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89
189. So long to the regret(1)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요정왕과 거래했다. 저울을 재 봤을 때, 거래를 어겨서 얻는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다. 당장을 위해 더 좋은 패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마법 사용은 역시 안 되겠지? 가능하다면 진작 말했을 테니.”
“예, 마법 억제 진도 있는 모양입니다.”
젠장. 거의 다 와서 이게 무슨 봉변이야.
혈압이 오르기라도 한 건지, 옆에서 벤이 진정하시라며 손부채질을 해준다. 이제 혈압 오른 걸로 피 토하거나 쓰러지진 않을 텐데.
“…….”
“……?”
뚱하니 벤이 해주는 걸 받아주던 데온이 눈동자만 굴려 힐긋 위를 본다. 벤이 시선을 좇아 무심코 고개를 드는 순간, 그가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주먹으로 쳤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가며 그 위에 있던 누군가 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인식을 왜곡하는 장치도 있는 모양이라 숨어있는 곳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들고 있던 활을 내팽개치고 급히 단검을 뽑아 드는 녀석의 손목을 콱 밟은 데온이 친절하게 날붙이를 빼가며 웃었다.
“인식 왜곡은 너희에게도 적용되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활이 있는데 굳이 가까이에 올 필요가 없을 테니. 기습이라도 가하려 했던 모양인데, 참 안타까워.”
빼앗긴 단검이 데온의 손가락을 타고 유려하게 돌아간다. 장난치듯 가벼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실컷 놀았으니 그만하고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으련?”
“지랄. 영원히 이곳에서 헤매다 죽어버리지 그래?”
“흐음.”
뿌득.
“아악!”
“정말 안 알려줄 건가?”
“하…하하! 너라면 알려줄 것 같냐?”
“아쉽네. 좋게 좋게 가면 서로 편하고 좋을 텐데.”
좀 더 편하게 심문하기 위해 후드를 벗었다. 더 이상 쓰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간 습관이 되었기에 쓰고 다녔던 것인데….
“미친….”
“음?”
좀 더 미리 벗을 걸 그랬나 보다.
이유 모를 욕설에 힐긋 시선을 내리자 홀린 듯 저를 보고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놈이 곧장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익숙한 눈빛이었기에 대충 넘길 리 없었다.
그러니까… 어디서 봤더라…….
‘아, 리리넬.’
……이거, 생각보다 더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겠는데?
씩 웃은 데온이 녀석의 앞에 앉아 턱을 잡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동공을 쉼 없이 흔든다. 선명한 동요에 사르르 눈가를 접었다.
“우리, 대화 좀 해볼까?”
“……!”
결과적으로.
훌륭한 안내인 덕분에 마왕군은 무사히 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용사의 탄생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마왕군이 코앞까지 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전에 용사가 이곳까지 오지도 못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명줄이길래.’
분명 통신기 너머로 폭발음을 들었는데도, 데온 하르트가 멀쩡히 살아서 이곳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한다.
이쯤에서 공작은 인정했다. 그놈은 바퀴벌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만, 설마 정말 살아서 올 줄이야.’
30분 뒤면 에스페라네스에 요청한 용병이 도착한다. 수도에 위치한 공작가 소유의 별장에서, 공작은 차분히 나갈 채비를 했다. 한쪽에서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던 사에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어디… 가세요?”
“갈 곳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보다 정말 대피하지 않아도 괜찮은지요.”
“공작님께서 아직 이곳에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혼자 가겠어요. 그보다, 가지 않으시면 안 되나요? 감이 좋지 않습니다.”
겉옷을 걸치던 공작이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갑자기 답지 않게 구는군요.”
“죄송해요. 하지만….”
“사에린.”
사에린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뚜벅뚜벅, 공작의 발소리가 울린다. 점차 가까워지던 소리는 그녀의 앞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멈췄다.
평소라면 진작에 죄송하다며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감이 좋지 않아.’
불안하다. 너무 불안해서 심장이 마구 뛰고 있다.
그렇기에 사에린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고개를 들고 공작을 응시했다. 저를 똑바로 마주해오는 여인을 향해 공작은 압박을 가하는 대신 달큰하게 눈을 휘어 보였다.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
“하지만 이만 나가봐야 하니 여기서 놓아주었으면 하는군요.”
언제 잡아 올린 건지, 사에린은 멍하니 받쳐 올려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손등 위에 작은 온기가 내려앉는다.
쪽.
작은 마찰음과 함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눈웃음과 함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녀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철저히 이용한 움직임.
예상치 못한 행동에 얼어붙은 틈을 타 저를 두고 미련 없이 문을 나서는 공작의 뒷모습을 보던 사에린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찌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내 님은… 본인조차 감정에 목줄이 매여 끌려가면서도.”
그가 황궁에 간다는 것을 안다. 생각한 것보다 더 황제를 아낀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엄연한 애정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그래서 더 서러웠다.
“타인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시는구나.”
사에린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
수도에 도착한 데온은 곧장 황궁에 쳐들어가는 대신 이곳까지 몇 날 며칠 달려오느라 갈아입지 못한 옷부터 갈아입기로 했다. 옷도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데다 너덜너덜해진 탓에 찝찝해서 더 입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를 만나러 가는데, 초라한 몰골로 가고 싶지도 않고.
단과 에드 대신 보좌의 역할을 맡은 벤이 근처 그럴싸한 옷가게에 들어가 옷을 뒤적이며 물었다.
“어떤 옷을 입으시겠습니까?”
“글쎄. 기왕이면 익숙한 제복 형태가 좋겠는데.”
“제복 형태라면… 이건 어떠십니까?”
“검은색이네.”
“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그것도 검은색이고.”
그렇게까지 티 내려 하지 않아도 내가 마왕군이라는 건 온 세상이 다 알 텐데.
쉽사리 긍정의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벤이 무언가 떠오른 듯 흠칫했다.
“흰색 제복은 안 됩니다.”
“……그래.”
그냥 내가 고르는 게 낫겠다.
제복이 주르륵 걸린 옷걸이에 다가갔다. 어차피 사람 없는 가게라 그냥 집어가면 되기에, 가격은 생각 않고 보이는 대로 살폈다.
짧은 고민 끝에 고른 것은 붉은 제복이었다. 언젠가 황제에게 하사받았던 제복을 떠올리게 하는 색감과 디자인.
“괜찮군요.”
벤 나름의 기준에도 통과한 모양이다.
어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가는데, 그가 뒤통수에 대고 강조하듯 덧붙였다.
“셔츠와 바지까지만 입으시고 겉옷은 들고나오십시오. 꼭입니다!”
의문을 가진 듯한 마족 병사가 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옷매무새를 다듬으려면 그쪽이 편합니다.”
“…….”
데온은 말없이 웃옷을 벗었다.
***
황궁 정문이 보이고 나서야 데온은 실감했다. 정말 여기까지 왔구나.
그러나 감상에 젖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정문 앞을 홀로 막아서고 있는 한 기사를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기사도 데온 하르트의 외모를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한순간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가 데온을 불렀다.
“주군.”
“……리엔 경.”
신음하듯 상대의 이름을 뱉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주군을 모시는 기사로서, 주군이 엇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왔습니다. 제발 여기에서 멈춰주시길,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아.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두고 온 것이었는데.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정말… 정말이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이고 싶지 않아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말도 없이 간 것이었다. 아마 미친개들도 같은 이유에서 그렇게 행동했겠지.
그냥 적당히 포기하고 손 놓은 채 흘러가는 대로 살면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굳이 이렇게 찾아오다니.
“모두 적당히 물러가 있어.”
마족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벤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데온은 다시 리엔에게 눈을 돌렸다.
“리엔 경.”
“네, 주군.”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직도 나를 주군이라 부르다니.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착잡한 감정이 녹아 하나의 언어가 되어 새어 나왔다.
“경은…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습니까? 로프티 녀석들은요?”
상관도, 휘하의 기사단원들도 모두 일언반구 없이 마계로 떠나버렸다. 그로 인해 발생한 모든 문제는 오롯이 그녀가 감당해야 했겠지. 단순한 상황에 대한 책임만은 아니었으리라.
원한과 증오 등의 감정조차도 그녀를 향해 쏟아졌을 테니, 단순한 고생을 넘어 필시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원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터인데.
“기사는 주군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
“지금이라도 돌아와 주신다면, 저는 앞으로도 주군을 원망하지 않을 테지요.”
강건한 눈빛이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질척하고 음습하며 피비린내 가득한, 이쪽의 더러운 밑바닥을 되레 비쳐 보이게 할 정도로 맑은 눈빛에 불편함을 느낀 데온이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잠깐의 정적은 속삭이듯 흘러나온 나직한 목소리가 깨뜨렸다.
“……용사가 되었습니다.”
“……!”
“경은 나를 절대 못 이겨요. 이대로 나를 막아선다면 분명 죽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이 문을 넘어서면 폐하의 목숨을 노리실 거잖습니까.”
리엔 라이너가 슬픔을 억누르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검을 뽑았다.
“제가 기사의 맹세를 할 때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저 리엔 라이너는 데온 하르트를 주군으로 인정하고 모실 것이며, 그와 그의 명령이 황제 폐하의 뜻에 반하지 않는 한, 평생을 목숨 걸고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기사는 주군에게 검을 겨눠서는 안 됩니다. 주군의 목숨이 노려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죠. 그러니 0군단장, 당신을….”
“…….”
“이 한 목숨 바쳐 막겠습니다.”
나를 0군단장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녀가 언급한 주군은 황제일 테지.
……그녀의 맹세를 기억한다. 인상적인 상황에서의 인상적인 맹세였다. 그래서일까, 당시 내가 했던 대답도 기억하고 있다.
[그대의 충성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먼저 맹세를 어긴 쪽은 내 쪽이다.
그러니 내게는 뭐라 말을 더할 자격이 없다. 이 이상 리엔 라이너를 회유하려 드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독이므로, 단검을 뽑았다.
금방이라도 나설 듯 수런거리는 마족들을 향해 차갑게 명했다. 끼어들지 마라.
“리엔 경, 그거 압니까?”
답은 없지만 경청하고 있다는 듯 곧장 시선이 날아온다. 데온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경의 올곧은 기사도를 사랑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원망스럽군요.”
한때는 동경하고 존경했던 것도 같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시작은 놀라움과 걱정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피곤하지 않을까. 저러다 부러지면 어쩌려고 저러나.
그럼에도 한결같은 모습이 멋있어서, 그 미련한 기사도를 끝내 사랑하고 말았더랬다.
“조금만 유연하게 굴지. 조금만 부드럽게 굴어주지. 그저 눈 감으면 되는 것을, 남들은 당연하다는 듯 하는 그 행동 하나를 하지 못해서.”
“…….”
“……됐습니다. 내가 뭐라 하든 이제 와 경의 태도가 바뀌진 않을 테니.”
정직한 자세를 잡은 기사를 향해 데온이 단검을 까닥였다.
“오지 않고 뭐합니까? 어서 덤비세요.”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리엔을 보며 데온은 괜히 씁쓸한 입안을 혀로 쓸었다.
그래,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경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상대할 테니까.
영웅도 아닌 한낱 기사가 용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단검과 장검이 얽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