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96
196. 떠나간 사람을 위하여(2)
[……레멤베르, 말씀이십니까?] [그래, 공작이 준 쪽지에 ‘레멤베르’라고 적혀 있더군.]정확히는 공작의 도장과 레멤베르의 이름 및 서명이 적혀 있었다.
엘피디우스가 내민 쪽지를 훑은 아르달이 고개를 숙였다. 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직접 데려온 인재 중 하나인 그는 황제를 따라 죽은 네메세우스와 달리 ‘현재의 제국’을 모시는 것을 택했다. 애초에 그는 황제가 아니라 제국을 모셨으니까.
그러니 눈앞 ‘현재의 제국’에게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답한다.
[명을 따르겠습니다.]엘피디우스가 제국에 해가 되는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재상 아르달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명의 신하로서 흔들림 없이 그를 따를 것이다.
***
데온 하르트가 마계에 귀환했다.
다른 것도 아닌 무려 황제를 죽였다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격한 환영 인사는 없었다. 치켜세워져야 할 장본인이 붉은 눈동자를 살벌하게 빛내며 시끄러운 것은 싫다고 말해두었으니까.
입구에서 일반 마족 병사들을 해산시킨 뒤, 조용히 저를 힐긋거리는 시선들을 지나쳐 내성까지 도착한 데온은 0군단마저 해산을 명한 후, 건물 안에 들어갔다.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벤이 방향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죄송하지만, 마왕님이 계신 곳은 그곳이 아닙니다.”
“마왕님이라니? 난 내 방으로 가려는 건데?”
“예? 보고도 없이… 말씀이십니까?”
“응, 피곤해서.”
마왕도 보지 않고 바로 쉬겠다는 뜻이다.
그러다 자칫 마왕님의 분노라도 사면 어떡하시려고. 안절부절못하는 벤을 두고 태연히 걸어가던 데온이 복도 중간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역광이라 얼굴에 그림자가 진 상태였으나, 용사가 되며 눈까지 좋아진 그에게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듯 복도 중간을 당당히 가로막고 서 있을 마족은 몇 안 되니 원래의 몸 상태였더라도 금방 파악했겠지만.
“……에드.”
“네, 데….”
익숙한 부름에 무심코 데온의 얼굴을 본 에드가 멈칫했다.
“…온 님.”
“또 마중을 나온 모양이네. 그럴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부관으로서 당연한… 행동입니다. 한데….”
그가 삐걱삐걱 다가오더니 손을 뻗는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듯 금세 화드득 놀라 다시 거뒀지만. 어딘지 모르게 넋이 나간 목소리가 더듬더듬 물었다.
“설마… 용사가 되신 겁니까?”
“뭐, 그렇지.”
“그렇군요…. 용사의 탄생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데온 님이실 줄은….”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데온의 눈에 의문이 떠오를 무렵, 유능한 부관답게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에드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고도 들었는데, 좋은 일만 연달아 터지는군요.”
“좋은 일이라….”
마족들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피식 웃은 데온이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뗐다. 그가 가는 방향을 확인한 에드가 뒤늦은 의문을 표했다.
“방에 가시는 겁니까?”
“그래.”
“방금 도착하셨다고 들었는데… 그새 마왕님을 만나셨습니까? 빠르십….”
“안 만났는데.”
그놈의 마왕.
그렇지 않아도 잠을 못 잔 데다, 이번에 죽인 이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알고 있던 자들이라 평소보다 더 많은 정신력을 소모한 탓에 신경이 날카로운데, 왜들 이리 들들 볶는 건지.
절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에드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예?”
“안 만났다고. 피곤해서 우선 좀 쉴 거야.”
“아…….”
또다시 달라진 말투는 새삼스러울 것 없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에드가 신경 쓴 부분은 다름 아닌 내용.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용사 각성에 가장 큰 적인 황제까지 죽였는데 마왕님의 얼굴도 보지 않고 바로 쉬겠다니, 정말 이래도 된단 말인가. 전쟁 중이 아니었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상황은 정보 하나하나가 귀하고 전달 속도가 중요한 전쟁 중인데다, 데온 하르트는 그저 피곤할 뿐 부상 없이 멀쩡하다.
“……하.”
에드의 얼굴에서 망설임을 읽은 데온이 짜증 섞인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에드가 ‘데온 님?’하고 불렀으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걷고 걸어 방문 앞에 도착해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니, 객이 아니라 일꾼이라고 해야겠군.
창가 화병의 물을 갈아주고 있던 듯, 양손에 화병과 아직도 생생한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던 단이 데온을 보고 빠르게 마무리 지은 뒤 그에게 다가간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태연히 그를 불렀다.
“마스터.”
“내가 시킨 일은… 잘한 모양이네.”
꿀릴 것 없어 보이는 태도에서 눈치채긴 했지만, 직접 보니 또 느낌이 다르다.
붉은 눈동자가 책상 위에 놓인 나무 상자에 고정되었다. 그의 시선을 좇은 단이 새삼스러운 말을 다 한다는 듯 웃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
대답은 없었다. 아마 들리지도 않겠지.
철저히 감정을 감춘 표정이지만 어쩐지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단은 나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푹 쉬세요.”
단이 눈치껏 물러가고, 달칵 문이 닫혔다.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한 공간에 홀로 남고 나서야 데온이 붙박여 있던 걸음을 뗐다. 망설임 가득한 느린 걸음이 나무 상자에 조금씩 다가갔다.
뚜껑에 손을 얹고 나직이 심호흡했다.
‘확인해야 해.’
정말 손상 하나 없이 옮겨졌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하지만 형의 머리를 다시 볼 자신이 없어서…. 그저 손만 얹은 채 몇 번이고 망설이던 데온은 이내 입술을 꾹 깨물며 뚜껑을 열었다.
부패하지 않아 선명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아프게 찌른다. 순간 흔들렸던 것도 잠시, 침착함을 되찾은 붉은 눈동자가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일단 이 각도에서 보이는 부분은… 괜찮아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직접 들고 살필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맡길 수도 없고.
상자 안에 손을 뻗다가 거두길 반복하다 결국 포기하고 뚜껑을 덮었다.
한순간, 지독하리만치 담담한 얼굴 위로 무언가 스쳤다. 그것은 분명 끝없이 떨어지는 절망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형.”
이건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다.
잠을 못 자서, 한 번에 많은 일들을 겪어서, 그럼에도 쉬지 못해서.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제정신이 아니어서.
“나 숨 막혀.”
제겐 결코 허락되지 않은 투정이 입밖에 터져나왔다.
느리게 손을 들어 올려 목에 대고 움켜쥐듯 주욱 긁었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처럼 다섯 개의 붉은 선이 나타났다가 이내 뛰어난 회복력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개중 피가 맺혔던 부분도 있었으나 데온은 눈치채지 못했다.
한발 늦게 따라붙은 화끈한 고통 덕분에 정신을 차렸으니까.
“……하.”
미쳤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소연이라니, 이보다 뻔뻔하고 우스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되기 전에 약을 해야 했는데. 오는 내내 붙어 있던 벤 때문에 손도 대지 못했더니 결국 이렇게 된 모양이다. 서둘러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편의상 담배라 부르고 있지만 결국은 마약이다. 효과는 빨랐다.
“이제 좀 낫네.”
한 몸처럼 붙어 죽어라 숨통을 조이던 감정이 약효에 의해 둥실둥실 사라진다. 덕분에 침착함을 되찾았다.
약효가 느껴지기 무섭게 담배를 허벅지에 지져 끈 데온이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비척비척 걸어가 소파에 기대앉는다. 두 손은 나무 상자를 꼭 안고 고개는 뒤로 젖힌 상태로, 눈을 감고….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잠을 맞이했다.
***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품은 무언가로부터 나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듯 강한 의지를 담고 단단하게 굳어 있으나, 정작 팔은 잘게 떨린다. 이를 느낀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하든 결국 난 저 정체 모를 위험에 노출되겠구나.
그도 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리 필사적으로 나를 품에 가두고 웅크리고 있으니.
“누구…?”
절로 의문이 입 밖에 나왔다.
내가 알기로 나를 이렇게까지 아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넌 누구인지.
“…….”
“조금, 답답한데….”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왜 이러고 있는지조차 이해되지 않는 데다 답답하기까지 해 몸을 비틀었다. 상대가 놓아주지 않은 탓에 벗어나진 못하고 간신히 고개만 빼 그의 어깨에 턱을 얹자 아까보다는 숨통이 트여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슬쩍 고개를 틀어 얼굴을 보려 했다가 그가 내 뒤통수를 꾹 누른 탓에 강제로 그의 어깨 너머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지만.
덕분에 볼 수 있었다.
“……뭐야, 저거.”
사방에서 시커먼 액체가 몰려온다.
의지를 가진 듯 꾸물거리면서, 간간이 무언가 형체를 이루려는 듯 일어서기도 하고 저들끼리 뭉쳐 해일의 형태를 이루기도 하며. 그것들은 명백히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항거할 수 없는 재해로 보인다. 지금 날 안고 있는 이 자는 정말 저것으로부터 날 지키려고 든 건가? 지키기 위해 손을 뻗기도 전에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심지어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정말 이 자가 누군지 궁금해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
“응?”
“──.”
“뭐라고?”
“─무슨 죄가 있다고…….”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닌 허공을 겨냥한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이 어리고 약한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어리다고? 약해?
황당함이란 감정이 치솟기도 전에, 직감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다른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충격,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공포.
‘설마.’
그의 정체를 알 것 같다.
무의식 중에 입을 열었으나 돌덩이로 막아놓은 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나오던 말이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확신을 얻기 위해서라도 말해야 한다. 목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그를 불러야 해.
“……형?”
“…….”
상대가 멈칫하고.
하얀빛이 터져나왔다.
***
“헉!”
데온이 몸을 크게 떨며 눈을 떴다. 분명 앉은 상태로 잠들었건만 도대체 언제 누운 건지, 소파에 옆으로 누워 웅크린 자세였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고요한 방 안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데온은 품 안에 느껴지는 나무 상자의 존재를 깨닫고 나서야 이것이 현실임을 실감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건.
“……꿈이구나.”
분명 예전에 악몽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적어도 이 방에선 악몽을 꾸지 않았는데.
잠시 숨을 고르다가 상자를 소파에 내려놓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찰박, 하고 이전과 다른 기분 나쁜 감각이 느껴져 시선을 내렸다.
“이건 무슨… 피?”
아무리 봐도 피 같다. 이 방에 피가 고일 일이 있나? 반사적으로 옆에 놓인 나무 상자를 보았으나 피가 샌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보다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숙여 발밑에 고인 피를 짚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더 선명해지며 손끝에 질척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러나 허리를 펴고 확인한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에 닦은 적이 없는데도.
‘……아.’
뭔지 알 것 같다.
정확하게 내 발밑에만 고여있는 피. 분명 만졌으나 피가 묻은 흔적조차 없는 말끔한 손.
손끝을 비비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고 한 걸음 옮겼다. 분명 피가 고여있지 않은 곳에 발을 디뎠는데, 그곳에 웅덩이가 생겨나며 또다시 질척한 감각이 느껴진다.
“환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