손목이 잡혔다.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악력에 움찔한 것도 잠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안 돼.”
조금 잠긴 듯 낮은 목소리였으나 그곳에 담긴 살기는 선명했다.
이 순간이 너무 꿈만 같아서 혹시 착각이 아닐까 멍하니 있는데, 데온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간다.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듯 그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담고 벤을 향했다.
눈을 마주한 벤은 물론이고, 조금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본 단조차 얼어붙었다.
‘……눈을 뜨니까 진짜 장난 아닌데.’
감고 있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눈을 뜨니까 확 실감이 난다.
‘이전에도 잘생긴 축에 속하긴 했는데… 이건 그냥…….’
취향을 초월한 미모잖아.
본판의 얼굴이 남아있긴 하지만, 외모의 격이 다르다. 용사가 되면 원래 외형도 잘생겨지던가? 곰곰이 용사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제가 알기로 용사의 힘은 재능 덩어리다. 재능의 폭은 아주 넓어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니….
‘……재능 맞네.’
미모도 저 정도면 재능이지.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경악했다가 혼자 납득하는 단을 두고 데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벤이 부축하려 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앉아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
힘이 넘친다.
건강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시야는 뚜렷하고, 호흡은 편하다. 언제나 일정 이상의 힘을 주어 움직여야 했던 몸은 생각만으로도 부드럽고 가볍게 움직였다.
심지어 숙적인 마왕의 존재까지 느껴지고 있으니.
‘정말 용사가 되었구나.’
이건 부정할 수도 없겠군.
그렇다면 그때 그 공간에서의 대화는 의미 없는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상자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쩌적, 하고 금 가는 소리가 들려 급히 힘을 빼야 했지만, 그것이 용사가 되었다는 실감을 더 일깨워줘서.
[흑발 녹안의 사내가 안부를 전해달라더군요.]……크루엘.
고개를 푹 숙였다. 벤이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냐며 난리 쳤으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품에 안은 상자를 한 차례 내려다보고,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여기, 죽어서도 당신이 살길 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어요.]용사의 말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크루엘 하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당신이 바라는 삶을 살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사람들’이라 했는데.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
그리고…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물속 저 깊은 곳에 잠긴 듯 숨이 턱 막힌다.
죽어서도 나를 생각하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 같아서는 그의 말대로 착실히 따르며 희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안 돼.’
내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논하기 이전에, 당신들의 말을 따를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없겠다. 거대한 운명이 나를 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선명히 느껴지고 있거늘, 한낱 인간이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단의 말대로 엿은 먹일 수 있겠지.’
그 ‘결심’을 하자마자 용사로 각성하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데온은 무너지듯 비웃었다.
이로써 세계가 내게 바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결심’대로 움직인다면 난 놈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되겠지. 이것은 내 의지인 동시에 내 의지가 아닐지니.
‘과유불급이라 했지.’
세계가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면, 그래.
그 이상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일단은 복수가 우선이지만.’
품에 안은 상자의 감촉이 서늘하다. 데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민들이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도 습격한 듯 저택 밖이 소란스럽다. 그럴싸한 무력 하나 갖추지 못한 이들이지만, 목숨을 내던지는 공격인 만큼 쉽진 않겠지. 멍하니 저를 보는 벤과 단에게 나가자는 고갯짓을 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뗐다.
속내를 철저히 숨긴 정갈한 걸음이 복도를 밟았다.
***
빈민들의 습격은 거의 다 정리된 상태였다. 여기에는 데온 님이 나오시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마족들의 생존본능이 담겨 있었다.
총지휘관이 된 데온 님은 실수 하나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철저한 분위기를 두르고 계셨으니까. 큰 잘못이 아닌 한 이렇다 할 벌은 내리지 않았으나 싸늘한 눈초리와 고상하게 짓밟는 말투는 마족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달라지신 것 같다. 용사가 되었기 때문인가?
마족들은 멍하니 시신의 등 위에 발을 얹은 데온을 보았다.
빛기둥이 용사의 탄생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안다. 빛기둥이 있는 곳이 바로 데온 님과 단이 들어간 저택이라는 것도 알고, 때문에 데온 님이 용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예상 범위에 넣어두고 있었다.
다만,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는데.
“내게 이딴 녀석이 덤벼드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못하고.”
시신을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기어이 용사의 힘을 이기지 못한 척추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는 이들을 새빨간 눈동자가 집요하게 훑는다. 무심한 듯 짜증을 담은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이 무능한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족들로서는 억울했다.
아무도 반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다들 반응했으나, 그들의 움직임이 닿기도 전에 데온 하르트가 먼저 상대를 죽인 것이었다.
거의 다 정리되었다지만 완전히 정리된 것이 아닌 상황. 그 상황에서 저택 밖에 나온 데온 하르트라는 유명한 인물을 남은 빈민들이 그냥 둘 리 없다. 당연하게도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던 빈민이 달려들었다.
놀랍도록 투명한 움직임에 단과 벤을 비롯한 여타 마족들이 반응하려 할 때, 데온이 먼저 움직였다.
[이따위 허접한 놈이 덤벼들 정도로,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제게 달려드는 상대의 얼굴을 잡고 바닥에 처박은 뒤 몸을 뒤집어 배에 장착한 폭탄이 아래에 깔리도록 만들기까지,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났다고 하면 과연 믿겠는가.
한편, 데온은 제 왼손을 신기하다는 듯 힐긋 쳐다봤다.
분명 폭탄을 찬 녀석을 엎을 때, 배 밑에 왼손을 넣었었다. 폭발로 인해 놈의 몸이 들썩이고, 왼손은 팔꿈치까지 피투성이가 되었지. 그럼에도 지금은….
‘다 나았다.’
진득한 피는 사라지지 않아 썩 보기 좋지는 않지만, 상처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용사의 회복력이 이 정도였다니. 감탄한 것도 잠시, 데온은 의식적으로 설핏 올라간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지금 뭐하지? 빨리 남은 거 정리 안 하고.”
“예… 예!”
이제 행동거지에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데온은 말을 놓았다.
스티그마가 이것저것 가르쳐줄 때, 항상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있다. 꽤 성실한 후배였던 나는 그것마저도 머리 한구석에 새겨두었지.
[이 모든 것은 네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상관없는 것들이란다.]용사의 적수는 마왕밖에 없다. 마왕 또한 그러하고.
마족만으로는 용사를 죽이기 어려운 데다, 기습을 당한다 해도 이 정도의 회복력이면 충분히 반격하고 살아남는 것이 가능할 터. 괜히 날 세우고 빡빡하게 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얽매이지 않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더는 그렇게 지내고 싶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