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13
213. 증오는 산불과도 같아서(4)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
회의장은 무기 반입 금지라 단검도 없고 상대가 한 종족의 수장이라는 점도 걸리지만, 제 목숨을 노리는 이를 그냥 둘 정도로 착한 성격이 못되기에 데온은 기꺼이 상대할 생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잠깐!”
“이거 놔!”
“진정하세요!”
“왜 막는 건데!”
뒤이어 들어온 요정왕과 인어족의 수장이 다급히 그녀를 막는다. 흉흉하게 날이 선 손톱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지금까지 숨긴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방해하지 마! 더 늦기 전에 제거해야 해! 너희도 다 알면서─”
저를 막아서는 이들의 행태에 분노한 듯 뱀파이어 수장이 요정왕의 얼굴을 할퀴었다.
말이 할퀸거지, 요정왕이 재빨리 고개를 뒤로 빼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굴이 잘렸으리라. 그럼 필시 죽었겠지.
근처에 앉아있던 누군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티도 나지 않을 만큼 미미한 움직임이었으나 가까이에 있었던 데다 용사인 데온은 알 수 있었다.
1군단장 제이카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요정왕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겐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
요정왕이 손을 들어 얼굴의 상처를 훑는다. 손가락에 묻어나온 피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박하긴.”
“뭐라고?!”
“천박하다고 했다. 식성과 체질이 천하면 행동이라도 고상해야 하지 않나? 몇 번이고 말렸음에도 한 종족의 수장이라는 자가 이리 앞뒤 분간 못하고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는데, 이게 천박하지 않으면 뭐지?”
“……너, 죽을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수장들 간의 의미 없는 몸싸움이 이어졌다. 인어족 수장의 그만하라는 외침은 먹히지 않았다.
남의 회의장에서 이게 무슨 개짓거리람. 약간의 긴장만 남긴 채 주먹에 힘을 풀고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언제 들어온 건지 모를 드워프 추장이 바로 옆에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아아! 아쉬웠네! 거기서 좀 더 오른쪽으로 휘둘렀어야지! 그래! 그렇게! 오, 역시 요정족이야. 날렵하군!”
“…….”
“아, 여기 혹시 다과 같은 건 없는 겐가?”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아쉽군. ……어어! 저건 제대로 들어갔는데! 괜찮은가?!”
……개판이네.
잘은 몰라도 내가 이 소란의 시발점이 된 것 같은데.
뭐… 잘못은 대뜸 쳐들어 와 죽이려고 든 저쪽이 먼저 했으니까. 난 잘못한 거 없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괜히 지치는 기분이라 데온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행히도 소란은 길어지지 않았다.
피를 퉷- 뱉은 뱀파이어 수장이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며 막 달려들던 때였다.
“……이 정도 참아줬으면 충분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 분수도 모르고 날뛸 생각이지?”
위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저마다 일어선 채 경계하던 군단장들이 급히 주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소란의 주동자들이 압박감에 못 이겨 털썩 무릎을 꿇는다.
표정이 사라진 마왕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종족의 수장이라는 작자들이 인간 하나 죽이겠다고 타 종족의 중심부에 쳐들어 와 난리나 치고 말이야.”
“…….”
몇몇은 억울한 표정이네. 각 수장의 표정을 살피던 데온이 내심 어깨를 으쓱했다.
뭐, 말리려고 따라온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그런데 요정왕 그쪽은 같이 싸웠잖아. 왜 억울한 표정이야.’
난리 친 게 맞으니 할 말이 없어야지. 이 중에서 그나마 면죄부를 줄 만한 쪽은 인어족의 수장밖에 없다.
금방이라도 성에가 낄 듯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게 무슨 무례일까.”
마왕은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어디까지 할지 두고 보려 했지만 안 되겠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러라고 너희에게 중앙 정원의 출입을 허가한 것이 아닌데 말이지.”
어떻게 저들이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마왕이 허가한 것이었으므로.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모든 종족의 수장들이 모여야 할 때가 있다. 모든 종족의 수장이라고 해봤자 정치적인 대화나 다툼이 가능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종족들만 인정하다 보니 고작 다섯밖에 안 되지만.
세력을 논하지 않은 것은 당연해서다. ‘개인’은 종족으로 치지 않고, ‘단체’는 순수한 무력보다 그들이 가진 지능에 따라 세력의 크기가 정해진다. 고로, 지능이 높은 그들이 곧 심연에서 가장 강한 종족들일지니─
그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신히 안정된 판도가 흔들리리라.
심연은 너무 오랜 시간 혼돈인 상태로 존재했다. 힘겹게 찾은 평화를 잃고 싶지 않기에 지능이 높은 각 종족의 수장들은 자신들 간의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하기로 협의했고, 그리하여 나온 것이 수장들에게 한하여 허용된 ‘출입권’이었다.
각 종족의 영역 중에서도 수장이 머무르는 중심지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
이는 모두가 쉽게 모일 수 있는 이점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목숨줄을 틀어쥐고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이 되기도 한다.
오직 ‘수장’에 한해서만 허용된 데다 도착 지점도 고정되어 있고, 이를 이용해 방문하게 되면 즉시 해당 영역의 주인에게 신호가 가도록 설계되어 있다지만 어쨌든 중심지니까. 심장을 내어준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처음엔 새로운 방식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동의했던 마왕도 시간이 흘러 타 종족들의 수장이 몇 차례 바뀌자 슬슬 그만두려 했다. 그는 다른 세 종족을 전부 적으로 돌려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시간이 흘러 세대가 바뀌며 어린 것들이 수장이랍시고 자리에 앉았는데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일종의 자비였다.
무료하던 차에 다른 새 흥밋거리가 생겼기에. 그들은 데온 하르트에게 감사해야 한다.
……한데.
그 감사해야 하는 대상을 죽이려 들면 어떡하나.
“이 상황을 내가 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할 거야.”
말하면 말할수록 장내의 기온이 낮아진다.
분위기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마왕의 기분은 상당히 안 좋은 상태다. 아니, 직설적으로 말해서, 조금… 화가 났다.
제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회의장까지 쳐들어 와 지켜보는 앞에서 핵심 전력을 죽이려 들까. 그것도 그가 각별히 아끼는 존재인데.
‘……그냥 죽일까.’
시선에 살기가 실린다. 마왕이 손가락을 까닥하려던 찰나, 불길함을 느낀 듯 흠칫한 뱀파이어 수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마왕의 차가운 분노 덕에 정신을 차린 듯 조금은 침착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내가 조금 위험한 정보를 들어서 말이야.”
“…….”
“마족의 멸족을 막기 위해서라도 잠시 협조해주었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데온 하르트를 힐긋 보는 것이 목적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멸족’. 예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단어의 등장에 군단장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성급히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 발언권이 제게 있음을 느낀 뱀파이어 수장이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고 이렇게 온 건 사과할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감정적으로 흥분했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마왕군이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인간계 정복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 중심에 한 인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용사라는 것… 정도.”
“그걸 이제 알았다고? 소식이 상당히 느리군.”
“원래 인간계에 흥미가 없기도 하고… 사정이 있었어.”
붉은 시선이 요정왕과 인어족 수장을 스쳤다.
잠깐이지만 눈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둘이 눈과 귀를 가리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마왕이 태연히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인간계에 흥미가 없다면 그냥 계속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이 난리지?”
멸족은 또 무슨 말이고.
아무리 흥분했어도 함부로 입에 올릴 만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의심 어린 마왕의 시선 아래, 뱀파이어 수장이 답했다.
“이 모든 게 ‘한 인간’ 때문에 벌어졌으니까.”
새빨간 눈동자가 데온 하르트를 향한다. 데온은 그 눈을 마주 보며 대화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기묘한 감상을 느꼈다.
이래서 제국에 있을 때 시답잖은 ‘데온 하르트 뱀파이어설’ 따위가 돌았던 거구나. 확실히 내 눈과 색이 비슷하다.
침묵하던 마왕이 손을 내저었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명백한 축객령이다.
조금 전까지 험악했던 상황 탓에 줄곧 긴장하고 있던 군단장들이 쉬이 자리를 비키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이들의 망설임은 1군단장 제이카르가 먼저 움직임을 보이며 깨졌다.
힐긋 마왕과 요정왕, 데온에게 순차적으로 시선을 둔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연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다른 군단장들도 우르르 그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남기고 나간 단을 마지막으로, 회의장에는 마왕을 포함한 각 종족의 수장들과 데온만이 남았다.
마왕이 다시 뱀파이어 수장에게 시선을 두었다.
“한 인간 때문이라고?”
“그래. 이쪽으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지만 유추는 해볼 수 있지. 얼마 전에 저 인간이 반죽음 상태로 마왕성에 실려 왔다는 건 들었어. 내게 소식이 닿을 정도면 꽤 큰 소란이라는 의미일 테고, 덕분에 그만큼 마왕 네가 저 인간을 아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벌어졌어. 그렇다면 이유는 뻔하잖아? 그쪽이 아낀다는 인간의 영향이 적지 않게 있었겠지. 그래도 솔직히 난 그쪽이 적당히 시늉만 하다가 그만둘 줄 알았어. 내 기억에서는 늘 그랬으니까. 그래서 신경을 껐던 건데….”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데온 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마왕의 행동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인간계에 경각심을 주는 선에서 멈출 줄 알았다. 인간들이 마왕을 기억하고 경계하며, 용사가 탄생하는 즉시 마왕 토벌을 가게 등을 떠밀도록.
거기에 장난감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함이라는 점이 추가되었을 뿐,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너무 어려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시절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그 이상 나아간 적이 없었으니까. 뱀파이어 수장은 너무 쉽게 긴장을 놓아 버렸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왕이 직접적으로 원해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마족들의 여론이 그쪽이었던 것도 아니야. 고작 한 인간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이게 잘못된 것이 아니면 뭐겠어.”
“마족들은 언제나 태양을 탐했다만.”
“그 열망이 한 인간으로 인해 갑자기 강해졌다면 문제가 되지. 게다가 그 인간 ‘용사’라며?”
“그래.”
“이해할 수가 없네.”
숙적을 휘하에 두다니. 폭탄을 끌어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인어족 수장과 요정족 수장이 그를 감싸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건만. 정말 저 인간에게 무언가 있기라도 한 건지.
몸을 돌린 뱀파이어 수장이 데온에게 다가간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눈을 살짝 키운 데온의 턱을 잡아 올리고 천천히 살핀다.
모름지기 눈은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동족의 것과 닮았지만 엄연히 다른 붉은 눈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불꽃이었다.
“예쁜 눈이구나.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아.”
몸을 웅크리고 있어 작아 보이지만 무엇보다 강하게 타오르는 불꽃.
“역시 넌 위험인물이 맞아.”
“…….”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들일 인물이다.
역시 이 인간을 감싸는 수장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리 살펴봐도 죽여야 하는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세계의 흐름을 보고 미래를 보는 두 수장인 만큼 이렇게까지 감싸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현재를 보고 분석하는 그녀로서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나마 인간계가 무료한 마왕의 심심풀이용 장난감이 되어서 심연이 평화로울 수 있는 건데, 마왕군이 인간계를 집어삼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력마저 커져 상대하기 힘들 텐데 말이지.’
하지만 이건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유이니 제쳐두고.
요정왕과 인어족 수장이 이 인간을 감싼다 한들 마왕이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끝이다. 마왕을 설득하기 위한 말을 머릿속에서 고른 뱀파이어 수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인간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으리란 장담을 할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용사잖아. 마왕의 숙적이라고.”
사실 데온 하르트라는 인간을 죽이려는 이유에 이것 역시 포함된다.
그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마왕이 죽을 것이다. 덩달아 마족의 세력이 약해지겠지.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이곳에 들어올 테고, 그 결과 우리 종족 또한 평화로운 삶과 거리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생소한 종족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리 없으니까.
“이 녀석이 등을 돌리는 순간이 마족들에겐 재앙이 닥치는 날이 될 거란 말이지.”
“그쯤 하는 게….”
“내가 왜? 맞는 말이잖아.”
“…….”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무작정 말리면 내가 따라줄 줄 알았어?”
요정왕이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갔으니 아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어족 수장과 눈빛이 오갔다.
마왕과 데온 하르트가 보는 앞인 만큼 할 수 있는 말이 극히 제한되어 있어 그들이 고르고 골라 꺼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태양 아래서 살고 싶지 않나?”
“……뭐?”
귀를 의심하듯 뱀파이어 수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잠시, 이마를 짚은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이어서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허탈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결국 그게 이유였다니…!”
그놈의 해가 뭐라고.
언제나 인간계를 탐내던 마족들도 결국 저 이유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마왕의 의중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인어족 수장이 저를 말린 것 또한 이 때문이었겠지.
고작, 차가운 달빛이 아닌 밝고 따스한 햇볕 아래서 살고 싶어서.
“이해는 안 되지만 일단 이유는 알겠어.”
요정왕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려서 뱀파이어 수장은 엄지로 터진 입가를 매만지며 샐쭉 웃었다. 조금 전 요정왕과 싸우다 생긴 상처였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우리 종족은 해와 사이가 안 좋아서.”
“……너.”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하지, 마왕? 저 인간은 위험해.”
요정왕은 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마왕을 부른 빌어먹을 뱀파이어를 노려보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셈이라고. 인간은 배신을 잘하는 종족이니 여차하면 멸족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과언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게 어때? 손을 더럽히기 싫다면 내게 넘겨도 좋고.”
내가 처리해줄게.
“……재밌네.”
줄곧 턱을 괸 채 모든 발언을 듣고 있던 마왕이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본인을 두고 별의별 말을 다 하는군. 죽여야 한다느니, 넘겨도 좋다느니.
몸은 망가져도 고칠 수 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아슬아슬한 상태인 녀석에게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더 안겨 주려고 저따위로 발언을 하나. 그러다 망가지면 어떡하려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맹랑한 뱀파이어에게 다가가며 비웃듯 말했다.
“결국 마족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갖다 붙이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 게, 저 녀석 눈이…!”
“쉬잇-.”
거기까지.
마왕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의 입을 가볍게 막고 싱긋 웃었다.
그래, 거짓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입을 함부로 놀려서야 쓰나.
‘……하.’
무언가를 느낀 듯 손바닥 아래에서 짧은 실소가 맴돈다. 슬쩍 손을 치우니 그녀가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말했다.
[알고 있었구나.]마왕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야 당연한 것을.
누구보다 오래 산 자의 혜안이 그녀의 것보다 못할 리 없다. 그러니 자만하고 함부로 입을 나불대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와 함께 그는 뱀파이어 수장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처리할 테니 넘겨도 좋다 했던가.
“넘기긴 누굴 넘겨?”
누구 마음대로.
진득하니 낮은 목소리가 경고했다.
“내 거야.”
누가 감히 내 것의 목숨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가.
죽이든 살리든, 하다못해 갖다 버려도 그건 오롯한 내 선택이어야 한다. 누가 옆에서 종용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듣자 듣자 하니 끝도 모르고 발언하는 것이, 주제넘어도 한참은 주제넘었다.
“……알았어, 알았어.”
살벌한 경고에 흠칫 몸을 떤 뱀파이어 수장이 두 손을 들고 물러섰다.
아무리 아껴봤자 인간이다. 마족들에 비하면 큰 애착이 없을 테니 손쉽게 제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내가 잘못 판단했네. 실례했어. 그냥 갈게.”
포기는 빨랐다.
마왕이 다 알고도 감싸고 있는 이상, 그녀가 데온 하르트를 죽일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분하지만 같은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마왕 간의 격차는 매우 크니까.
그러니 이쯤에서 포기하고 대비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마족이 인간계를 집어삼키든, 인간들이 심연으로 밀고 들어오든 버틸 수 있게.
‘시간도 넉넉하고.’
그렇게 판단하고 여유가 생기자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미래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지. 어떻게 되길래 요정족의 수장과 인어족의 수장이 그 인간을 감싸고 도는 건지.
태양 아래서 살고 싶지 않냐고 했지. 심연의 종족들이 인간계에 정착하는 모든 과정과 결말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뱀파이어 수장이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 요정왕이 입을 열었다.
“……그럼 얼추 정리된 것 같군.”
어찌어찌 해결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하다.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겠군. 요정왕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폐 끼치지 말고 어서 돌아가지. 오늘은 정말 실례가 많았다, 마왕.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가긴 어딜 가?”
“……?”
멋대로 쳐들어오더니, 멋대로 가려고 한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이들을 향해 마왕은 싱긋 웃었다.
“이번 일로 인한 피해 보상은 확실히 해줘야지?”
“…….”
“보상해주기 전까진 못 돌아갈 줄 알아.”
들어올 땐 마음대로일지 몰라도 나갈 땐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