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15
215. 증오는 산불과도 같아서(6)
흥미 없는데. 피곤하니까 그냥 방에 보내줬으면.
노골적으로 드러난 표정을 읽지 못했을 리 없음에도 마왕은 모른 척 천연덕스럽게 걸어가 한쪽 구석진 곳에 있던 문을 열었다.
“골라봐.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가르쳐 줄 테니.”
“…….”
활짝 열린 문과 저를 향한 미소에서 거부할 수 없음을 느낀 데온이 한숨을 삼키고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취미 만들기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본인의 일도 아닌 것을요.”
“이유는 충분히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진심이십니까?”
“물론. 그리고 본인의 일이 아니라니? 이건 엄연히 나와도 연관이 있는걸. 주요 전력의 정신이 망가져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데온은 미간을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열린 문 내부를 살폈다.
직접 확인한 방에는 별의별 악기가 존재했다.
눈에 익숙한 북부식 악기부터 낯설기 그지없는 남부식 악기까지. 그나마 익숙한 하프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던 데온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마왕의 발언에 멈칫했다.
“……마음에 드는 악기가 있으면 가르쳐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랬지.”
“그렇다는 것은… 이 방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뜻입니까?”
“당연한걸. 다루지도 못하는 악기를 어떻게 가르치겠어.”
말도 안 돼.
온 세상의 악기를 죄다 수집해놓은 듯한 방인데, 정말로 이곳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다고?
“정 못 믿겠다면 연주라도 해줄까?”
“……아뇨, 믿겠습니다. 긴 시간을 살았으니 불가능하진 않겠죠. 그래도 연주는 들어보고 싶은데….”
“뭐, 원하는 악기나 곡이라도?”
“피아노는 이미 들었으니 바이올린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 의외네.”
낯선 악기를 선택할 줄 알았나 보다. 데온은 그저 미소 지었다.
믿겠다고 하지 않았나. 인간의 기준으로는 믿기지 않지만 상대는 마왕이고 그가 고작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할 리도 없으니 믿어야지. 다시 말해, 의심하고 시험하려는 의도가 아니므로 굳이 어려운 악기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다만 곡은.
“곡도 따로 원하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뭔데?”
“제목을 모르겠네요. 인간계에 널리 알려진 민요입니다. 가사 내용이 대충 죽음이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인데, 아십니까?”
“아, ‘죽음이 남긴 조언’?”
역시 아는 모양이다. 설마하니 바로 제목이 나올 줄이야.
모르겠다고 하면 대충 불러주려 했는데. 가사를 들은 마왕의 반응이 궁금했다만, 조금 아쉽게 됐다.
내심 혀를 차는 데온을 두고 몇 번 소리를 내보며 음을 조율한 마왕이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짧은 곡이라 좋네. 어렵지도 않으니 바로 연주해줄게.”
“…….”
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 인류 최대의 범죄자에게 연주해주는 곡의 가사가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라니,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희극인지.
데온이 냉소를 짓든 말든 마왕이 자세를 잡는다. 줄 위에 활이 내려앉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잘하네.’
단순한 곡임에도 압도적인 실력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평생을 노력해도 발치에조차 닿지 못할 실력. 피아노도 그렇더니, 아무래도 단순히 모든 악기를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실력조차 수준급인 모양이다.
부르는 이 하나 없는 반주뿐이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음에 맞춰 가사가 떠오른다.
가물가물했던 부분까지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역시 이 가사가 맞는 듯싶다. 데온은 속으로 가사를 되짚었다.
옛날 어느 세상에서 죽음이 말했네.
죄를 짓지 말지어다.
사후의 혼은 네가 지은 죄의 무게에 짓눌려 부서지기 시작한단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소멸하는 것은 너무도 편한 회피이니.
죄의 규모가 클수록 빠르게 환생 절차를 밟는단다.
그리고,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닌가?’
곡이 끝나지 않는다. 마치 2절이 있다는 듯, 비슷한 음이 반복되며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래봤자 일반적인 곡에 비하면 짧게 끝나긴 했지만, 본래 알고 있던 것보다 길다는 건 확실하다.
2절이 있다는 건 뒤에 가사가 더 있다는 뜻인데…. 데온이 마왕을 빤히 쳐다봤다.
“왜?”
“……아뇨, 잘 들었습니다.”
“별말씀을.”
장난기를 담아 과장되면서도 우아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마왕이 돌아서서 악기를 정리했다.
어색한 침묵도 잠시,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아무래도 악기 연주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으니 다음번에는 다른 종류를 가르쳐 봐야겠어.”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어차피 제게는 취미를 만들 여유가….”
“있어.”
“…….”
“없으면 만들어야지. 넌 네 스스로를 과신하는 모양인데….”
저벅. 몸을 돌려 거리를 좁힌 마왕이 살짝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다.
역안이 붉은 눈을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휘어진 눈매 사이로 숨어든다. 그는 싱긋 웃으며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제아무리 육체가 뛰어나다 해도 여기가 망가지면 무용지물이 되거든. 용사라 해도 정신은 별개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
“용사가 되어 기고만장해진 것은 이해하겠는데,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지는 마. 내가 봤을 때 현재 네 정신은 썩 좋은 상태가 아니니까.”
***
드디어 마왕에게서 벗어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으나 데온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뭐라도 익히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을 듯 묘하게 집요했던 태도와 달리 마왕이 담백하게 보내주었음에도 그랬다.
‘오늘은 그냥 기분 잡치는 날인가.’
회의장 난입 사건까지 생각하면 그렇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래도 마냥 짜증을 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지속적으로 감정을 소모해봤자 손해 보는 쪽은 이쪽이기에 데온은 되도록 머리를 냉정히 식히고자 노력하며 생각했다.
‘……어서 돌아가자.’
익숙한 방, 일종의 내 영역이라 볼 수 있는 공간은 휴식의 여부와 무관하게 안정감을 준다.
그러니 일단 돌아가서 침대에 눕는 게 좋겠다. 일을 하더라도 침대에서 해야지. 단이 잔소리를 좀 하겠지만 그건 무시하면 된다.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한 끝에 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데온은 방문 앞에 서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드.”
“데온 님.”
모시러 가지 못해 죄송하다며 충실한 부관이 고개 숙여 사과한다.
고작 그게 마음에 걸려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던 건가. 물끄러미 그를 보던 데온이 문득 치미는 충동에 대뜸 입을 열었다.
에드와는 전혀 관련 없는 충동이었다.
“사과할 건 없고, 술 가져와.”
“……예?”
“아주 많이.”
“예?”
“최소 열 병 이상으로.”
“……차라리 벌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데온 님의 심기를….”
“사과할 거 없다니까.”
너 잘못한 거 없다고.
당황과 충격, 의문을 담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마음 약한 사람에겐 안쓰럽게 비칠 정도였으나 데온은 깔끔히 무시했다.
대답은 못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알아서 잘 가져오겠지. 그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눈이 없으니 ‘눈이 마주쳤다’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긴 한데.’
끠액.
거기 서서 뭐 하냐는 듯 괴식물이 작게 울었다. 데온은 언제 멍하니 있었냐는 듯 방문을 마저 닫고 안에 들어섰다. 복잡한 시선이 괴식물을 향했다.
“……잠시 잊고 있었네.”
“끠앩?”
오늘 일이 많긴 많았던 모양이야.
단에게 이 녀석을 받아오라 했었지. 직접 시켜두고선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래도 단이 알아서 시킨 대로 잘했으니 된 거지만.
뒤늦게 발을 옮겨 익숙한 위치에 놓여 있는 화분에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내내 이쪽을 향해 있던 꽃봉오리가 살짝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끠액- 하고 울음을 내뱉는다. 인사하듯 잎사귀가 흔들렸다.
데온은 흐리게 웃었다.
“그래, 안녕.”
“끠액.”
쉽게 죽지 않을, 이전 창가의 꽃과 같은 종류의 꽃을 근원으로 한 괴식물.
역시 난 평생을 누군가의, 무언가의 잔재에 매달릴 수밖에 없나 보다. 씁쓸한 감정을 삼키고 손을 뻗어 봉오리를 톡 건드렸다.
“앞으로 여기가 네 자리야. 얌전히 있도록 해.”
“끩.”
원래 인간계의 꽃을 근원으로 한 식물들은 성격이 순한 편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유독 호의적이라든가…. 실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슬그머니 들어온 단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어딜 다녀왔….”
“그 식물이 꽤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이름은 지어주셨습니까?”
“…….”
“설마 이름도 안 지어주셨습니까?”
“……이름은 무슨.”
말을 돌린다는 것을 알지만 일단은 넘어가 줄 생각이다. 눈을 가늘게 뜬 데온이 고개를 홱 돌리며 답했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회의장에서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태도가 수상했으니 아마 그것과 연관이 있을 테지.
마계에서 벌이는 일이다. 눈과 귀를 이쪽에 집중하고 있는 마족들이라면 마계에 피해를 주는 즉시 화면 송출을 끊고 녀석의 목을 칠 터. 단이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테니 좋지 않은 사고를 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멍청이도 아니고 설마 ‘마계에서’ 뒤통수를 치려 들까.’
이러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런, 매정하십니다.”
“끠액!”
“닥쳐.”
이전의 식물도 이름이 없었거늘, 이제 와서 왜 굳이 이름을 붙여줘야 하는가.
짜증스럽게 겉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게 날아오는 겉옷을 요령 좋게 잡아낸 단이 그것을 곱게 접어 팔에 걸치다가 멈칫-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자꾸 찬바람이 들어온다 했더니….”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활짝 열려 찬 공기를 고스란히 들여보내는 창문이 존재했다.
“춥지 않으십니까?”
“딱히.”
“그래도 닫아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방이 너무 찹니다.”
데온이 뭐라 하기도 전에 창문에 다가간 단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옆에서 불쑥 튀어나와 손을 쳐내는 녹색 줄기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흠칫 몸을 물려야 했다.
전부 보고 있었던 듯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끠액!”
“마스터…?”
가까이 다가온 데온이 화분을 안고 돌아가 다시 침대에 앉는다. 칭찬하듯 검지가 꽃봉오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냥 열어 둬.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까.”
“냄새… 말씀이십니까?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그냥 그런 게 있어.”
핏물이 가득 찬 방안을 둘러본 적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단을 담았다.
“그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
똑똑.
“데온 님, 에드입니다.”
“그럼 그렇지. 들어와.”
문이 열리고 에드가… 아닌 무언가가 들어왔다. 술병을 가득 실은 카트를 발견한 데온이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단의 가늘어진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모른 척 외면했다.
……대충 어딘가에 담아 들고 올 줄 알았더니 설마 카트에 싣고 올 줄이야. 많이 가져오랬다고 정말 잔뜩 가져왔다.
하나둘씩 테이블에 올라가는 병을 멍하니 보던 데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테이블에도 다 안 올라갈 것 같은데…….”
“남은 건 바닥에 내려놓겠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어…….”
흰 장갑을 낀 손이 분주히 병을 테이블 위로 나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길 한참, 간신히 집 나간 넋을 되찾아온 데온이 뒤늦게 그의 손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장갑을 안 벗었네?”
새하얀 장갑을 낀 손.
데온 님이 마족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 어쩌구 하는 소문이 퍼져 다들 인간 행세하던 걸 그만뒀는데, 답답할 것이 분명한 장갑을 왜 벗지 않고 있는 건지.
흠칫한 에드가 손끝을 오므렸다.
“예…? 예, 그렇습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건 아니고, 다른 마족들은 내 앞에서 인간과 다른 점을 감추던 걸 그만뒀거든.”
“아,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럴까 생각했습니다만, 이게 습관이 되어 오히려 없으면 허전한 데다 선물 받은 장갑이어서요. 그냥 계속 착용하기로 했습니다.”
“……선물?”
“예.”
에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데온 님께서 주신 선물이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