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0
20. 들춰진 베일(3)
‘…….’
자꾸만 떠오르는 암울한 미래에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 모든 것을 정하고 지켜보는 세계나 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진 몰라도 아마 그건 절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여느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해도 결국은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모습을 그들이 표방했다면, 이리도 냉정하고 가차 없을 리가 없을 테니까.
‘아아.’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서히 무너지는 육체를 추스르지 못하고 데온 하르트에게 기댔다.
이젠 고개조차 가누기 힘들어 힘없이 젖히니, 세 개의 둥근 달이 박힌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복잡한 표정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용사는 그저 힘없이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굳이 듣고 싶은 말을 고르라 한다면….
‘이름.’
용사라는 칭호가 아닌 내 이름을.
하지만 당신은 모르겠지. 나조차도 잊어버린 내 이름을 당신이 알 도리가 없을 테니.
용사가 된 이상 이전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건 그 존재 가치는 ‘마왕을 죽이는 것’으로 귀결된다.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목적에 매몰되어 스스로조차 이름을 되뇌지 못하는….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름을 잃게 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네요.’
다음 대의 용사는 데온 하르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사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오는 죽음을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찌 되었건 결과가 나왔으니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후련하다. 오히려 죽음이 기껍기까지 했다.
이제는 쉴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내 이름, 그래도 장례식 때는 한 번 정도 언급될 텐데.’
만약.
살아 돌아가 내 장례식을 지켜보게 된다면.
당신은 내 이름을 기억해 줄까.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
마왕의 인정을 받아 4개의 주 도시 중 하나인 ‘첫 번째 도시’를 맡고 있는 관리자는 드물게 덜덜 떨며 성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본래 ‘관리자’란 인간계로 따지면 ‘영주’에 비할 수 있는 존재다.
적어도 그 도시에서만큼은 왕이나 다름없는 관리자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며 나와 있는 이유라 하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제0군단장’의 방문.
다른 군단장이라 해도 두 손을 싹싹 빌며 굽실거려야 할 판에, 어떤 성향인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거물 중의 거물이 오다니.
굳이 소감이 어떻냐 묻는다면 ‘곤란하다’고 말하고 싶다.
생각해 보라.
성향을 모르니 쉽게 아부를 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냥 딱딱하게 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주제에 기분을 맞춰주지 못하면?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정든 머리와 영영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수하면 죽는다. 실수하면 죽는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등은 진작부터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축축해진 두 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관리자는 눈앞에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방법은 하나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행동하며 빠른 시간 내에 성향을 파악하는 것.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상대는 마왕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도는 0군단장. 자칫 심기를 거슬렸다간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난 오래오래 살아서 이 권력을 누리고 싶다고!’
이내 마차 문이 열리고, 안에서 훤칠한 사내가 훌쩍 뛰어내린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말끔한 인상. 귀족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흉흉한 마력.
저자가 0군단장인가? 아니, 마력이 있다. 0군단장은 분명 ‘인간’이라 했으니 마력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을 터.
역시나, 저 사내는 0군단장의 오른팔쯤 되는 이였는지 한없이 정중한 몸짓으로 누군가 나오길 기다리듯 마차 문을 잡았다.
그러자 검은 로브의 존재가 마차 계단을 밟고 느릿하게 내려섰다.
‘저 사람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 여유로운 몸짓, 태연한 태도, 로브를 쓰고 있음에도 풍기는 위압감까지.
애초에 0군단장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로브를 쓰고 있는데, 그가 아니면 과연 누가 0군단장이겠는가.
그의 덩치는 예상외로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술에 잔뜩 취해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상태에서 길 가다 마주쳤더라면 되레 시비를 걸었을 정도로 왜소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정신도 멀쩡했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분위기를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강대한 마력을 가진 훤칠한 남자가 누구에게 저리도 극진히 대하고 있는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왕진 가방을 든 남자가 누구를 그리도 챙기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마물과 전투를 한 듯, 몸 여기저기에 피를 묻힌 이들이 누구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 가장 여유로운가.’
꿀꺽.
재차 마른침을 넘기고, 조용히 목을 가다듬으며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로브의 사내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도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연이은 마물들의 습격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영영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간 도착할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래,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
나는 자리에 앉은 채 멍하니 열린 마차 문을 바라봤다.
‘내리기 싫다.’
어차피 이미 늦었지만, 여기서 내리면 정말로 꼼짝없이 이 도시를 끔찍한 마물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내 실력이 들통 날 확률도 증가하겠지. 아, 그리 생각하니까 더욱 내리기 싫다.
내리기 전, 에드가 씌워준 로브의 후드를 꾹꾹 잡아당기며 머뭇거리자, 마차 밖에서 문을 잡고 있던 에드가 의아한 듯 나를 부른다.
“데몬 님?”
“……갑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릿느릿 마차 계단을 밟고 내려서자 도시의 관리자인 듯한 투실투실한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원래 저런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래 저런 표정일 리가. 저건 분명 내가 마음에 안 든 게 분명해.’
기껏 도시를 지켜줄 군단장을 보낸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저런 듣도 보도 못한 잔챙이가 와버렸으니 어찌 속 편히 웃을 수 있을까.
아마 지금쯤 ‘우리 도시는 망했어!’라면서 속으로 좌절하거나, ‘빌어먹을 마왕 새끼!’ 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해맑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다.
때문에 입을 다문 채 침묵하는데, 그새 감정을 정리한 건지 그가 한 걸음 나서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첫 번째 도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줄줄이 찬양이었다.
무려 0군단장님께서 방문하시니 두 번은 없을 영광이라느니, 도시 사람들도 모두 안심할 거라느니.
뭔가, 찬양은 찬양인데 대놓고 아부하는 것 같지는 않은 자연스러운 찬양이랄까.
그에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새끼 프로다! 빠른 감정 조절도 그렇고, 이건 아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
차마 끊을 용기도 없어 그저 속으로 감탄만 하고 있는데, 슬쩍 나를 살핀 에드가 딱딱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아부는 그쯤하고.”
“!”
너,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잔챙이가 와서 기분이 별로인 것 같던데, 그 잔챙이가 갑질까지 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보통 이런 경우 앞에서 나댄 부하보다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상관이 욕을 먹는다고.
역시나 놀랐는지 관리자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프로답게 자신의 표정을 헤픈 웃음으로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유례없는 0군단장님의 방문에 너무 들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0군단장 데몬 아루트 님의 부관 에드다. 단순한 관광이 목적이었다면 네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목적은 도시를 지키는 것이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너그러운 대우에 감사드립니다.”
재차 허리를 깊숙이 숙인 관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에드는 철저히 보고를 받는 상관이 되어 있었다.
펜을 든 그가 마차 안에서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재차 뒤적이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물은 정확히 며칠 간격으로 공격을 해왔지?”
“아… 딱히 규칙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일주일 내에는 다시 공격해 오리라는 것 정도가 될 듯합니다.”
“공세는 어느 정도였고, 그 수는 어땠지?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마물들이 왔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나?”
“예, 그렇습니다. 저들도 먹어야 살 수 있으니, 생존이 걸린 일이라 그런지 주위의 마물이란 마물은 전부 모인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공세 역시 무시무시했고요. 사실상 전투도 전투지만, 그보단 기세 쪽에서 크게 밀렸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기세라… 그 정도로 필사적이었나 본데… 뭐, 기세가 큰 문제였다면 이젠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니. 긍정적인 말 같아서 좋긴 한데… 그 말을 하면서 날 보는 건 뭐지.
착각이 아닐까 했지만,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는 그의 행동에서 나는 불길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분명 뭔가 있다!
저, 저기? 잠시만….
“특이사항은?”
무시당했다!
“상대를 마물이라 생각하는 것보단 하나의 수성전이라 생각하고 전투를 벌이는 쪽이 더 맞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데몬 님.”
“……네?”
지금까지 날 빼놓고 실컷 대화를 하더니 이럴 때만 나를 부른다. 내게 뭘 바라는 건데?
그래서 어쩌라는 마음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던 에드가 재촉하듯 재차 말을 걸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
어찌하고 말 것도 없다.
굳이 마물을 찾으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할 생각은 없으니 여기 처박혀서 놈들이 올 때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지.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데몬 님?”
“……일주일 내로 쳐들어온다 했으니 기다려야죠. 굳이 놈들 좋으라고 밖까지 마중을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그동안 군단원들은….”
“마물들의 공격이 있을 때까지 자유입니다. 술을 마셔도 좋고, 쇼핑을 해도 좋습니다. 단, 공격이 있을 시 곧바로 대응 가능해야 합니다.”
그 말이 그리도 좋았는지, 군단원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진다.
내 선택이 옳았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나는 뿌듯함에 모처럼 당당히 가슴을 폈다.
무려 일주일이나 걸릴지도 모른다는데 마냥 대기하고 있으라 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물론 내가 상관이니 대기하라 해도 그리했을 테지만, 그만큼 나에 대한 원망 수치도 쭉쭉 올라갔을 테니 썩 좋은 판단은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참에 생색도 좀 내고, 나에 대한 호감도 좀 쌓아두는 편이 이득이리라.
그래야 내가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늘어나지.
‘알겠지? 그러니 마물이 쳐들어오면 나부터 지켜야 된다?’
속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한참 전부터 눈치를 살피던 관리자가 이때다 싶었는지 슬쩍 끼어들었다.
“주무실 곳은 저희 측에서 마련했습니다. 가보시겠습니까?”
“오.”
말부터 행동까지 상대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데 아주 능숙하다. 역시 프로다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는 군단원들을 돌아봤다.
“그럼 숙소의 위치만 파악하고, 그 뒤는 자유입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와아아아아아!!”
“데몬 님 만세!!”
군단원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실컷 놀라고.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니까.
‘오랜만에 술이나 마셔야지.’
모처럼의 도시다. 심지어 이곳 첫 번째 도시의 또 다른 이명은 무려 ‘유흥의 도시’.
술과 도박, 매춘 등 쾌락과 관련된 것들이 바로 이 도시의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것!
그중 내 마음에 쏙 든 것은 당연히 술이다.
술을 마실 생각에 신이 난 나는 체면상 겉으로 티 내진 못하고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서는 관리자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