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06
206. Noli metuere(2)
데온 하르트는 꽤 오래전부터 레멤베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던 듯 범상치 않은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고 다녔으니 눈치가 소멸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은청색의 머리와 눈에 더해 본인이 흘러가듯 밝힌 에스페라네스라는 출신은 의식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확실히 기억되었기에, 데온은 그것을 적절할 때 떠올렸다.
[황태자가… 아니, 이젠 황제라고 해야 하나? 엘피디우스 데세르트가 에스페라네스로부터 용병을 지원받았어.]그 말을 듣자마자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곧장 알 수 있었다. 엘피디우스가 내 소유였던 저택에 방문했다는 정보는 이미 들은 상태였으니까.
제국은 인간계를 노리는 마계에 있어 언제나 요주의 대상이었다. 그 주축인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더더욱.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 그가 죽었다지만 바로 눈을 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 에도아르도가 후계자를 대충 키웠을 리 없지 않은가.
에도아르도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정보원들은 그의 죽음이 확인된 즉시 유연하게 대상을 변경하여 새 황제 엘피디우스의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데온은 그가 이 저택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빠르게 들을 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에스페라네스인과 그런 그가 머무는 저택에 방문한 엘피디우스. 그리고 이후에 이루어진 에스페라네스의 용병 지원. 안 봐도 뻔하잖아.’
남은 것은 확신뿐이다.
붉은 눈동자가 연미복을 입은 노인의 움직임을 좇는다. 앞에 놓인 차가 식든 말든 무릎 위에 내려놓은 상자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앉아 노인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데온이 대뜸 입을 열었다.
“이쪽에도 용병을 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멈칫한 것도 잠시, 레멤베르가 찻잔을 내려놓는다. 내리깔렸던 눈동자가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다.
“아뇨, 안타깝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흐음.”
떠 본 거였는데, 딱 걸렸군. 정말 관련 없었다면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반응이 나왔겠지.
이로써 그가 용병 지원의 통로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한다고 했던가. 새삼 귀족들의 세계에서 떠돌던 격언을 되새기며 데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제국에 지원한 용병을 다시 회수하는 것은?”
“그것 역시 어렵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에스페라네스는 인간계를 집어삼키기 위해 각 왕국을 살피는 마계의 안중에도 없는 왕국이었다.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도 없는 데다 먹어 봤자 그 과정에서의 병력 소모만 클 뿐, 손해를 감수하며 집어삼켜야 할 만큼의 이득조차 없는 아주 작은 왕국이니까. 오죽하면 데온 본인조차 존재를 잊고 있었을까.
다시 말해 얌전히만 있었다면 인간계 정복 후에도 마계의 손이 닿을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라는 뜻인데.
“마계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나라에 용병을 지원한다는 것은, 마계와 대적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이런 식으로 움직임을 보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에스페라네스는 또 어떻게 상대하는 것이 좋을까. 머릿속으로 에스페라네스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데온을 눈치챈 듯, 레멤베르가 허허롭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에스페라네스는 언제나 중립의 입장을 고수해 왔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지금의 행동은 중립이라 보기 어려운데요.”
“하르트 님.”
‘주인님’이라고 부른 것도, 작위를 부른 것도 아닌 생소한 호칭.
반사적으로 멈칫한 데온이 레멤베르를 보았다. 그는 연륜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이 열리고 나온 말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날카로운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에스페라네스는 검입니다.”
“…….”
“검에 대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지요.”
“……하.”
과거를 꼬집는 발언에 데온이 언제 굳었냐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가 황제와 마왕의 사이를 오갈 때 저 논리로 목숨을 유지했었지.
어째서 알고 있는 건지 따위의 의문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간 봐 온 레멤베르의 능력이라면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저 노인의 은청안을 똑바로 노려보다가 입을 열어 짧은 정적을 깨부쉈다.
“그래서, 지금 에스페라네스가 그런 입장이니 봐달라는 겁니까?”
“포장 없이 말하면 그렇게 되겠군요.”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레멤베르, 완전히 잘못 짚었습니다. 지금 레멤베르가 한 말은 헛소리예요.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우습지도 않다.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검이 주인을 가리지 않을 때의 이야기죠. 레멤베르는 이쪽의 용병 요청을 거절했잖습니까.”
의지를 갖고 주인을 가리는 검은 손에 넣지 못할 바엔 부숴 버리는 것이 옳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던 레멤베르가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상황이다.
조금은 느슨하게 풀린 목소리가 한탄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늙은이의 궤변에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시는지….”
“이쪽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어서요.”
“정녕 그러실 겁니까.”
“네.”
그러니 어서 남은 패를 내게 내보여라. 이번만큼은 ‘그’가 패로 나와도 분노하지 않을 테니.
데온이 샐쭉 웃었다.
그 눈빛에 못 이긴 듯 레멤베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예민한 사안인 만큼 드물게도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형님 되시는 분의 시신을 수습한 점을 봐서라도 넘어가 주시는 건 안 될는지요?”
“……!”
데온의 눈이 커졌다. 덩달아 확장된 동공이 이내 기쁨과 희열을 담고, 벌어진 입은 입꼬리가 올라가 환한 웃음을 만든다. 레멤베르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넘치는 감정에 도리어 죽어 버릴 것 같다. 기쁨에도 숨이 막힐 수가 있구나.
진실로 기뻐 죽겠다는 듯 눈을 접은 데온이 잔뜩 멘 목소리를 뱉었다.
“……역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레멤베르였군요.”
내 형의 몸을 수습한 사람이.
레멤베르가 조심스레 데온의 얼굴을 살핀다. 데온은 보란 듯이 재차 웃었다.
가져가서 멋대로 이용한 것도 아니고, ‘수습’이라 했다. 그가 시신을 옮긴 탓에 찾는 데 상당한 마음고생을 했다지만, 그냥 두었다면 드벨라니아가 그 장소에 가 보기 전에 이미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어 엉망이 되었으리란 것을 알기에 화낼 수는 없었다.
지금 협상에 이용하려 들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일부러 의도하고 몰아붙인 것이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예상 정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최근이었죠.”
크루엘의 몸을 추적하던 드벨라니아의 보고서를 읽고 예상했다.
추적하고 추적하여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맴돌고 있다던 자리의 위치가 내가 머물던 저택과 교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거기서 데온은 반사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굴던 그 저택의 노집사를.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지만, 그것과 직감 딱 두 개만 믿고 마왕의 앞에서 도박도 했지. 들어맞아서 다행이다.
“하면, 대답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위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품에 안은 나무 상자의 감촉이 새삼 딱딱하게 느껴진다. 잠시 입을 다물고 조용히 목을 가다듬은 데온이 긍정의 뜻을 담아 말했다.
“위치가… 어디입니까.”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소파 아래에서 반짇고리와 붕대를 꺼내 든 레멤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참을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경계선 근처였다.
낮과 밤이 갈리는 곳 바로 근처에서 작은 봉우리를 발견한 데온이 말없이 레멤베르를 돌아봤다. 눈에 서린 의문과 질책을 읽은 듯 곧장 답이 돌아왔다.
“하르트 님은 인간계와 마계를 오가시니 어느 쪽에 머무르든 지켜볼 수 있을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래도 마물… 몬스터의 습격이 있을 수도 있는데….”
“결계를 두었으니 괜찮습니다. 사람을 쓸 수 없는 상황상 정교한 진을 만들진 못해 마족까지는 막아 내지 못하지만, 지능 없는 짐승에 불과한 몬스터는 충분히 걸러 낼 수 있지요.”
“……고맙습니다.”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에 놓인 네 개의 나무 기둥이 그 결계의 주축인 모양이다.
무덤 앞에 놓인 부러진 검이 시야에 들어온다. 익숙한 외형에 데온은 조용히 그 앞에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크루엘의… 검, 이네.’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이 끝나던 날,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검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다시 그때의 처절했던 상황에 눈앞에 떠올라 데온은 이가 으스러지도록 턱에 힘을 줬다.
‘아직은 안 돼.’
지금은 감정에 취할 때가 아니다. 억지로 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비석이었다.
“……이 비석은 왜 비어 있는 겁니까?”
세워져 있으나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
나무 상자를 옆에 내려놓고 매끈한 비석을 손으로 훑었다. 등 뒤에서 답이 들려왔다.
“이 늙은이에겐 그것을 새길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아아.”
이제야 알겠다.
줄곧 이해할 수 없던 의문이 풀렸다. 데온은 비석에서 손을 떼고 레멤베르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 눈동자가 선명한 감정을 담고 일렁였다.
“당신은 내게 이 무덤의 위치를 알려 줄 날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래서 아무도 없는 저택에 홀로 남아 있던 거였어.
이곳에 오는 내내 궁금했다. 엘피디우스를 만나 용병까지 지원한 탓에 한껏 위험해진 상황에서 진즉 떠났어야 할 저택에 왜 머물고 있던 것인지. 내가 저택에 오리란 걸 몰랐을 리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왜 굳이…?”
그의 입장에서 크루엘은 생판 남일 텐데.
의문 가득한 어린 눈빛을 향해 레멤베르가 빙긋 웃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모른 척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 이상의 방해가 없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에스페라네스만큼은 건들지 않겠습니다. 내 형은….”
뜬금없는 발언이었으나 감사 인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아는 레멤베르는 되묻는 대신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이어서 사무치는 슬픔이 녹아 스민,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짓씹듯 흘러나왔다.
“저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으니까요. 이 정도의 감사 인사는 해야 수지가 맞을 테죠.”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었군요.”
단순히 ‘목숨’만이 아니다. 그 뜻을 읽은 레멤베르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데온 하르트의 목소리에 ‘나 따위를 위해’, ‘내가 뭐라고’ 등의 자기 비하적이고 스스로를 혐오하는 느낌이 강하게 담겨 있었으나 모른 척 넘어갔다.
“하면 비석에는 무슨 말을 새기실 건지요.”
“……자격이라 하셨죠.”
“네.”
데온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내게 이 비석을 채울 자격이 있을까요.”
“비석의 주인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 대상이 아니면 그 누가 비석을 채우겠습니까.”
“…….”
대답은 없었다.
데온은 고개를 돌려 무덤을 보았다. 손을 뻗어 눈앞의 관리가 잘된 잔디를 가볍게 쓸며 나직이 말했다.
“잔디도… 레멤베르가 관리했습니까?”
“네.”
“……이미 대가를 확언했으니 더 이상의 감사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감사와 별개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저건 왜 정리하지 않은 겁니까?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무덤 위, 정중앙에 핀 꽃 한 송이.
……내 방에 있는 꽃과 같은 종류다. 인간계의 것임에도 생생하고 시들고의 기준을 통 알 수 없던 바로 그 기묘한 꽃.
‘꽃이랑은 연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 자주 접하게 되는군.’
그것도 한 가지 종류만. 데온이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