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17
217. 증오는 산불과도 같아서(8)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데온이 입을 살짝 벌렸다.
“현 상황을 배제한 상태에서 마스터의 천성만 두고 한 말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착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보통 타인을 원망하여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가정은 당연히 타인을 원망하는 쪽으로 결과가 내려집니다. 그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하죠.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
“일종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데온의 입이 다물렸다.
손에 들린 잔으로 가볍게 입을 축인 단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마스터는 타인을 원망하는 대신 본인을 원망하길 택했습니다. 그것도 친분이 깊기는커녕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가까운 사람이었음에도 말이죠. 이게 착한 것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건 착하다기보다는 객관적으로 판단했다고 봐야지.”
“다른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몰라서 죄 없는 타인을 원망하는 줄 아십니까? 다들 사실은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러는 겁니다.”
조금 남아 찰랑이는 잔을 내려놓았다.
단은 어느새 빈 병을 내려놓고 새 병에 손을 뻗는 데온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제지한 뒤, 정상적인 방법으로 딴 병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힐긋 그를 본 데온이 곱게 따진 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나는 내 개인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목숨을 죽음에 몰아넣었어.”
“압니다.”
“그럼에도 주제도 모른 채 원망의 눈길을 다른 존재에게 보내고 있지.”
“그것도 압니다.”
“제국을 무너뜨릴 때도….”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 마스터가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까?”
그냥 적당히 넘어가면 될 것을 뭘 그렇게 아득바득 부정하는지.
잔에 남아있던 액체를 모두 입에 털어넣은 단이 다시 잔을 채우며 말했다.
“전 마스터가 타인을 원망하는 대신 본인을 원망하길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그거지. 주술사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공작과 황제를 향한 내 태도를 봤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그렇습니까? 그럼 정정하죠. 마스터는 타인을 원망하기에 앞서 본인을 원망하길 택했습니다.”
“…….”
“애초에 본인을 원망하지 않는 상태에서 타인을 원망했다면 저도 그런 종류의 말은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스터.”
애초에 논쟁이나 벌이자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냥 가볍게 던진 말이었던 만큼 이쯤에서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단은 질질 끌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원망스럽고 증오하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
말문이 턱 막힌 듯, 데온이 굳었다. 단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내가 봤을 때 당신은 그저 스스로를 향한 감정이 넘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본인은 이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아 살기 위해 타인을 원망했노라 주장하겠지만, 그건 그저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원망하다가 넘쳐서 새어나간 감정이 타인을 겨눴을 뿐이니.
넘친 것의 규모가 그 정도라는 점에서 당신이 느끼고 있을 감정의 크기와, 평범하게 자랐다면 타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쉬이 겨누지 못했을 선한 천성이 눈에 보여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진 만큼.
단 역시 데온을 파악하고 있었다.
***
데온 님의 명을 거부할 수 없어 술을 잔뜩 가져다 드리고자 움직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안심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데온 님께서 바뀌셨다 한들 과연 술주정까지 바뀌었을까.
용사가 되셨으니 취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의 수를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정말 술주정이 펼쳐진다면 마왕성은 다시 뒤집힐 테니까.
하여 에드는 데온 하르트에게 술을 가져다주기 전에 마왕에게 가 보고를 올리길 택했고.
[아, 괜찮아.]답을 얻었다.
[데온의 술주정은 그의 시간이 과거에 멈춰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거든.] [과거… 말씀이십니까?] [그래.]8년 전쟁 말이야.
뒷말은 꿀꺽 삼킨 마왕이 안심하라는 뜻을 담아 싱글거렸다. 마왕의 웃음을 본 에드가 흠칫했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니 문제없을 거야.]데온 하르트는 8년 전쟁 때 본인의 기억을 나누었다. 그 뒤로 줄곧 기억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여 무의식에 떠넘기며 불편한 진실과 상황을 회피해왔으니, 다시 말해 정신이 성장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행한 기억 분리. 전쟁이 끝났음에도 합치지 않고 있는 기억. 덩달아 성장하지 못한 채 당시의 상황에 고정되어버린 시간.
적을 찾는 술주정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데온 하르트가 기억을 분리한 시점은 생존에 필사적이던 8년 전쟁이니까.
정확하게는 8년 전쟁에 참전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막 ‘잔인한 전투법’을 고안한 시점.
‘적에게 집착하고 피에 미치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정도’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다소 과격하게 날뛰던 시점이지.’
지금은 기억도 합치고 정신도 다시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성장하고 있으니 문제 될 것 없다.
[애초에 독에도 면역이 있는 용사가 고작 알코올 따위에 취할 리도 없지만.] [아…….]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일단 그 무시무시한 술주정을 부릴 일은 없을 것이란 것 정도는 알겠다.
보아하니 일부러 생략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여쭤봤자 답해주시지 않을 테지. 그저 확답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한 에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
역시나, 데온 하르트는 취하지 않았다.
단이 ‘역시 용사….’하고 중얼거린다. 데온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병에 조금 남아있던 액체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걸로 여섯 병이다.
그럼에도 취하기는커녕 취기조차 느껴지지 않아 끝내 한껏 짜증을 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단이 익숙하게 불을 붙여줬다.
“더 안 드실 겁니까?”
“마셔봤자 취하지 않잖아. 기억이 끊기는 것까진 아니어도 적당히 취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그나마 담배 형태의 약은 피우는 동안에는 효력이 발휘되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폐에 약의 잔재가 남아서 그런지, 담배를 끄고 나서도 잠깐 동안은 효력이 유지되기도 하고.
담배를 문 채 멍하니 테이블 위에 늘어진 술병을 보던 데온이 하염없이 타 들어간 꽁초 끝이 재를 떨어뜨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직 완전히 정신 차리진 못한 듯 떨어지는 재를 손바닥으로 받아낸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원래는 상단이 인간계에서 철수하고나서 마계에도 진출시켜 보려 했는데….”
“…….”
“얻을 게 돈밖에 없을 것 같고.”
돈은 이미 차고 넘치니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순간 이쪽에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느냐인데…. 솔직히 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것 같다.
상단을 키우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서가 아니다. 특색이 강한 네 개의 도시이니 상단이 오가며 다리 역할을 해주기만 해도 금방 덩치를 키울 수 있을 테지. 거슬리는 길목의 마물들도 어차피 정리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면 금방 정리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덩치를 키워봤자 써먹을 데가 없을 것 같아서. 대충 머리를 굴려 마땅한 쓸모를 찾지 못한 데온은 깔끔히 포기하길 택했다.
“뭐,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뭔가 쓸모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런 소리를 들은 상황에서 괜한 움직임으로 경계를 살 필요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뱀파이어.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힌 데온이 거의 다 탄 꽁초를 목에 지져 끄고 새 담배를 꺼냈다.
“……당분간은 자중하는 수밖에.”
말은 형체조차 없으면서도 누구보다 짙은 잔재를 남긴다.
오늘 뱀파이어의 발언은 그녀의 말을 들은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앞에서는 그럴 리가 없노라 단언하면서도 뒤에서는 저도 모르게 데온 하르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게 되겠지.
“마스터는 정말….”
코앞에 불이 다가왔다.
시선을 들자 단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재앙이군요.”
마족들을 경계할 때부터 예상하긴 했다만… 설마하니 정말 마계도 염두에 두고 있을 줄이야. 단의 얼굴에 작은 감탄이 스쳤다.
단은 앞선 데온 하르트의 발언에서 그가 마왕군을 적으로 규정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말 뿐이지만 마계에도 상단을 진출시키는 것을 고려해보지 않았나. 인간계에 했던 것과 비슷한 짓을 시도해보려고!
‘그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 되는 셈인데.’
이곳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크지.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불붙은 담배를 들고 있던 데온이 덩달아 픽 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하하….”
재앙이라 하니 새삼 그를 만났을 때 주술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를 가리켜 언젠가 터질 폭발물이라 했었지. 단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아뇨, 그냥….”
단은 그때 저와 데온 하르트의 얽힌 운명을 읊던 주술사의 말을 들었고,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그렇기에 그는 새삼스레 데온을 빤히 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질문을 던졌다.
“우리 관계는 불이 났기에 폭발물이 터진 걸까요, 폭발물이 터졌기에 불이 난 걸까요?”
“모르지. 그래도 주술사를 만나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일이 터진 뒤였다고 확신하고 있어.”
“이미 터진 뒤였다면 그전에 만났을 때라는 건데……. 그전의 만남은 8년 전쟁… 첫 만남 때가 유일합니다만….”
“그래. 그때.”
첫 만남에서 어린 데온은 단으로부터 각혈을 감춰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정확하게는 만만해 보이지 않아야 살 수 있다는 것. 간단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은 영역을 넓혀 전투 방식을 고안하고 기억을 분리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시작은 단의 조언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덕분에 살았는데….’
처음 얼굴을 보자마자 한 말이 죽고 싶냐는 협박을 곁들인 ‘꺼져’였지, 아마?
입이 험하다는 말이 돌아오자 진짜 험한 게 뭔지 보여주겠다며 실컷 욕을 퍼부었었고.
단의 표정이 묘한 것이, 그도 그때를 떠올린 모양이다.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부끄러운 과거에 멈칫한 것도 잠시, 데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조언이 아니었다면 난 얼마 못 버티고 죽었겠지. 그 점에서는 감사하고 있어.”
“…….”
“아무튼.”
지졌던 자리에 다시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술 전부 정리해서 카트에 담아.”
“반환하시려는 겁니까?”
“물건이라면 모를까, 먹는 종류인데 남았다고 반환하는 건 좀 이상하지. 받아 가려고 하지도 않을걸.”
“그럼…….”
“따라와.”
단을 도와 멀쩡한 술병 몇 개를 카트에 옮긴 데온이 등을 돌렸다.
***
그가 향한 곳은 로프티 기사단의 숙소였다.
묵묵히 데온의 걸음을 뒤쫓던 단이 눈앞에 보인 숙소에 잠시 멈칫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담은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하필…….’
적어도 오늘은 이들을 찾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겠다. 다만….
데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하네. 답지 않은데.”
“……연무장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그곳에 모여 있었으니까요.”
“아니야. 방에 있을 때 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그건 또 언제 확인하신 거람. 한숨을 삼키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시끄러워야 할 숙소가 조용한 것을 보면 뻔하다. 제 말대로 자리를 비운 것이겠지. 한두 명도 아니고, 달리 갈 곳도 없는 이들이 갑자기 절반 가까이 자리를 비운다면 누가 보기에도 수상할 것이다.
‘들키겠네.’
아무래도 혼날 각오를 해야할 것 같다. 체념을 담은 걸음이 무겁게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엇 대장…?”
당당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데온을 발견한 기사단원이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눈을 비빈다.
혹시 모를 눈의 이물질을 제거한 뒤에도 선명히 보이는 데온의 모습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녀석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진짜 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