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93
193. So long to the regret(5)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넌 도망칠 수도 있었어. 권력이 가장 소중했다면 이렇게 올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먼저 도망쳤어야지.”
“……쓸데없는 주제에 매달리는군요. 어떻게든 황제와 연관시켜 정신을 흔들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나도 한마디 하죠.”
그거 압니까?
뱀이 속삭이듯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렸다.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하며 공작이 싱긋 눈을 휘었다.
“8년 전쟁 때 당신이 죽었다면 나도, 황제도, 당신의 가문과 크루엘까지 모두 행복했을 겁니다. 당신만 아니었으면 인간계가 마계에 짓밟힐 일도, 그로 인해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 나갈 일도 없었겠죠.”
“그것도 역공격이라고….”
피식, 명백한 비웃음이 들렸다.
공작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살짝 키운 순간, 삽시간에 달려든 데온이 그의 목을 잡아 바닥에 내리누르며 언제 빼 들었는지 모를 단검으로 어깨를 찍었다.
“큭!”
“미안하지만 누구 덕분에 내 정신은 더 부서질 것도 없어서.”
전혀 안 통해.
장난치듯 단검을 비틀었다. 아래에서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그냥 죽일까. 가만히 그를 보며 고민하던 데온이 나직이 물었다.
“이것만 묻자. 왜 그랬어? 반드시 마왕과 계약해야 할 이유라도 있었나?”
“크, 흐흐흐….”
고통 어린 신음 속에 비웃음이 섞여들었다.
잔뜩 짓씹어 엉망이 된 입술로 한껏 웃으며 그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왜, 특별한 이유나 절절한 사연이라도 기대했습니까? 정말 있다면 어쩌려고요. 이 상황까지 흘러온 이상 죽이지 않을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신 기분만 찝찝해질 뿐이지요.”
“……정말 있다고?”
“아뇨. 없습니다.”
“…….”
표정 한번 걸작이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웃음이 터졌다. 평생치 웃음을 여기서 터트리는 기분이다. 아니, 오늘 죽게 될 테니 기분만이라고는 할 수 없겠군.
“마왕과의 계약은 그저 더 강한 권력을 위한 혹시 모를 패,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한 발판 정도였지요.”
계약하고 보니 별로 쓸만한 곳도 없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하지 말 걸 그랬다.
까득. 뻔뻔한 공작의 태도에 기어이 이를 간 데온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네가 후회했으면 좋겠어.”
“저런.”
“아주 처절하고도 뼈에 사무치게, 후회하고 후회하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듣는 이보다 말하는 이가 더 괴로운, 피가 배어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진득한 피눈물을 머금은 피해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가해자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후회하지 않는 겁니다.”
나의 후회는 너의 웃음이 될 테니.
사람은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황제가 궁에 홀로 남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공작은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공작 본인뿐. 데온 하르트의 복수 대상은 공작과 황제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데온 하르트를 필두로 한 마왕군의 최우선 공격 대상은 제국이 되겠지. 새 수도에 자리 잡고 시작할 황태자와 황녀의 새 제국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지만 순순히 죽어주고 싶진 않으니까.
‘어디 한번 평생을 찝찝함 속에서 살아보시지요.’
후회 없이 죽는 저를 보며, 패배감에 절어서, 남은 생을 쭉 그렇게.
번개같이 새 단검을 뽑은 데온 하르트가 손등을 꿰뚫는다. 아찔한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입가의 웃음기는 여전했다.
“하아, 하, 하하! 그리고 후회는 도미노와 같아서 한 번 후회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단 말이지요. 인생 전체를 후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손등을 꿰뚫은 단검을 천천히 흔들던 데온이 공작의 눈을 보았다. 살기를 담고 번들거리는 적안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건 네가 인생을 개떡같이 산 거겠지.”
“…….”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 대화를 끝을 매듭지으려는 듯 그가 화제를 바꿔 운을 뗐다.
“공작저에서 어떻게 살아 나왔나 했더니, 용사가 되었군요.”
혼자서만 빛을 밝혀놓은 듯한 미모를 보이고 있는데, 눈치를 못 챌 수가 없다.
평소였다면 그 외모에 홀렸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공작에게 있어 데온 하르트는 바퀴벌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여간 지긋지긋한 명줄 같으니라고.’
이쯤 되면 데온 하르트의 명줄은 굵은 밧줄 열댓 개 엮은 것보다 더 질기고 튼튼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과연 저걸 끊을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기나 하련지.
“용사가 되었으니 마법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겠지요.”
“왜, 마법이라도 써서 날 죽이려고?”
“아니요. 마법은 만능이 아니더군요. 게다가 이런 마력으로는 그럴싸한 공격조차 제대로 못 할 테지요.”
“그렇다면?”
그동안 괜히 마력을 아껴온 것이 아니다.
마왕군이 진격해 올 때조차 공작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해봤자 마왕의 손짓 하나면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어쩌면 마왕까지 가기도 전에 다른 마족의 손에 의해 파훼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력을 사용한 것은 구원교에 비밀 공간을 만들기 위해, 크루엘 하르트의 머리 보관을 위해, 그리고 공작저에 숨겨둔 빈민의 기척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것이 전부.
위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력을 소모했다지만 아직 쓸만한 양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저주를 걸 겁니다.”
“……저주?”
그건 주술의 영역이 아니었던가.
마법과는 조금 거리가 먼 단어의 등장에 데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마왕에게서 받은 모든 마력을 사용하여 당신에게 저주를 거노니.”
기묘한 빛을 띤 자안이 적안을 똑바로 응시한다. 이윽고, 입술이 느리게 달싹이며 섬뜩한 음성을 냈다.
“[결코 편한 죽음은 맞이하지 못하리라.]”
“…….”
“뭐, 원래는 더한 것을 걸고 싶었는데, 가진 마력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네요.”
이제 얼마든지 죽이라는 듯 공작이 산뜻하게 웃는다. 데온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보았다.
저주 때문이 아니다. 편치 못한 죽음? 오히려 환영이지.
다만, 이 새끼는 도대체 왜 이렇게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가 싶어서.
“……그거 알아?”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전쟁터에 끌려간 날, 나는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있었어.”
“…….”
“그리고 내 형 크루엘은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죽었지.”
“…….”
“넌 정말 지독한 새끼야.”
공작이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푹!
붉은 제복에 또 다른 붉은 염료가 덧대졌다.
***
제국의 첫 번째 영웅이자 황제의 첫 검이었던 장군 네메세우스는 황태자와 황녀를 안전한 곳까지 모시기 무섭게 다리가 부서져라 달려 무너진 궁으로 돌아왔다.
황제가 살아있길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 그저 시신만이라도 온전하길 바랐는데.
‘온전하긴 하다만….’
시신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바닥을 훑던 눈을 들었다. 넓어진 시야에 들어온 것은 황제의 시신과 공작의 시신,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피에 물든 데온 하르트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공작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네메세우스의 존재를 인지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다. 섬뜩한 적안을 마주한 것도 잠시, 네메세우스는 시선을 돌려 황제를 보았다. 절로 한탄이 나왔다.
“……폐하.”
복잡한 감정이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가슴 속에서 요동친다. 그 속에는 명백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9왕자 에도아르도가 왕위를 쟁취하기 전에 가장 먼저 영입한 사람이 바로 네메세우스였다. 돈을 벌기 위해 검투장의 검투사로 활동하던 평민 출신의 사내를 끌어들이고자 얼마 없는 돈까지 죄다 후원에 쏟아부었더랬지.
다시 말해 그들의 관계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함께 한 시간은 그 이상으로 무겁다는 뜻이다. 그만큼 시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름이 뭐지?] [네메세우스? 거창하지만 속뜻은 없는 이름이군.] [비꼬는 것이 아니다. 이름 자체에 담긴 뜻은 없지만 부모의 마음은 알 것 같으니. 자식이 크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을 조합하여 그럴싸하게 만들었겠지.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으므로, 그대.] [이름에 담긴 부모의 소망처럼 크게 될 생각은 없나?]“……그러게 제가 저놈은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조차 외면해버린 놈의 정신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다고. 그런 놈은 정신이 무너질 경우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고.
씁쓸하게 중얼거린 네메세우스가 황제의 시신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도 이렇게 검을 쥐었으리라. 죽을지언정 자존심을 버릴 리는 없으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 반역자와 검을 맞댔으리라.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두 분 전하를 모시길 바라셨겠지만… 직접적으로 명하신 것도 아니고.’
이 정도 고집은 부려도 되겠지요.
데온 하르트가 용사가 되었다는 것은 보자마자 눈치챘다. 제국의 미래가, 아니 인간계의 미래가 어둡다며 속으로 걱정한 것과 별개로, 네메세우스는 마음을 굳혔다. 애초에 흔들리지도 않았다.
피가 묻어있는 손잡이를 쥐고 데온 하르트를 향해 검날을 겨누었다.
“이전에도 인간 같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이젠 아예 괴물이 되어버렸구나.”
고개를 갸웃한 데온이 걸음을 내디딘다. 그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전에 없던 기품이 서려 있어 네메세우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도망치지 않는 겁니까.”
“……황제가 끝이 아니지 않은가.”
황제는 시작일 뿐이다. 아마 그는 앞으로 제 검에 더 많은 피를 묻히겠지. 이를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자신은 제국의 장군이고, 힘을 가졌으며, 무고한 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와라. 여기가 바로 내 무덤이니.”
네놈의 무덤 또한 이곳이다.
‘……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들 자꾸 그러는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데온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한숨 섞인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흘러나왔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지.”
“…….”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니지만.”
정갈한 걸음걸이가 일정한 보폭을 가지고 소리 없이 땅을 밟는다. 그대로 네메세우스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며, 데온은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해 죽여드리겠습니다.”
“최근 들은 소식 중 가장 반가운 소리군.”
***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아니지, 정정한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거물들을 죽였다.
새삼스럽게 사람을 찔렀을 때의 감촉이 손에 남아 데온은 괜히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씨발 왜 다들 하나 같이 후회 없이 죽어서.’
사람 기분을 이리도 찝찝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제각각 빛나던 눈동자들을 떠올리다가 결국 더러운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근처 아무 잔해에 걸터앉아 불을 붙이는데, 이 장소가 무슨 개미지옥이라도 되는지 또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 정말.”
정문의 마족들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지들끼리 닭싸움이라도 하고 있나?
막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또 누구이려나. 부디 적당히 물러나 줬으면 좋겠는데. 몸은 지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불퉁하고 지겨운 기색을 얼굴 위에 숨김없이 드러내며 뒤를 돈 순간, 데온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왕군이 수도까지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다길래 서둘러 왔다만, 역시 이미 늦은 모양이구나.”
“…….”
“왜 말이 없니? 모처럼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스티그마 선배님.”
“그래, 후배님.”
또 오랜만에 보는구나.
제국의 두 번째 영웅,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