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08
208. Noli metuere(4)
어리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나이와 무지를 핑계로 용서가 되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저의 경우는 후자였다.
철저한 죄인인 나로서는 너의 바람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 그래서 감사한 것이다. 네가 생을 바랐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며 쓰게 웃었다. 나는 네가 바란 대로 후회 없는 삶을 살 거야. 그러니까 형.
“난 괜찮으니까.”
내가 찾아가는 그 날까지.
“좋은 꿈 꿔.”
이만 쉬어.
악몽도 저주도 막아 줄 필요 없다. 나는 성인이고 어른이다. 아니, 아직 ‘어른’이라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상황까지 접어든 이상 아이처럼 책임을 회피하며 버겁다고 칭얼거릴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오롯한 내 몫이니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릴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환각에 의한 것일까, 형에게서 나는 것일까.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 더 머리를 쓸어 주다가 느리게 손을 거뒀다.
레멤베르가 눈치껏 다가와 관 뚜껑을 덮었다.
“무덤은 북부식으로 만들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비석에 글을 새기다 말고 온 것이다. 마저 글을 새기기 위해 그대로 돌아선 데온이 눈에 들어온 광경에 멈칫했다.
사방이 붉다. 어쩐지 피비린내가 지독해졌다 싶더니, 이래서였던 모양이다.
‘……크루엘을 대상으로 한 내 죄책감의 크기는 이 정도였구나.’
세상이 핏물로 뒤덮였다.
수위는 아직 신발 밑창에서 찰박이는 정도지만…….
시험 삼아 근처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에 맞춰 수위가 훅 높아지며 신발 밑창까지 따라온다. 바닥에 내려서자 그에 맞춰 다시 낮아졌다.
신기하네. 푸스스 웃은 데온이 허리를 숙여 핏물에 잠겨 있던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물기라고는 전혀 없는 건조한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다시 비석에 다가가 글자를 신중히 새기기 시작했다. 그리 긴 문장이 아니었던 데다 확신을 얻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고 완성할 수 있었다.
형식 따윈 내팽개친 채 그저 그의 전언에 마음을 담아 보내는 화답.
[Noli metuere, una tecum bona mala tolerabimus.]걱정 말아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당신과 함께 견딜 테니.
손끝으로 괜찮게 새겨진 음각을 살짝 쓸었다. 이 문장과 뜻이 맞을 것이다. 아니, 맞다.
어릴 적의 기억이지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형이 이 부분까지 읊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고, 그 뒤로 몇 문장 더 읽은 형이 선잠이 든 나를 직접 안아 들고 옮겼으니까.
잠결이라 꿈인 줄 알았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완성하셨습니까?”
“……네.”
“무덤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가시렵니까, 바로 가시렵니까?”
바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레멤베르의 물음에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린 데온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찰박이는 핏물과 더 짙어진 혈향이 거슬리지만 실제로 바지는 젖지 않았으니 괜찮다.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느낀 척,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아 좀 오래 머물다 가려 하는데, 저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늙은이와의 대화가 무엇이 재밌다고 그러시는지.”
“세월에 젊음을 내주고 혜안을 얻은 노인과의 대화가 재미없을 리가요. 게다가 레멤베르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잖습니까.”
마왕은 에스페라네스가 제국에서 용병을 다시 거둬 가는 것을 조건으로 크루엘의 머리에 부패 방지 마법을 걸어 주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마법은 취소되겠지.
‘정확하게 ‘머리’에 걸어 준 건지, 머리가 담긴 ‘나무 상자’에 걸어 준 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곳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에 놓인 나무 막대기와 그 아래에 붙어 있는 부적을 보았을 때, 레멤베르가 설치한 부패 속도를 늦춰 주는 주술은 지정형이 아닌 범위형이다. 크루엘의 육신이 온전해진 이상 머리 또한 그 범위에 들어갈 터.
‘머리’에 마법이 걸려 있든 ‘나무 상자’에 마법이 걸려 있든, 어차피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부탁으로 레멤베르에게 내가 마왕성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부패 속도를 늦추는 부적을 떼어 달라 말할 생각이었다.
‘나무 상자’에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라면 시간의 흐름을 막던 것이 사라짐과 동시에 크루엘의 육신은 머리와 몸 구분 없이 고루 자연의 흐름에 맞춰 흘러가겠지. ‘머리’에 마법이 걸려 있다 해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마왕마저 시간을 고정해 두었던 마법을 거둘 테니 마찬가지로 온전한 크루엘의 육신은 더 이상 지상에 강제로 붙잡혀 있지 않고 자연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영혼 또한 안식을 취할 수 있을 테지만.
‘기왕 취소될 것이라면….’
좀 더 마왕의 마력을 깎아 먹은 다음에 취소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부패 방지 마법은 꾸준히 시전자의 마력을 가져간다고 했다. 빌어먹을 마왕의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소모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시간을 끌다 돌아가는 편이 좋겠지.
이 순간까지도 계산을 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지만 무를 생각은 없다. 가만히 입술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삽질을 하던 레멤베르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치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대놓고 비밀을 캐내겠노라 선언하시는군요.”
“마지막이잖습니까.”
“‘마지막’이란 참 좋은 핑계지요.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
“하지만 죽음으로써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찌 마지막을 확언하십니까. 세상사는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대로 무덤만 완성되면 헤어지는 겁니까?”
실망한 척 어깨를 늘어뜨렸다. 허허, 곤란한 듯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를 먹으면 물러진다더니, 저도 확실히 늙긴 한 모양입니다.”
그놈의 정이 무어라고.
긍정의 의미를 담은 혼잣말에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한때 집사였던 노인이 은청색 눈을 온화하게 빛내며 저를 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반색하듯 데온의 안색이 화악 밝아진다. 노인은 그저 웃었다.
레멤베르는 제가 놀릴 때면 화드득 반응하던 어린 영웅을 기억한다.
보약이 써서 먹기 싫다며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애쓰던 모습을 기억하고, 사탕을 입에 넣어 주면 짐짓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은근히 표정이 풀어지던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을 기억하고 있다.
동시에 그가 걸어온 기구한 삶을 알고 있기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역시 나도 은퇴할 때가 다 된 모양이야.
자조적인 레멤베르의 속을 알 턱이 없는 데온이 환히 웃으며 제 옆자리를 탁탁 쳤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서 대화하죠. 무덤은 레멤베르가 데려온 사람에게 맡기고요.”
“……알고 계셨습니까?”
“네. 아마 이전의 남부식 무덤도 그 사람이 만들었겠죠. 귀한 신분의 노인이 직접 삽질을 할 리 없잖습니까.”
“…….”
눈을 가늘게 뜨고 데온을 보던 레멤베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디선가 검은 옷차림의 사내가 나타나 삽을 건네받는다. 레멤베르는 잘 부탁한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고 데온의 옆에 앉았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는지요?”
“질문은 제가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무엇이 궁금하냐 물어 놓고선.”
“그건 그렇군요. 그보다 짓궂으십니다. 알고 계셨으면 진작 말씀해 주실 것이지, 노인이 직접 삽질을 하는 걸 그냥 두고 보시기나 하고요.”
“숨긴 레멤베르의 잘못이죠. 게다가 레멤베르는 노인이라기엔 너무 건강하잖습니까.”
그 정도로는 몸에 무리도 안 갔을 거면서.
두 무릎을 끌어안은 데온이 제 팔에 뺨을 기대며 샐쭉 웃는다. 레멤베르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질문을 받기 전에 언제까지 머무를 생각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3주 정도 있다가 갈 생각입니다. 당연히 레멤베르와 함께요.”
“허.”
“설마 이 정도 고집도 받아 주지 않을 건 아니겠죠.”
“……저택의 방을 다시 점검해야겠군요.”
뻔뻔한 발언이었지만 뭐 어쩌겠나. 어린 영웅의 집사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 것을.
먼저 감정을 줘 버린 쪽이 지는 것은 당연했다.
허락의 의미를 읽은 데온이 곱게 눈을 접었다.
“그럼 이제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며 시간을 끌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셨을 테니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눠 볼까요.”
“이런, 그 또한 알고 계셨습니까. 못 본 새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제자리에 멈춰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부탁한 것은 질의응답이 아닌 대화입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레멤베르는 대답 대신 웃었다. 3주간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겠군.
“대화 좋지요.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줄곧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레멤베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이렇게 질문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놓치면 멍청이지. 데온은 적당히 내리쬐는 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온화한 분위기에 잔잔한 목소리가 얹어졌다.
“전 황제인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레멤베르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까?”
에도아르도 황제는 단순히 제게 저택만을 하사하지 않았다. 저택 관리 및 편의를 위한 사용인들도 보내 주었는데, 레멤베르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황제는 과연 그의 정체를 알고 보냈는지, 만약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보낸 건지.
선명한 의문을 담은 붉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답을 재촉한다. 레멤베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질의응답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대화의 주제가 꽤 날카롭군요.”
“이번에도 말을 돌리시려고요?”
“아니요.”
은청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적어도 지금의 하르트 님보다는 몰랐을 겁니다. 첫인상은 호위를 하나 달고 있는 수상한 에스페라네스인이었을 테고, 이후 조사를 위해 고서까지 뒤져 보았다면 중개인이라는 것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겠지요.”
“중개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황제는 왜 용병 요청을… 아니 그전에, 그 황제가 수상한 자에게 제 곁을 허락할 리 없었을 텐데요.”
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자신의 검들을, 즉 제 파벌의 인재들을 아꼈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그의 애검이었다. 그러니 그 황제가 위험 요소를 내 휴식처가 될 공간에 배치했을 리 없는데.
“에스페라네스의 철저한 중립은 아주 유명하고, 에스페라네스인들이 제 나라를 아낀다는 것 또한 알 사람은 아는 사실이니까요. 괜히 제국의 황제가 아끼는 영웅을 건드려 제 나라를 위험하게 만들 에스페라네스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전투 민족이라는 점은 오히려 가산점 요소가 되었겠지요.”
음, ‘사람’인 이상 예외가 없을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건지.
의문을 눈치챈 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에스페라네스는 아주 폐쇄적인 왕국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들어가는 것도 나가는 것도 아주 어렵다는 뜻이지요. 그런 왕국이 과연 아무나 내보내겠습니까. 그것도 중개인을요.”
“그건 그렇군요.”
“그리고 왜 선황이 용병 요청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답하자면, 실제로 용병을 지원한 사례가 아주 적어 확신이 없었을 테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상한 어투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속삭이듯 말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동아줄을 찾으려 들 리 없지 않겠습니까.”
“…….”
***
3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크루엘의 무덤은 데온과 레멤베르가 ‘대화’를 시작한 당일에 완성되었다.
그날, 완성된 무덤 앞에서 괜히 비석을 쓸어 본 데온은 자신의 것이었던 저택에 돌아와 레멤베르와 함께 평화로이 지냈다. 서류에 치이지 않는다는 것과 틈날 때마다 크루엘의 무덤에 가 본다는 점, 그리고 레멤베르 외의 다른 사람이 없다는 점 외에는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간혹 레멤베르가 마왕군에 관한 소식을 들고 왔으나 이기고 있다는 소식은 물론, 지고 있다는 소식에도 데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법 금지령이 풀린 마족들이 대패할 리는 없으니까.’
애초에 ‘마족’이나 ‘마왕군’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 계획을 위해서는 마족들의 수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는 편이 좋다. 인간계를 온전히 짓밟을 만큼만 남고 다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어디 군단장은 안 죽으려나. 걔네가 제일 큰 문제인데.
이후 마왕군이 밀리던 전황이 군단장이 도착하며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데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군단장이 문제야.
“이제 가시려는 겁니까.”
변함없이 차분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