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01
201. 휴식인가 게으름인가, 그도 아니면…(3)
“너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줬는데! 이 배은망덕한…!”
“먹여주고 재워준 건 마스터죠.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주신 것도 마스터고요.”
“아무튼 직접 가르쳐준 건 우리잖아!”
“그건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주인은 마스터라서요.”
할 말이 없는지 굳은 놈들이 입만 뻐끔거리다 끝내 힘없이 밀려난다.
방 밖으로 미친개들이 쫓겨나고 완전히 문이 닫히기 직전, 무언가 떠오른 듯 한 명이 문 틈새에 대고 다급히 외쳤다.
“대장! 저희 없다고 약 막 하시면 안 됩니다!”
“…….”
역시 약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졌던 거군.
걱정은 기특하지만… 그와 별개로 단은 매정하게 문을 닫고 돌아섰다. 언제 단검을 들고 날뛰었냐는 듯 급격히 무기력해진 데온 하르트가 꾸물꾸물 침대에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짜증이 치밀어서.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조금 싸하게 식은 목소리가 나왔다.
침대에 누운 데온이 고개를 돌려 단을 본다. 속을 알 수 없는 붉은 눈이 나른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속에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멈춰있던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태도만 보면 목적을 다 이루신 것 같습니다.”
“…….”
“제 앞에서 이렇게 늘어지시는 건 괜찮습니다만, 외부에서 눈치챌 정도로 늘어지시면 곤란하죠.”
내게 보이는 것은 괜찮다. 나만 입을 다물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을 타인에게도 보이면 곤란하지.
손을 뻗었다. 손끝에 평균보다 낮은 체온이 느껴지고, 이내 손바닥 전체가 타인의 미적지근한 체온으로 가득 찬다.
살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죽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눈앞의 재앙은 반항 한번 없이 순순히 목을 내주었다.
“그거 아십니까.”
협박하듯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당신의 이런 태도는 내게 짜증을 유발합니다. 이게 더 나아가면 증오가 되겠죠.”
“…….”
“전 많이 참았습니다. 이쯤이면 충분하니 적당히 하세요.”
천천히 손을 떼고 물러섰다.
눈동자만 굴려 멀어지는 단을 보던 데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연한 목소리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계 상황은 어때?”
“…….”
“내가 쉬는 동안 인간계에 다녀왔을 거 아니야. 사소한 것도 좋으니 말해봐. 어땠어?”
“……로우펠 상단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가문의 사람들이 모조리 참변을 당했다더군요.”
소문 그대로 참변이라 읊었지만 단은 알았다. 아마 데온 하르트도 듣자마자 알았으리라.
그건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한 짓이다. 정보를 좀 다루는 자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겠지. 하찮게 여기던 사생아에게 죽게 되었으니, 기분이 어땠으려나.
그러게, 적은 함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미래에 어떻게 되어있을지 누가 아나.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당장 데온 하르트만 해도 지금의 행동으로 적을 만들까 말까 한 상황이고.
속으로 혀를 찬 단이 말을 잇는 데온에게 다시 집중했다.
“라이벌이 무너졌으니 네 상단이 완전한 독점 체제를 이루게 되었겠네.”
“자잘한 상단들이 있긴 합니다만…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됐어. 그 상태 계속 유지하도록 해.”
“…….”
멈칫한 단이 데온을 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붉은 눈이 나른하게 휘어진다. 그와 대비되게 이질적으로 또렷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태도만 보면 목적을 다 이룬 것 같다고 했던가.”
“…….”
“그럴 리가.”
절대 그럴 수가 없지.
지친 것이 아니다. 지치고 싶어도 벌써 그러기엔 아직 갈 길이 멀어 지칠 수가 없다.
“단지 기다리는 것뿐이야.”
내 상태를 전해 들은 마왕이 무언가 움직임을 보이기를.
그 과정에서 보다 많은 마력을 소모하기를.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더라도 겸사겸사 휴식을 취하며 기 싸움을 할 수 있으니 손해 보는 것은 없다. 그리고.
번개처럼 일어난 데온이 삽시간에 단의 목을 잡고 몰아붙였다. 제가 당한 것의 보복을 하듯, 마찬가지로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목을 쥐어 압박하며 말한다.
“많이 참았다고? 안 됐네. 좀 더 참아야 할 텐데.”
“……하하.”
기어오르지 말라는 경고를 더한 압박.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단은 순종의 뜻을 담아 두 손을 들었다.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떠오른 상태였다.
“그런 이유라면야, 얼마든지.”
***
총지휘관씩이나 되는 자가 2주간 손을 놓고 있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군주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마왕이 데온 하르트를 불렀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2주면 오래도 참았다.
마왕성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대면하는 상황인가. 과연 뭐라고 말할지. 복도를 가로질러 마왕의 집무실로 향하며 데온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똑똑.
“들어와.”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마왕이 있는 책상 앞에 섰다. 오랜만의 집무실은 예전에 왔을 때와 다를 것 없었기에 새삼스레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사각거리던 마왕이 고개를 들고 데온을 본다. 멋대로 보고도 빼먹고 방에 틀어박혀 모든 일을 손에서 놓고 쉰 인간을 향해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첫 말이 흘러나왔다.
“왔어?”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예상 밖이라고 해야 할지. 분노는커녕 짜증조차 묻어나지 않는 담백하고 깔끔한 목소리였다.
물론, 그 생각은 곧 이어진 발언에 뒤집혔지만.
“용사님이 되어서 그런가, 얼굴 한번 보기 어렵네.”
“…….”
“어쩌겠어. 고귀하신 용사님인 것을. 그렇지?”
아, 이건 조금 예상 밖이다. 분노가 아니라 비아냥일 줄이야.
데온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부르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구차한 변명이었음에도 순순히 수긍한 마왕이 펜 끝으로 한쪽 소파를 가리킨다. 조금 긴장하고 있던 데온이 민망할 정도로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일이 있으니 조금 기다리고 있어.”
사람을 부를 땐 언제고 기다리라니. 설마 이게 복수인 것일까.
시킨 대로 소파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마왕을 지켜봤다. 저 얼굴을 보자마자 살의가 치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괜찮다.
‘아무래도 저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까.’
언제나 제가 방문하면 하던 서류작업을 멈추고 상대해주었기에 데온은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탓에 느긋하게 관찰할 기회를 얻었음에도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만, 서류의 양이 이전에 비해 확연히 늘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아무래도 전쟁을 진행하며 신경 쓸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지.
‘……졸린데.’
뻑뻑한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계속 늘어지다 보니 몸이 이쪽에 적응한 모양이다. 절대 심적인 문제는 아니다.
‘자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정말 졸리다. 이러다 깜빡 잠이 들 것 같다 싶을 정도로.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면 악몽을 꾸는 탓에 이곳에서 잠들고 싶지 않은데, 도대체 언제 서류작업을 끝내고 상대해 주련지.
잠을 쫓기 위해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집어 먹으며 데온은 확신했다. 이게 복수인 게 분명해.
그리고 잤다.
번쩍 눈을 뜬 데온이 반사적으로 제게 뻗어진 손을 잡아채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언제 잠든 건지, 현실 감각이 들지 않는다.
스스로도 당황스럽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이해 못 할 강박이 고개를 들어서,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뭡니까?”
“악몽을 꾸는 것 같길래.”
“아.”
이상하다. 악몽을 꾼 기억은 없는데.
오히려 방에서 잔 것처럼 푹 잤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된 모양이지?”
“……대화할 준비는 이미 되어있었습니다.”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집중할 시간이 아니지. 상념을 떨쳐내고 언제 누운 건지 모를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위에 덮여 있던 담요가 스르륵 떨어졌다.
‘……담요?’
제게 닿는 시선에 마왕이 싱긋 웃는다.
담요와 마왕을 번갈아 보던 데온은 이번에도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했다.
“마왕님이야말로 이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생긴 겁니까?”
“시간은 처음부터 있었어. 다만 나보다는 네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미뤘을 뿐이지.”
“……?”
“막 들어왔을 땐 여유가 없는 상태였잖아. 그렇지?”
연륜이라고 해야 할까. 마왕은 그냥 알았다.
마왕성에 돌아온 데온 하르트에게는 피폐해진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도 본능적으로 여유를 찾아 늘어지듯 휴식을 취한 것일 테고.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괜찮아졌을 것 같아 불렀다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데온 하르트는 어딘지 모르게 날을 세운 상태였다. 저 상태로는 대화를 나눠봤자 좋지 않은 감정만 쉽게 덩치를 키울 터.
하여, 시간을 주었다.
“……딴말 말고 본론만 말씀해주시죠.”
경계심은 여전한 것 같지만.
그래도 막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에 비해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어깨에서 힘이 빠져 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마왕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잡았으면 해서.”
“…….”
“지금처럼 아예 인간계 정복에서 손을 놓고 있으면 곤란해. 성심성의껏 돕는 게 우리의 거래 아니었어?”
“…….”
“게다가 제국과의 전쟁으로 마족들은 대폭 줄었는데 마물은 잔뜩 늘어버렸거든. 한마디로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란 말이지.”
말없이 담요를 만지작거리던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진 눈매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전부터 생각했습니다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잊고 있던 살의가 다시 치민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티를 내선 안 돼. 눈앞의 존재는 그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을 테니.
살의를 눌러 삼키고 속내를 들킬 여지가 있는 눈은 웃음 아래 감춘다. 표정을 견고히 다졌다.
“정 안되면 마물은 마왕님께서 직접 나서 처리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저번에 보니까 삽시간에 처리하고 오시던데.”
각 종족의 수장들이 모인 요정족의 영역에서 마물들이 쳐들어왔을 때, 마왕은 직접 나서 손쉽게 처리하고 돌아왔었다.
“마력은 되도록 아끼는 편이 좋으니까.”
“언제부터 마력을 아끼셨다고 새삼스럽게…. 현 상황에서도 아껴야 할 정도로 마력이 중요합니까? 마족들보다도요?”
“…….”
“아니, 마왕님께서 그러실 리 없으니… 무언가 개인적인 사정이라도 생기신 모양이군요.”
……떠보는군.
질세라 마왕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초승달처럼 눈을 접어 웃음으로 역안을 감추며, 말한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그보다는 예상치 못한 적이 나타날 때를 대비한다고 하자. 지금은 전쟁 중이잖아?”
“마왕의 유일한 숙적인 용사가 같은 편이 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적이 과연 있겠습니까. 있어봤자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을 텐데요.”
“세상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몰라서 말이지. 그보다, 용사님이 인간계 정복에 의욕이 떨어지신 모양인데….”
유들유들하게 화제를 돌리며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마왕이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데온을 보았다.
짐짓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채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용사님의 의욕이 다시 샘솟을까.”
“……애초에 인간계 점령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묘한 비꼼까지 담겨 있는 발언에 울컥 말이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조건은 그저 데온 하르트가 마왕 본인을 좀 더 즐겁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건 것이라는 것을. 거창한 이유 같은 것 없이 마왕은 그저 장난감을 가장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서. 데온은 불만스레 의미 없는 말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나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볍게 말을 끊어낸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걸음 내디뎌 거리의 폭을 좁히고, 손을 뻗는다.
“말 잘 듣는 개를 들인 줄 알았는데.”
“…….”
손끝이 본래 낙인이 있어야 할 위치에 닿았다. 용사가 된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매끈한 자리.
그것이 못내 불만인 듯 그가 손톱을 세워 꾹 누른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개는 어디 가고 웬 여우가 여기에 있을까.”
“……그래서.”
지금쯤이면 사그라들었어야 할 따끔한 고통이 지속된다.
미친 새끼, 마력을 주입했구나. 마력을 아껴야 한다고 버틸 땐 언제고 고작 쉽게 아물지 않는 작은 상처 하나 내기 위해 마력을 낭비하다니.
……아니지. 마왕이라면 확신을 얻기 위한 실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용사의 육체도 마력으로 상처를 입히면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기 위한 실험.
어느 쪽이든 기분 더러운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럼에도 데온은 웃으며 언젠가 했던 말을 꺼냈다.
“죽이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