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03
203. 휴식인가 게으름인가, 그도 아니면…(5)
‘죄책감에 빠져 죽고 싶지 않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그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핏물의 수위가 높아진다는 뜻이 된다.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시험을 해 보는 편이 좋겠지. 내가 죄책감을 느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할 것도 없이, 가슴 한구석에 박혀 있던 기억이 기다렸다는 듯 존재감을 발했다.
최근의 기억. 오로지 나로 인해 망가지고 무너진 죄 없는 사람.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내 평생의 죄책감.
‘……리엔 경.’
아.
피 웅덩이의 영역이 커졌다.
마왕도 이를 느낀 듯 슬쩍 눈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데온을 보았다. 한발 늦은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죄책감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다시 말씀드리지만 외면은….”
“하지 않는다고. 알아. 하지만 외면하지 않는 것과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다르잖아?”
그렇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를 마왕이 한 걸음 더 내디뎌 바짝 좁혔다.
정확하게 피 웅덩이의 영역을 디딘 발을 데온이 힐긋 내려다본다. 마왕은 싱긋 웃으며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을 신발로 비볐다.
“취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예?”
뜬금없는 발언에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악기, 그림, 원예… 뭐든 상관없어. 그저 아주 건전하고 평화로운 취미를 만드는 거야. 잠시 머리 아픈 현실에서 숨 돌릴 수 있는 틈을 만드는 거지.”
“…….”
“내가 도와줄게.”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한 데온이 눈살을 찌푸린다. 마왕은 싱글거리며 결정된 것으로 못 박고 물 흐르듯 화제를 돌렸다.
반박은커녕 무언가 말해 볼 틈도 주지 않았다.
“아 그래, 그 소식 들었어?”
“……뭡니까?”
“황태자가… 아니, 이젠 황제라고 해야 하나? 엘피디우스 데세르트가 에스페라네스로부터 용병을 지원받았어.”
“오.”
***
레멤베르는 데온 하르트가 머무르던 저택의 집사였다.
직접 찾아간 보람이 차고 넘치던 노인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황제 엘피디우스는 무료하게 의자 팔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았다.
‘공작은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쪽지를 들고 레멤베르라는 노집사를 찾아간 날, 그와 알레테아는 예상 밖의 선물을 받았다. 단순히 선물뿐만이 아니라 의문까지 덤으로 받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공작이 준 쪽지는 하나의 증서였다. 에스페라네스에 청한 용병을 엘피디우스와 알레테아의 앞으로 둔다는 증서. 그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레멤베르가 말해 준 운용 가능한 수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이득이 되는 상황임에도 차마 입 다물고 넘어갈 수 없어 결국 한마디하고 말았더랬다.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실로 대단하다.
공작은 요청한 용병 중 일부만 먼저 받아 황족들의 호위에 사용했고, 남은 모든 용병은 엘피디우스와 알레테아의 앞으로 돌려 두었다.
예상 밖의 전력이 생겨 얼떨떨하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다. 계산 오류도 아니니 껄끄러울 것도 없겠다, 엘피디우스는 흔쾌히 받았다.
공작의 행동은 이해 못 할 의문으로 평생 남겠지만, 지금 그들은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벅차므로 풀지도 못하는 의문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웠다.
[파견 기간은 언제까지인가?] [일단은 6개월로 보고 있습니다만….] [……짧군.] [추가 요금을 주신다면 더 길게도 가능합니다.]1년은 되어야 뭔가 할 수 있을 텐데.
……뭐, 그건 그때 가서 추가 요금을 주면 되겠지.
이로써 전력이 늘었다. 숙부님… 선대 황제의 명령으로 경계선에서 마족들과 충돌하며 병력 일부를 붙잡아 두던 영웅 후보들도 있으나, 그들을 불러들이기엔 위험이 크다.
숙부님께서 그들을 그곳에 보낸 이유를 알기에 엘피디우스는 아깝지만 그들을 없는 전력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거나, 그 전에 죽거나.
“지금 듣고 계시는 겁니까!”
“…….”
높아질 대로 높아진 목소리가 상념을 깨부쉈다.
지금 감히 황제를 향해 언성을 높인 것인가. 무례한 행동에 엘피디우스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귀족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외치다시피 말했다.
“회의도 없이 멋대로 동맹을 맺으시면 어떡합니까!”
“산국은 제국이 위태로워지고 선황이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은 나라입니다! 굳이 다시 동맹을 맺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 그거 말인가. 엘피디우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산국과의 동맹은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한 것이 아니다. 그쪽에서 먼저 동맹 의사를 밝혀 왔지. 모든 인수인계를 끝낸 이후부터 줄곧 숙부님께서 행하신 일에 관한 새로운 정보는 언제나 바로바로 갱신되었기에, 내막을 알고 있던 그로서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다시 동맹을 맺었다.
‘……생각하고 보니 모든 정보가 갱신된 건 아니군.’
나도 모르게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하셨으니.
아무튼, 이 정보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저들의 발언은 언제 끝날는지. 시끄러운 귀족들의 외침을 배경 삼아, 엘피디우스는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
제국과 산국의 재동맹이 있기 전, 산국의 왕은 한 소식을 들었다.
기어이 황제가,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죽었다고 한다.
신경 쓰지 않는 척 태연히 사람을 물린 산국의 왕은 한동안 같은 서류만 읽고 또 읽었다.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평범하게 죽지 않았다. 추한 죽음도 아니었다.
황궁에 홀로 남아 마왕군과 함께 죽고자 한, 신화나 각색된 역사서 속에서나 나올 법한 죽음이었다.
‘참으로 그답게도 갔군.’
썩 사이가 좋지 않은 상대였음에도 그의 행동 자체에는 경의를 표하게 된다.
‘황제’의 표본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행동을 했으며, 그럼에도 지고한 그를 어떻게 보아야 옳을까. 괜히 서류의 글자를 손끝으로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의 선택은 완전히 합리적이지는 못했다.
‘굳이 황족이 남아야 했다면 차라리 후계자인 황태자를 그곳에 남겨야 했어.’
황녀는 제국민들을 위해 남았다는 숭고함을 뒤집어씌우기엔 버려진 희생양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남을 테니 적절하지 않고, 황제는 용사의 파편까지 지닌 제국의 강력한 전력 중 하나다. 더해서 황제가 죽어 생길 혼란을 생각한다면 그는 죽어서는 안 됐다.
그러니 민심을 이유로 셋 중 하나가 남아야 한다면 황태자여야 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텐데.
“……역시, 황제의 표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군.”
산국의 왕, 연화는 깨달았다.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최후의 순간에 선택한 것은 가족이었다.
제국이나 제국민들을 위한 희생이 아니다. 자식도 아닌 조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도 놀라워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눈을 크게 뜬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일방적으로 동맹 파기를 통보할 때, 그는 미래에 남을 조카들을 생각한 발언을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내가 살아 있는 한.] [제국의 행보에는 신경 쓰지 말도록.]바꿔 해석하면 에도아르도가 죽는 순간부터는 제국을 신경 써 달라는 뜻이다. 과도한 간섭까진 아니고, 조카들을 잘 부탁한다- 정도의 의미가 되겠지.
읽히지 않는 서류를 내려놓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그런 부탁이 오갈 사이도 아니건만.’
직접적으로 대놓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은연중에 내비친 바람이다. 제멋대로인 황제의 바람 따위,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하필이면 대상이 그가 스스로를 희생하며 지키고자 한 이들이어서. 나라를 위한 죽음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죽음은 낮잡아 보기엔 저조차 홀릴 정도로 숭고했으므로.
“……죽은 자의 바람 하나 들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
게다가 산국은 남부에 위치한 만큼 미신이 많아서 들어주지 않으면 정서상 찝찝할 것 같다.
그녀는 끝내 통신기에 손을 올렸다.
황제의 바람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이것과 연결되는 그쪽의 통신기가 버려지거나 분실되는 일 없이 제대로 옮겨졌으리란 예상 그대로, 통신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음성을 전했다.
– 산국의 왕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대륙에서 마왕군을 몰아내기 위해, 현 제국의 황제에게 동맹을 제의합니다.”
***
이쯤이면 들을 만큼 들어줬고, 참을 만큼 참아 줬다.
잠자코 귀족들의 말을 듣던 엘피디우스가 화려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려 이목을 모았다. 열이 오른 분위기를 가라앉히듯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채웠다.
“산국은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지 못한 거다. 제국이 위태로워지고 선황이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할 때는 이미 이쪽에서 먼저 동맹을 파기한 뒤였으니.”
“예? 그게 무슨…!”
“선황께서 비밀리에 먼저 동맹을 파기하셨다.”
“어째서 회의도 없이….”
누군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질타를 받아야 할 대상은 이 자리에 없다. 귀족들의 이목이 다시 그 후계자이자 현 황제에게 쏠렸다.
시선 가운데에서, 엘피디우스는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전 수도는 버릴 생각이었지. 그때 산국이 도우려 들었다면 오히려 곤란해졌을 거네. 선황께서 홀로 남아 먼 길을 떠나실 때까지 돕지 않은 것? 그 역시 선황께서… 짐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고자 마음먹고 행하신 것이었으니 산국의 죄라고 할 것은 없지.”
“…….”
“자네들은 짐이 멋대로 동맹을 맺었노라 외쳤지만, 그 역시 선황의 선에서 미리 약속되어 있던 것이다. 동맹 파기는 일시적인 것, 짐이 황위에 오를 시 다시 동맹을 맺는 것으로.”
“저희는 알지 못하는 사안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니 그럴 만하지.”
이후에 비난받을 모든 행위는 숙부님께서 지고 가셨다.
그러니 나는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숙부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행동이니까.
저들은 이걸 빌미로 기선 제압을 하려 드는 모양이지만… 힘없이 눌릴 생각은 없다.
복수를 위해서는 황권을 지켜야 할뿐더러, 숙부보다 카리스마도, 무력도 부족하다지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 황제이기에. 햇병아리 황제는 팔걸이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이 이상 선황의 노력을 모독하지 마라. 짐에게도, 산국의 왕에게도 흠잡을 것은 없어.”
“하오나 폐하, 아무리 그래도 귀족들과의 회의도 없이 일을 마구잡이로 진행하시면….”
서걱! 쿵!
귀족들의 입이 다물렸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크게 뜬 눈들이 한곳을 향한다. 그곳엔 두 동강 난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서 검을 빼 든 황녀가 두 눈을 형형히 뜨고 귀족들을 둘러본다. 눈을 마주친 이들이 저마다 어깨를 떨며 시선을 피하고, 이어서 눈빛만큼이나 살기 가득한 음성이 좌중을 짓눌렀다.
“그쯤 하시죠.”
황제파를 통제하는 숙부도 없고, 귀족파의 수장인 공작도 없다.
낯선 곳에서 낯선 권력 구도를 눈앞에 둔 황족들은 철저히 혼자였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뿐.
그러니 오라버니는 내가 챙긴다. 황권을 지키기 위하여 숙부님이 갖춘 것 중, 우리가 갖추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었더라.
그래, 무력이었다.
‘부족한 무력? 그건 기백으로 채우면 돼.’
알레테아가 뽑았던 검을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었다. 평소와 다르게 웃지 않는 얼굴로 싸늘히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책임질 사람은 없습니다. 굳이 누군가가 책임지는 것을 봐야겠다면 선황께서 죽음으로 부담했다고 보면 되겠죠. 시간을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 무의미한 다툼을 굳이 계속해야 할까요?”
오라버니가 황위에 무사히 오른 이상, 어리석고 해맑은 황녀의 탈은 더 이상 쓸모없다.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얼빠진 귀족들의 표정을 보며 알레테아는 가볍게 웃었다.
왜. 멍청한 황족이 검을 쓸 줄은 몰랐나 보지? 우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