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91
191. So long to the regret(3)
황좌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놓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손에 든 검집은 바닥에 던져놓고 검을 든 채 그대로 성큼 계단을 밟는다.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찰랑이는 핏물이 발목 높이에 맞춰 수위를 낮췄다.
언제부턴가, 환각의 종류가 바뀌었다. 죽어라 괴롭히던 망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은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핏물. 찰랑이는 감각도, 피비린내도 선명하다. 발밑에 고여 찰박이던 핏물은 어느덧 발목까지 차오르고도 모자라다는 듯 계속해서 수위가 오르고 있으니, 필시 그 끝은 거기에 잠겨 죽는 것이겠지.
꼴사납게 환각 따위에 질 생각은 없다.
언제나 그랬듯 흔들림 없이 똑바로 걸어가며, 그는 항상 등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던졌다.
펄럭-
황금 실이 수놓아진 붉은 망토가 하늘로 솟구쳤다.
***
1왕자가 죽으러 가던 날, 그는 제게 엘피디우스와 알레테아를 부탁했다. 불길함을 느꼈으나 차마 말리지 못했지. 그것이 그리도 큰 죄책감이 되어 가슴 한구석에 박혔더랬다.
그렇게 지독한 삶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단순한 책임감과 복수심에서 출발하여 군주의 자리에 앉은 사내는 얼마 못 가 진실로 인한 또 다른 죄책감을 떠안아야 했고, 이를 해소하고자 전쟁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끝내 죽지 못한 채 기어코 황제의 칭호를 쟁취했다.
죽기에는 책임질 것들이 너무 많아진 상황.
금방이라도 짓눌려 죽을 것만 같은 무게감을 느끼면서도, 에도아르도는 그것을 티 낼 수 없었다. 본인이 선택하고 초래한 결과니까.
‘환각이 보이기 시작하며 언젠간 들킬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가장 최악의 경우만큼 많은 이들에게 들킨 것이 아니라 다행이다.
핏물이 가득 차오른 것으로 보이는 것도 모자라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복도를 걸으며 에도아르도는 생각에 잠겼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낀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8년 전쟁 때였다. 책임을 핑계로 스스로를 망치고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한 전쟁.
죽지도 못할 만큼 많은 책임 거리를 떠안게 된 바로 그 전쟁에서, 에도아르도는 모순되게도 자신이 숨 쉬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우습게도 지금 이 상황이 반가웠다.
“오랜만이군.”
나른한 인사가 건네졌다. 그를 마주한 데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나 걸치고 있던 망토는 어디에 갖다 버린 건지, 망토는커녕 격식을 갖춘 옷도 다 벗어 던지고 간편한 흰 셔츠 한 겹만 입은 황제가 검 한 자루를 든 채 눈앞에 서 있다.
걷어붙인 소매를 물끄러미 보다가 뒤늦게 답을 내뱉었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못 본 새 많이 바뀌었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용사라도 된 모양이지.”
“…….”
외모의 격이 달라졌는데 모를 수가 있나. 에도아르도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대로 모든 용사들의 미는 인간의 기준을 초월한 것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역대 용사 중 누군가는 미인계를 이용하여 마족들을 꾀어내 마왕성에 잠입했다는 이야기도 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구전일 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잠시 눈을 내리깐 채 침묵하던 데온 하르트가 시선을 들었다. 적안과 금안이 허공에서 얽히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제가 진실을 깨닫고 이성을 잃은 상태로 폐하를 찾아갔을 때, 왜 그런 답을 내놓으셨습니까?”
이성을 되찾은 이후 가졌던 의문이다.
황제라면 당시의 제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뿐이랴, 이 대화가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겠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데온 하르트의 행보가 걸렸다. 데온 하르트가 완전히 마계에 돌아설 확률이 높은 상황이었던 만큼 황제는 과감히 그의 정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황제가 어디 보통 인간이던가. 정신이 아슬아슬한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말 몇 마디로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황제는 데온 하르트의 증오를 본인에게 집중시켰다. 결코 무너지지 못할 목표가 되어주고,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그를 순순히 보내주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추스르고 이성을 되찾은 데온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물었건만.
“현 상황에서 그건 중요하지 않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겠군. 데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빤히 보던 에도아르도가 질문을 툭 뱉었다.
“옷은 일부러 그렇게 입고 온 것인가?”
“아.”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간다. 사냥대회 때 입었던 황제가 하사한 옷과 비슷한 붉은 제복을 만지작거리며 데온이 흘리듯 답했다.
“……일부는.”
“그런가. 잘 어울리는군. 피가 튀어도 지저분해 보이진 않겠어.”
“…….”
잡담은 여기서 끝이라는 듯,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도아르도가 검을 고쳐 쥐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선택한 일인데 무엇하러.”
숨통을 조이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에도아르도는 퍽 마음에 드는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아무리 용사라 한들, 용사로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아직 그 힘을 온전히 다루진 못할 테지. 검을 다루는 실력 역시 크게 발전하진 못했을 테고.”
“…….”
“신체 능력이 좋아지면 뭐하나.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데.”
재능을 가진 것과 재능이 개화한 것은 다르다. 그러니까.
알려진 ‘영웅’들 중에서도 가장 검을 잘 쓰기로 유명하며, 어쩌면 인류를 통틀어 가장 검을 잘 쓸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사내가 말했다.
“오거라. 내 친히 그대에게 검을 알려줄 테니.”
“……!”
카앙! 섬뜩하고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데온 하르트가 달려들었다. 그에 맞서 휘둘러진 에도아르도의 검이 강한 힘에 튕기듯 밀려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힘에 멈칫한 것도 잠시, 그는 힐긋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저릿한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맞서는 것이 아니라 흘려야겠군.’
흘려낸다니. 머리로는 알고 있고 연습도 몇 번 했다지만, 역시 좀 생소한 개념이다. 이전까지는 제가 압도하면 압도했지, 흘려내야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까.
힘뿐일까. 간신히 타이밍을 맞춰 막긴 했다만, 속도도 장난이 아니다.
‘용사가 맞긴 한 모양이야.’
문득, 정문에서 그를 막아섰다던 리엔 라이너가 떠올랐다.
‘영웅’임에도 이렇게 현저한 차이가 느껴지는데, ‘영웅’도 아니었던 리엔 라이너는 그를 상대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영영 답을 들을 수 없게 된 의문을 떠올린 것도 잠시, 에도아르도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발목을 잡듯 찰랑거리는 핏물을 걷어차듯 밀어내며 걸음을 내디딘다. 강한 의지를 담고 검이 휘둘러졌다.
…….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용사란 모든 것이 인간의 규격을 넘어선 재능 덩어리 그 자체. 영웅은 그것의 파편 일부를 간신히 소지한, 그저 일반인에 비해 재능이 조금 뛰어난 존재. 힘도, 속도도, 체력도, 심지어는 수명과 외모조차도. 용사는 그 찌꺼기인 영웅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에도아르도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환각은 그의 정신을 잠식하는 것을 넘어 파편의 영향으로 튼튼했던 몸 상태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는 결국 스트레스로 인한 고열을 얻었다.
그래, 고열.
어느 누가 감히 황제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을까. 덕분에 에도아르도는 환각은 결국 들켰을지라도 고열에 시달린다는 사실만큼은 감출 수 있었다.
열로 인해 시야가 뚜렷하지 못할 텐데, 그럼에도 용사가 된 데온 하르트를 단순히 상대하는 것을 넘어 가르침까지 준 것은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군.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야.] [그대는 용사다. 육체가 약했던 이전처럼 굳이 힘을 주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단 말이지. 그대는 본인이 가진 힘을 자각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이것보다 좀 더 힘을 빼고 세밀하게, 관절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모양이지만, 지금 그대의 힘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상대의 목을 자를 수 있다.] [변칙적인 것은 좋다만, 그것이 그대가 이후에 취해야 할 움직임을 방해한다면 옳지 못한 공격이라는 뜻이다. 다른 공격 방법과 자세를 찾아보도록.]생사가 오가는 전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순수한 가르침이었다.
재능 덩어리답게 데온 하르트는 빠르게 가르침을 흡수했고, 즉각 몸으로 실현하며 재능을 꽃피웠다.
어느새 체력이 떨어져 거칠어진 호흡을 뱉던 에도아르도가 그럼에도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작은 탄성을 뱉었다.
“여전히 비효율적이라 뭔가 싶었더니만….”
“…….”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군. 검을 휘두를 때는 단순히 팔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다리와 허리도 이용해야 한다.”
얼핏 보기엔 잘만 이용하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지금의 데온 하르트는 다리와 허리를 100%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반동을 이용하는 편이 좋겠지.”
“…….”
수정은 즉시 이루어졌다.
데온은 전보다 더 유연하고 세밀하게 강한 힘을 내는 스스로를 돌아보고는 에도아르도를 보았다. 적안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일그러졌다.
“어째서 이런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글쎄…. 죽기 전의 변덕이라 해두지.”
“……폐하의 눈에는 제 기술이 처참할 정도로 미숙해 보이시겠죠. 가르침에 대한 보답으로, 제가 가진 허접한 기술 중 가장 유용한 것을 하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다만. 에도아르도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보여준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다. 대답 대신 한 걸음 내디뎌 중심을 단단히 잡으며 검을 똑바로 들었다. 완벽한 준비 자세에 데온이 씩 웃었다.
손에 들린 단검이 빙글 돌아가고, 엄지가 펴졌다 접히며 손잡이를 쓴다. 자세가 낮아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데온 하르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채앵-!!
“……!”
놓친 검이 뒤편으로 날아가 어딘가에 나뒹군다. 에도아르도는 제 목을 겨눈 단검을 힐긋 보고는 그 주인을 쳐다봤다.
“……대단하군.”
미미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손바닥이 찢어진 모양이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조금 전 일을 다시 떠올렸다.
한순간이었지만 분명 그는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속도를 초월했다. 단순히 ‘용사’여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제가 가진 허접한 기술 중 가장 유용한 것’이라 말했다. 용사가 되기 전부터 사용해왔다는 뜻이므로, 이런저런 가정을 떠올리던 머리는 이내 빠르게 답을 도출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강한 상대를 죽이나 싶었더니만.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강제로 끌어낸 것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 대단하긴 하다만, 한 번 사용하면 몸이 망가져 뒷일을 도모할 수 없을 텐데. 그걸 지금 챙겨줄 이 없는 이곳에서 사용하면….”
“…….”
“아, 그렇지. 그댄 이제 용사가 되었군.”
이미 완벽하게 회복되어 멀쩡히 서 있는 데온을 확인하고 나직이 웃었다.
“내가 졌다.”
완벽한 패배다. 후련한 듯 가벼운 웃음이 그의 얼굴에 떠 올랐다.
가만히 그를 보던 데온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물어보려는 건가 싶었더니.
“……이 내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후회할 것 같더냐.”
“……글쎄요.”
끝까지 황제다운 오만하고 고고한 대답이었으나,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은 여전하다. 한결같은 금안에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데온이 짧은 침묵 끝에 나직이 말을 늘어놓았다.
“삶이 후회 그 자체라 자각하지 못하신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