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90
190. So long to the regret(2)
반전은 없었다.
검이 맞부딪힌 순간 마족들은 알 수 있었다.
‘저건 데온 님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
홀로 정문을 막아선 용기는 칭찬할 만하지만 그게 전부다. 지루하고 뻔한 결과가 눈에 보여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간 기사에게 흥미를 잃었다.
‘……분명 첫 합은 가벼운 탐색전이었을 텐데.’
리엔은 크게 튕겨져 나간 제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다가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순식간에 자세를 재정비한 그녀의 검이 날카롭게 심장을 찌르고 들어온다. 아직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해 빈틈이 드러난 상태였음에도 데온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쳐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단검을 휘둘렀다.
분명 데온 하르트가 압도적인 상황이건만, 누가 보면 상황이 정반대인 줄 알 정도로 둘의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젠장.’
용사라는 것이 이렇게 기분 더러운 것이었나. 데온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한 사람이 오랜 시간 공들여 온 노력을 짓밟는 기분이다. 특히 리엔 라이너에게는 이 검이 그녀의 평생이나 다름없을 텐데.
단 한 합 만에 깨닫고 말았다. 쉬워도 너무 쉽다.
‘이건 불공평해.’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불공평하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이 거지 같은 상황과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최선을 다해도, 다하지 않아도 그녀를 모독하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된 기분이다. 운명은 이렇게 또 그에게 엿을 먹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검에 잡념이 섞였다는 것을 눈치챈 리엔이 사납게 물었다. 데온은 대답 대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소강상태가 찾아온 것도 잠시.
“아무것도.”
전보다 더 매서운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더한 모욕이겠지. 그러니 망설일 필요는 없다.
‘이 상황에서 배려하겠답시고 적당히 하는 건 자기만족일 뿐이니까.’
어설픈 배려가 그녀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데온은 전력을 다해 쇄도했다.
…….
상황은 순식간에 끝났다.
올곧던 기사가 기어이 부러졌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여기서 더 이상 후회 거리를 남기지 말아주십시오.] […….] [이미 충분하시잖습니까.]마지막까지 그녀다웠던 말과 후회 한 점 없던 눈빛이 기억에 남아서, 데온은 부러 시신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마족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대기.”
“예?”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하지만 이곳은 수도이고, 황궁입니다. 한 영지의 저택과는 다른….”
“다르지 않지.”
데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었다는 것도 같고, 혹여 매복해 있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지금의 날 죽이진 못할 테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
“여기서 기다려.”
“……예.”
***
황제란 무엇인가.
8년 전쟁이 끝나고, 갓 ‘황제’란 칭호를 쟁취해냈을 때 고민했었다.
군주의 덕목 같은 것은 보통 왕자일 적에 배워 다른 이라면 그것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뒷배 없는 9왕자였던 에도아르도는 예비 군주로서 배워야 할 것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에 이 주제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다.
황제란 단순히 군림하는 존재인가? 아니다.
제국민들의 어버이? 아니. 그런 고지식한 말을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황제란….
황관을 쓰고 텅 빈 알현실의 화려한 옥좌에 홀로 앉은 에도아르도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기듯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한쪽에서 가만히 시립하고 있던 네메세우스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폐하, 데온 하르트가 정문에서 리엔 라이너와 대치 중이라고 합니다.”
“…….”
“그녀가 번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문밖에서 근위대가 대기하고 있….”
“……네메세우스.”
근처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저를 보고 있는 황태자와 황녀를 힐긋 본 에도아르도가 그에게 접힌 종이를 넘겼다.
“폐하, 이것은…?”
“황궁의 비밀통로가 그려진 지도다.”
“예? 어찌하여 이것을…!”
“황태자와 황녀를 데리고 피신하도록.”
“숙부님!!”
반발은 황태자와 황녀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에도아르도가 단호히 말문을 틀어막았다.
“이 정도면 너희들의 고집은 충분히 받아주었다고 생각한다만.”
“고집이 아닙니다!”
“고집이지.”
가장 중요한 후계자들이 여기서 버티고 있는데.
가볍게 일갈하고 네메세우스를 돌아봤다.
조급한 상황과 달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나른하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조곤조곤 흘러나왔다.
“데온 하르트가 0군단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모든 이들이 지긋지긋하게 묻는 질문이 있었지. 그대도 직접 묻지만 않았을 뿐, 줄곧 궁금했으리라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눈치챘다. 제국의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 타국의 사람들까지 궁금증을 표한 의문이었으니까.
[황제는 데온 하르트가 0군단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아마 예상했겠지만, 그래. 알고 있었다. 거의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
네메세우스의 동공이 커졌다. 한쪽에서 황태자가 급히 그를 부르려 했으나, 에도아르도는 그의 말을 끊듯 곧장 말을 이었다.
“황제 자격 박탈감이지. 하나 황태자와 황녀는 이 사실을 모른다.”
“…….”
아니, 알고 있다. 인수인계를 언제적에 끝냈는데 몰랐겠는가.
그러나 황태자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명령이다.”
제왕학을 배우지 않았기에 에도아르도는 ‘황제’에 대한 것은 직접 겪어가며 깨우쳤다. 그렇기에 이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과거의 제국은 이곳에 남을 테니.”
자신은…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단 한 순간도 황제였던 적이 없었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황제의 이미지에 저를 꾸역꾸역 끼워 맞추면 뭐하나. 언제나 중요한 결정은 ‘황제’로서가 아닌 ‘에도아르도’로서 판단했는데.
하지만 제 조카들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형님을 닮아 영특한 아이들을 돌아보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느리게 뒷말을 뱉었다.
“그대는 현재의 제국과 미래의 제국을 지키도록.”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다.
슬플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고, 에도아르도에게는 그것이 바로 지금일 뿐이니.
환각은 한계에 이르렀고, 마왕군은 코앞까지 당도했다. 심지어 이 상황의 원흉 또한 에도아르도 본인이니, 추하게 도망쳐 목숨을 연명하는 대신 이쯤에서 사라져주는 것이 옳겠지.
괜히 버티고 버티다 진정 미쳐 타인의 손에 끌려 내려오거나 황제로서 저 마왕군의 손에 죽기라도 하면 뒷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두 후계의 정신적 충격을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
명백한 황위 인도 발언에 두 황족이 굳었다.
네메세우스가 입술을 지그시 짓씹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글쎄. 대피할 시간은 충분히 벌 자신이 있다만,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어서.”
돌아오지 마라.
나직한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황태자와 황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잠시, 장군! 정말 폐하를 두고 가려는 겁니까?”
“……명령이니 따라야 합니다.”
“숙부님!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이셨습니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쉴 새 없이 높아져만 가던 그들의 목소리는 선명한 노크 소리가 끊었다.
똑똑.
“한 시가 부족한 상황이라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잘 왔네, 경들! 폐하를 설득해보게. 글쎄, 이곳에 남으시겠다고 하시지 않나!”
“예? 그게 무슨…?! 폐하!”
근위대의 시선마저 이쪽에 쏠렸다. 그렇게 소란 떨지 않아도 골이 울리는데. 에도아르도는 잠시 미간을 짚었다. 손끝에 뜨뜻한 열기가 느껴졌다.
“실망이군. 경들이라면 짐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래 폐하께서는 가장 먼저 피신하셔야 할….”
“틀렸다.”
시선을 들었다. 모든 황족이 이곳에 남아있는데 먼저 갈 수는 없다며 같이 가기 위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재상 아르달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이들의 대화를 들었을 텐데,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듯 놀라움 하나 없이 차분한 눈동자에 에도아르도가 나직이 웃었다.
그래, 그는 그럴 줄 알았다.
“짐은 가장 마지막까지 이 자리에 남아야 하는 자다.”
“……?”
“경들이 짐에게 하던 인사를 잊었더냐.”
공통된 인사말을 하고, 이름을 대며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의문 가득한 이들의 눈초리에 결국 인내심이 닳은 에도아르도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경들의 눈엔 짐이 스스로 내뱉은 말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얼간이로 보였더냐!”
황제가 된 이후 지정한 인사말에서도, 입버릇처럼 하던 말에서도, 에도아르도는 언제나 황제가 곧 제국이라 말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권력에 취해 내뱉은 발언인 줄 알았던가.
“우습구나! 짐은 분명 짐이 곧 제국이라 하였다. 제국이 도망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던가!”
“……!”
“제국은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쳐서도 안 된다. 백성을 버린 나라를 과연 그들이 따를 것 같은가!”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를 황태자를 위해서라도 황제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
수도의 제국민들을 대피시켰다 하지만 그 주변 마왕군의 경로가 아닌 영지민은 대피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족들만 가장 안전한 요새로 홀랑 도망친다? 그 누구도 황가의 핏줄을 믿지 않으리라.
민심은 황권의 받침대이니, 그렇게 되면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은 황태자가 즉위한다 해도 필시 전처럼 강한 황권을 구사하지 못하겠지.
“짐은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무능한 군주로 역사에 남을 생각 역시 없다. 망해버린 나라의 최후의 황제로 기억되거나 아예 잊혀져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기에 짐은 이 자리에 남겠노라 말하는 것이다! 한데, 뭐?”
어째서 도망치지 않냐고?
금안이 맹수의 것처럼 번뜩인다. 형형한 눈빛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급격히 찾아온 정적 속에서, 에도아르도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주먹에 이마를 기댔다.
……열이 올라 지나치게 흥분하고 말았다.
“……이해했으면 이제 가도록.”
시간도 없고, 이쯤이면 다들 납득했을 테니 어서 보내는 편이 좋겠다.
상황을 지켜보던 재상이 성큼성큼 들어와 두 황족을 모신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흔들린 상황에서 대담한 재상을 이길 턱이 없는 황태자와 황녀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밖으로 나가고, 네메세우스를 비롯한 근위대가 그들을 호위하듯 뒤따랐다.
마지막에 스치듯 재상과 황제의 눈이 마주쳤으나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
혼자 남은 에도아르도는 황관을 벗어 자리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가장 먼저 도망칠 수도 있었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제물 삼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금만 이기적으로 군다면 1초라도 더 오래 살 방법은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누구도 황가의 핏줄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은 제국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의 목숨과 제국의 안녕. 저울추는 뻔한 곳으로 기울었다.
그러므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 냉정하게 계산하여 내린 판단이다. 어차피 버릴 이 목숨 하나로 제국의 근간을 지킬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니까. 이것이 그의 이기심이다.
습관처럼 되뇌던 말을 떠올렸다.
‘짐이 곧 제국이다.’
……아니.
“내가 곧, 제국이다.”
제국이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제국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황제 에도아르도는 황실 족보 기록의 가장 윗줄에 기록되어 오래오래 살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