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
2. 마왕의 가장 강력한 패(2)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하필이면 각혈을 해도 여기서! 젠장!
피로 어질러진 서류가 보인다. 더해서 손으로 내 피를 받고 있는 마왕이… 세상에.
‘더러운 생이었다.’
속으로 짧은 유언을 남기며 급히 입을 막고 책상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래 봤자 이미 더럽혀진 서류요, 피로 물들어버린 마왕의 손이다. 역시나 화가 난 건지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을 찌르는 살기에 절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나는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서류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주치의! 제0군단장의 주치의를 불러와라!! 지금 환자가 아픈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아아아아!!”
……응?
예상 밖의 상황에 머리가 굳어버렸다.
잠시 뒤, 내 머리는 간신히 다른 가정을 내세울 수 있었다.
아, 주치의에게 화가 난 거구나.
요컨대 이런 거다. 내가 이런 사고를 친 것은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치의가 일을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고, 그 말인즉 내가 사고를 친 이유는 주치의 때문이라는 것.
그러니 나를 족치는 대신 주치의를 족치겠다, 이거겠지.
그렇다면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은 주치의의 원망은 어디로 향할까.
이곳은 마왕성이다. 주치의 역시 마족이라는 것을 되새긴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발, 망했다.
***
“지금 환자가 아픈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아아아아!!”
압도적인 마기가 성 전체를 휩쓸었다.
이 진득하고 묵직한 마기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 주치의 벤은 오늘 죽을 각오를 하고 급히 왕진 가방부터 챙겨 들었다.
마왕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는 부하는 당연히 그의 담당 환자, 자랑스러운 제0군단장이신 데몬 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마왕님의 집무실에 도착하니 입을 가린 채 맨바닥에 앉아 계시는 데몬 님이 눈에 들어왔다. 손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피.
그 탓에 집무실 카펫이 너저분해졌으나, 마왕님께서 그런 것을 신경 쓰실 리 없기에 개의치 않고 그분께 다가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인지 일어날 생각을 않으시는 그분을 급히 부축해 소파에 앉히며 속으로 자책했다.
환자가 아픈데 재깍재깍 나타나지 못하다니, 주치의 실격이다. 만약 데몬 님께서 분노하셔서 이 목을 꺾어버린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전에, 회복부터 시켜야겠지만.
일단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우선 의식 확인부터.
“데몬 님, 제 말 들리십니까? 이게 몇 개로 보이시죠?”
“세 개입니다.”
의식 정상, 시야도 정상.
데몬 님이 왜 이러시는지는 마왕성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똑똑히 봤으니까.
한낱 인간의 몸으로 자폭하려는 용사를 제지하는 그분의 모습을.
그것도 모자라 가벼운 손짓 하나로 용사의 목숨을 거두신 그 장면을.
용사의 자폭을 온전히 혼자 받아내었으니 몸이 망가진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얕보고 있느냐고?
‘그럴 리가.’
몸이 약해진 것과 전투 능력은 별개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라면 모를까, 이분은 다르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으리라. 그럼 나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죽었음을 알겠지.
당장 피를 토하면서도 생생히 살아 있는 눈빛만 봐도 그랬다.
갓 흘러나온 핏물이 동그랗게 고이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붉은 눈. 새하얀 머리 탓에 더 돋보이는 그 눈은 엄연한 ‘죽음’을 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여봤고, 수없이 많은 죽음을 봐왔기에 할 수 있는 눈이다. 어찌 감히 얕볼 수 있을까.
애써 밀려오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억누르고 벤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예상하셨겠지만, 후유증입니다.”
예상했다는 듯 마왕님의 얼굴에 체념이 스친다. 그 역시 씁쓸함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데몬 님만큼은 달랐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표정. 아니, 저건 분명 질린다는 표정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미 질리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별말을 다 한다는 듯, 그분은 마왕님께 받은 손수건을 입가에 대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체념, 혹은 해탈에 가까운 태도에 벤은 물론이고 마왕조차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리도 의연할 수가.’
다른 군단장들이었다면 분명 난리가 났어도 한참 전에 났으리라.
검을 빼 들든, 주먹을 휘두르든, 조용히 앉아 협박을 하든. 살기를 띤 눈을 형형히 빛내며 어떻게든 고치라고 했을 것이다.
그게 네가 할 일이 아니냐고.
그게 바로 네 존재의 이유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답답함이나 분노가 아닌 안도에 가까운 한숨.
무의식중에 벤은 0군단장의 주치의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곧바로 상념을 털어내고, 감정마저 갈무리한 뒤 빠르게 왕진 가방을 뒤졌다.
“언제나처럼 내상에 도움이 되는 약입니다. 이런 것밖에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데몬 님이 약병을 받고, 먹는 것까지 확인한 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할 일도 끝냈겠다, 이젠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다.
막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너, 나 좀 보자’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계시던 마왕님. 무시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왕을 마주했다.
딱히 불만은 없다. 억울하지도 않다. 환자의 이상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니까.
아마 데몬 님 역시 분노, 아니 분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계시리라.
그렇기에 일단 마왕님의 분노를 받고, 이후 살아 있다면 데몬 님의 분노까지 감내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가장 크게 화를 내야 할 데몬 님께서 나섰다.
……어째서?
***
마왕이 주치의를 족치려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벤의 손목을 잡았다.
깜짝 놀랐는지 벤이 커진 눈으로 나를 본다. 마찬가지로 의외였던지 마왕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랐냐? 나도 놀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이대로 주치의를 족치면 그 원망이 모두 나를 향할 것 아닌가. 제아무리 평소 온건한 성격의 벤이라 하더라도, 제 잘못도 아닌 것으로 갈굼을 받으면 당연히 열 받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막아야 한다!
그런 각오로 나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마왕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물론 제 주치의도 함께요. 아쉽지만 사직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야겠군요.”
“어, 응? 사, 사직…? 아니, 일단 알았어. 얼른 가서 쉬어.”
사직서 이야기만큼은 하기 싫은 건지, 역시나 얼렁뚱땅 넘어간다.
다음번엔 꼭 이야기하리라! 일단 오늘은 타이밍이 안 좋으니 속으로 다짐하며 성큼성큼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멈췄을 때, 우리는 제법 긴 복도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복도가 한두 개인 것도 아니니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슬쩍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없는 마계답게 복도 창밖으로 밤의 베일이 내려앉은 정원이 보인다. 해가 없는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 개의 달이 정원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풍경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저길 보라. 무슨 꽃이 이빨을 가지고 있는지. 식인 식물이랬나? 심지어 그 옆의 식물은 눈알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깜빡거려!
징그러움에 몸서리치는데, 옆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데몬 님….”
“음? ……아.”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손목을 잡고 있었네. 정신이 없어서 자각도 못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손을 놓고 슬쩍 벤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기분이 상한 건 아니겠지?
다행히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눈에 들어온 것은 나만큼이나 희게 질린 안색.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 아프기라도 합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의 얼굴에 체념이란 감정이 떠오른다.
정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듬뿍 담아 바라보니 그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벤은 창백한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뭔가 각오한 듯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는 허리를 푹 숙였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시길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어?”
순간 표정 관리조차 잊고 말았다. 아마 지금쯤 내 얼굴에는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떠올랐을 테지. 얼빠진 목소리는 덤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다. 미동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내 목소리 역시 듣지 못한 것 같고.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차마 대놓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 물을 수는 없으니 조금 말을 바꿔서….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껏 친절하게 물었더니만 오히려 기겁한다.
얘 진짜 어디 아픈가? 사람이 자기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주치의란 놈이 아프면 어쩌자는 거야?
심지어 그 주치의가 내 주치의다.
자칫 환자에게 내 몸을 맡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함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죽입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안 죽인다. 아니, 못 죽인다.
마족을 죽일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군단장 역할을 내팽개치고 탈출했겠지, 내가 왜 이곳에서 가슴 졸이며 살겠어?
새삼 깨닫게 되는 처량한 신세에 한숨만 나온다.
나는 울적한 마음을 안고 얼빠진 벤을 뒤로한 채 터덜터덜 내 방으로 향했다.
***
보기와는 다르게 모든 군단장을 통틀어 데몬 님이 가장 너그럽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도 못한 이까지 감싸실 줄이야.
아니, 저분은 애초에 내가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인간 출신이어서 그런가, 마족들과는 생각부터가 달라 통 그분의 기준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대뜸 고통 없이 죽여달라 했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오죽하면 평소 존댓말을 쓰시는 분께서 ‘뭐?’ 하고 반말을 내뱉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런 착각을 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군단장들. 그분들이었더라면 나를 구했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분이 풀려서’였을 테니까.
아무튼 거기서 눈치 빠르게 말을 멈췄더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난 눈치 없이 내 말에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줄로만 알고 용서를 빌기까지 했다. 그분께 부담을 씌운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데몬 님은 손을 올리는 대신 희미한 한숨과 함께 말씀하셨다.
[안 죽입니다.]솔직히 충격이었다. 이건 너그러워도 너무 너그러운 것 아닌가.
평소에도 저분의 주치의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지만, 오늘만큼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 한 병 들고 공식 군단장 전용 주치의, 세터를 찾아가야겠다.
평소 성질 나쁜 군단장들을 상대해야 하는 그가 부러움에 뒷목 잡는 장면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만.
‘두 번 다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제 담당 환자, 데몬 아루트의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리며 벤이 눈을 미세하게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