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09
209. Noli metuere(5)
살짝 고개를 돌려 레멤베르를 본 데온이 씩 웃었다.
“역시 눈치가 좋으시군요.”
“그동안 혼자 가시던 무덤에 저를 이리 끌고 오셨으니 알 수밖에요.”
“…….”
그의 말대로다. 이제 마계에 돌아가려 한다.
인간계에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까. 마왕과 약속한 기한이 다 되어 간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마왕성에 돌아가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았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마왕의 입장에서는 많이도 참아 주었을 것이다.
그가 폭발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만큼, 괜한 변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인내심이 완전히 닳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옳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비석을 어루만지던 데온이 나직이 레멤베르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대략 일주일 뒤에, 부패 방지 기능이 담긴 저 부적을… 떼어 내 주셨으면 합니다.”
“어렵지 않군요. 원래는 곧장 이곳을 뜰 생각이었습니다만, 일주일 정도는 더 머물러도 문제없기도 하고, 그간의 정도 있으니… 그리하겠습니다.”
“…….”
실로 꿈같은 일상이었다. 데온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햇빛 아래에서 즐기는 평화로운 일상이라니.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선명하게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바닥에서 찰랑이는 핏물이 저를 현실로 끄집어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꿈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내 죄가 여기에 있는데 현실 도피라니, 말도 안 되지.’
외면은 하지 않는다.
비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멤베르.”
“네.”
“전 레멤베르가 베푼 은혜를 확실히 갚고 싶습니다. 그러니….”
“에스페라네스는 이미 맺은 계약에 따른 지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전쟁에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레멤베르는 곧장 답했다.
그간의 대화가 둘 사이의 벽을 한 겹 무너뜨린 건지, 혹은 정말 마지막이라서 긴장이 풀어지기라도 한 건지 언제나 의뭉스러운 빛을 띠고 있던 은청색 눈이 노골적으로 단호한 기색을 담고 있었다. 데온은 그 속에서 어렴풋이 내비친 ‘동정심’을 발견했다.
‘……동정심?’
삽시간에 숨어들었지만 분명 동정심이었다.
저 말을 하는데 왜 동정심을 느낀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놓고 드러난 데온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속내를 읽은 레멤베르는 해명하거나 설명을 덧대는 대신 그저 웃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
확실히 감췄어야 했거늘, 실수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이었건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다니.
3주 내내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붙어 지냈던 데다 이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경계심이 풀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만, 그래도 이건 들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애초에 그 잠깐의 틈을 잡아낼 줄 누가 알았으랴.
데온 하르트는 레멤베르가 보인 동정이 저 발언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레멤베르는 그저 언제나 감춰왔던 기저에 깔려 있던 감정을 무심코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지금 그의 의문에 답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 한 사람과의 인연이 상대의 동정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기분이 나쁠 테니까.
만약 데온 하르트가 이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상황에 레멤베르가 재차 입을 굳게 다문 채 미소 지었다.
……저택에서 머무는 3주 동안 데온 하르트와 나눈 대화 중 왜 하필 제 저택에 온 건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때 레멤베르는 이렇게 답했다.
[우연이었습니다.] [……우연이라고요?] [네. 그저 우연히 당신이 눈에 들어왔고, 우연히 황제가 8년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데온 하르트가 머물 저택의 집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지원한 자리에서 우연히 황제의 눈에 들었지요.]우연이 모이고 뭉쳐 인연이 되었다.
8년 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한 영웅 중에서도 유독 젊은 영웅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영웅’이란 무거운 칭호다. 특히 전쟁과 관련된 ‘영웅’이란 칭호는 결국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가’에 의해 따라붙는다.
저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짊어져야 했을까. 감탄보다는 안쓰러움이 앞섰다.
그 이후, 보다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에 집사가 되었으나…. 험한 길을 걸어와 잔뜩 지쳤으며, 앞으로도 가시밭길을 걷게 될 어린 영웅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살피고 싶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으니 결국 그들의 연은 ‘동정심’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듯 ‘영웅’일 때도 이 무른 노인은 데온 하르트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저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는 비렁뱅이를 향한 안쓰러움에 빗댈 만큼 얄팍한 감정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명백한 동정이었다.
하면 시간이 흘러 정마저 들어 버린 지금은 어떻겠는가.
“마왕 하나만 있어도 나서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용사마저 적으로 돌려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멸망뿐일 테니까요. 제가 간섭하려 해도 위에서 막을 겁니다.”
지금의 당신은 ‘영웅’을 넘어서 ‘용사’가 되었는데.
우연이 모이고 뭉쳐 운명이 되었다.
그 어느 왕국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에스페라네스에는 고서가 많다. 고위 귀족의 특혜로 어릴 적 많은 고서를 섭렵한 레멤베르는 연륜으로 인한 혜안마저 얻은 지금, 세계의 의도를 깨달았다.
하여, 지금도 데온 하르트를 동정한다.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언뜻 내비친 ‘동정심’에 관한 설명이 아니다. 그건 없던 일로 넘어가려는 듯, 설명이나 해명 대신 앞선 발언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나왔으나 그럼에도 레멤베르의 말은 의외여서, 데온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소 놀란 듯 눈이 조금 커졌다.
“……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군요?”
“숨기고 싶으셨다면 외모를 가리셨어야지요.”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알고 있었으면서 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레멤베르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데온 하르트는 명백한 죄인이다. 과거가 어떻고 어떠한 사연이 있었건, 현실을 돌아보았을 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애초에 부정할 생각도 없고.
그럼에도 정에 약한 노인인 레멤베르는 데온 하르트에게 그가 지은 죄와 별개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렇게 아닌 척 몰래 자잘한 도움을 건넬 정도였으니 그 크기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터.
“아무튼 불안해하시는 것 같으니 다시 한번 확답을 드리지요. 에스페라네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대놓고 도울 수는 없다. 데온 하르트를 돕는다는 것은 마왕군의 편을 든다는 것. 결국 인류를 배신한다는 의미이므로, 그런 선택을 내린다면 왕국은 휘말리기 전에 이 늙은이를 버릴 것이다.
적대할 수도 없다. 이 또한 왕국이 동의하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눈앞의 위태로운 청년이 이미 노인의 마음에 들어와 버렸기에.
나이 든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레멤베르 역시 용기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으며, 안정을 추구한다. 그가 내릴 선택이야 뻔했다.
‘방관.’
동정하는 것과 직접 움직이는 것은 별개다.
하물며 세계가 직접 찍은 상대인데, 한낱 미물이 나서서 무얼 하겠나.
어차피 에스페라네스 왕국 자체가 중립과 방관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런 왕국의 사람답게 방관의 위치에서 데온 하르트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크루엘 하르트의 시신을 수습하고 데온 하르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 어린 행동이었다.
“그럼 이제 뭘 하실 겁니까?”
데온의 물음에 레멤베르가 고개를 들었다.
이후의 계획이라. 딱히 정해 둔 것은 없었다만…….
“……역사서를 편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군요.”
“역사서… 말입니까?”
“네. 에스페라네스를 제외한 모든 왕국이 사라질 예정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마왕군이 인간계에 자리 잡든, 실패하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 물러가든 당연히 아비규환이 되겠지요. 이 시대의 기록을 남길 여유도 없을 테고, 남긴다고 하여도 전란에 휩싸여 금세 소실될 테니 이 늙은이가 한번 써 보려 합니다.”
“……멋지네요.”
물론 이후에도 에스페라네스가 무사해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총지휘관인 데온 본인이 에스페라네스를 공격하지 않겠노라 장담했지만, 인간계를 모두 짓밟은 마왕군이 유일하게 남은 왕국을 노리지 않으리란 장담은 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둘 다 알고 있음에도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조금 굳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데온이 장난스레 웃었다.
“주인공은 저로 부탁합니다.”
“……역사에 주인공이 따로 있을 리가요.”
“정사(正史)는 따로 두고 소설 형식으로 한 편 써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패사(稗史)…라고 하던가요.”
“혹은 연의(演義)가 될 수도 있겠군요.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이거 죽기 전에 완성할 수나 있을는지…….”
장난을 기꺼이 받아 준 레멤베르의 엄살에 분위기가 풀렸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레멤베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데온이 다시 한번 비석을 돌아보았다. 상당히 그럴싸한 필체로 새겨진 음각이 눈에 들어왔다.
[Noli metuere, una tecum bona mala tolerabimus.]걱정 말아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당신과 함께 견딜 테니.
언제 다시 보러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영영 보러 오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미리 인사해 두려 한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큼, 데온은 세상 그 무엇도 걱정 없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형.’
***
데온 하르트가 마왕성에 귀환했다.
마왕과 약속한 한 달이 되기 바로 전의 귀환이었다. 짐이랄 것도 없던 탓에 본인의 방에 들를 것도 없이 곧장 마왕의 집무실로 직행하려던 데온은 마중 나온 에드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에드.”
“네, 데온 님.”
“드벨라니아에게 전해. 크루엘 하르트의 시신을 찾는 거, 취소한다고.”
“예…?”
그토록 찾고자 애쓰던 형의 시신이다. 간신히 머리 하나 찾았을 때는 부패 방지 마법까지 걸어 둔 상태로 잘 때도 근처에 두고 자지 않았던가. 누가 마법을 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전혀 예상치 못한 명령에 흠칫한 에드가 고개를 들고 데온을 보았다. 굳이 살펴볼 것도 없이, 나가기 전과 달라진 점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없다.’
분명 인간계에 갈 때 머리가 든 상자를 들고 나가셨던 것 같은데, 없다. 아무리 봐도 빈손이다.
잃어버리셨나? 그랬다면 수색 취소 명령이 아닌 다른 종류의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진즉에 난리가 났겠지. 그럼 시신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머리만이라도 보내 주기로 하셨나? 아니, 어쩌면 인간계에서 나머지 시신을 찾아 온전한 장례식을 치르고 오신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인간계에 오래 머무셨으니 아마 후자일 터.
이 모든 생각은 삽시간에 떠올랐다가 정리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정돈한 에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에드를 지나친 데온이 거침없이 마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서두르진 않지만, 망설이지도 않는다. 익숙해진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도착한 문 앞에서 그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노크를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똑똑.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던 듯 책상 앞에 앉은 마왕이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저를 본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역안이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휘어졌다.
“많이 늦었네.”
“…….”
“돌아올 때 결과를 들고 올 거고, 실적은 한 달 이내에 나올 거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 곧 한 달이네? 에스페라네스에 관한 새로운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실적이랄 것은 없는 것 같고.”
“…….”
“시간이 부족했어?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더 줄 의향도 있는데, 어때?”
결과는?
두 손을 반쯤 깍지 끼고 그 위에 턱을 얹은 마왕이 싱긋 웃는다. 그에 화답하듯 데온도 웃었다.
“실패했습니다.”
순간이지만 마왕의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주 뻔뻔하고도 당당한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