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23
223. 부관참시(6)
하늘에 화면이 떠올랐다.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던가.
익숙함에 무뎌진 시선을 던진 것도 잠시, 각 국가의 고위층들은 화면 속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병력을 움직였다.
목적지는 덴 상단.
단과 데온 하르트가 연이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줄곧 그의 얼굴을 머리 한구석에 기억해두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빠른 행동이었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인간계에서 운용하던 상단을 버리거나 철수한다는 의미인가.’
덴 상단은 인간계에서 가장 큰 상단이다. 거의 독점에 가까운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만큼 철수한다면 여러모로 피해가 막심할 터. 군주들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갔다.
독이 될 줄 알면서도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냥 두었다. 상단을 이용하지 않으면 당장 여러모로 불편하고 곤란해지니까. 숨통 좀 트겠다고 가슴에 구멍을 뚫은 짓이요, 해독제를 찾을 때까지 독이 퍼지는 것을 막겠다며 다른 독을 사용한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해독제를 찾기도 전에 독이 터졌다.
각 지부는 물론이고 본부까지,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두 자리를 뜬 뒤였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던가. 약초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다 챙겨 떠났다는 말에는 끝내 착잡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단의 발언과 혁명군 수장이 난입으로 벌어진 설전에서는…….
“데온 하르트가 용사라고.”
르웨체의 국왕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인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텐데도 그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심 없으니까.
놀랍긴 하지만 그게 전부다. 언젠가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며 차라리 데온 하르트가 용사가 되어 황제에게 대신 복수해주길 바랐던 기억이 떠올라 미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일 뿐,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했다.
‘단 상단이 철수한 건… 조금 아쉽지만 이렇다 할 타격도 없고.’
유용한 심부름꾼과 돈이 들어올 편리한 통로를 잃게 되어 아쉬울 뿐이지 타격은 없다. 애초에 르웨체는 물자가 풍부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니까.
‘크루엘 하르트의 죽음은…….’
데온 하르트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인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닐 테고, 일종의 애증 관계였던 모양이다. 미워하지만 죽길 바랄 정도는 아닌, 오히려 죽음 앞에서는 목숨 바쳐 지키고자 하는 관계.
독특한 우애라는 감상을 떠올리던 르웨체 국왕이 문득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제 동생을 떠올리고 지그시 턱에 힘을 줬다. 생각이 느리게 이어졌다.
‘……안타깝게 됐군.’
공작이 죽였다 했던가.
뜬금없이 범인이 공작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상황 파악은 금방이었다.
제국의 공작은 당시 황제의 가장 큰 내부의 적이었고, 크루엘 하르트는 그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 공작 정도의 사람이 고작 감정 따위에 휘말려 유용한 패를 버릴 리 없으니, 이는 감정에 의한 살인이 아닌 필요에 의한 살인이었을 터.
‘귀족들의 세계에서 ‘필요에 의한 살인’이라… 뻔하지.’
두 형제는 정치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이제야 데온 하르트가 마계의 편에 선 것도, 제국을 최우선으로 노린 것도 이해가 된다. 저를 마계로 보낸 형의 뜻을 존중하는 동시에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겠지.
크루엘 하르트의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과 달리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온 희생적인 형태의 죽음이다. 심지어 이를 직접 목격한 것 같던데,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이성을 챙기고 가장 나은 선택을 할 줄이야.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지.
르웨체의 국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 감탄이나 안타까움과 별개로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고작 복수 하나를 위해 너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감탄하기에는 그 행동의 결과가 너무 처참하고, 안타까워하기에는 데온 하르트의 죄가 너무 크므로, 국왕은 깔끔하게 데온 하르트를 향한 인간적인 감정을 정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결론은 바뀌지 않으니까.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내부 운영에만 집중한다.’
르웨체가 특별히 나서서 무언가 일을 꾸미지 않는 한, 마계는 인간계 정복에 있어 르웨체를 가장 마지막 순서에 둘 것이다. 우리는 마계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 왕국에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본보기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조용히 군사력을 보강한다. 마계가 이쪽에 눈을 돌렸을 때 쉽게 당하지 않도록. 단순한 보강을 넘어 상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낼 정도의 패 역시 만들어 두는 편이 좋겠지.
“제국이 꽤나 고생하겠군.”
그렇지 않아도 군사력이 약해져 위태로운 상황에서 주요 왕국 중 하나가 전쟁 불참을 고집하고 있으니. 국왕이 쓰게 웃었다.
군사력뿐이랴, 황위의 주인이 바뀌고 수도가 바뀌었다. 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와 더불어 또 다른 권력의 중심이던 공작이 죽었으니 권력 구도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일 터.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되살아나지 않는 한, 아니 되살아난다 해도 휘어잡기 어려울 상황에서 과연 어린 황족들이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그래도 르웨체가 마계의 편에 붙을 일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려나.”
그렇다 해서 저쪽이 감사히 여길 일은 없겠지만.
르웨체는 마계로 돌아서지 않는다. 동생을 잃은 날 제국의 올곧은 기사와 했던 약속 때문만은 아니다. 국왕은 더 이상 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황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들었으니까.
듣는 이로 하여금 순간이나마 침묵하게 만드는 내용. 직접 보지 않고 보고로 전해 들었음에도 그 내용에 압도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동생에게 미안해질 일이 자꾸 느는군.’
동생의 죽음에 무뎌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빈자리를 인정하고 체념했을 뿐이지, 기억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감정 역시 생생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황제의 죽음은 그의 행적만큼이나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누구라도 인정하고 경의를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죽음을 대가로 내 동생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청산하겠다.
더 이상 제국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즉, 르웨체가 조카들이 이끄는 제국을 방해할 일은 없을뿐더러 천에 하나, 만에 하나지만 상황이든 마음이든 변화가 생겨 필요하다면 다시 손잡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죽음으로써 혼자 짊어지고 간 것들이 많아 보이던데, 거기에 하나 더 얹어도 티도 안 나겠지.’
네가 다 안고 가라. 그걸로 퉁쳐주지.
아마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르웨체의 국왕은 듣지 못할 이를 향해 일방적으로 거래를 통보하며 제국을 향한 원한을 깔끔히 정리했다.
***
그리고 르웨체의 국왕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속국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존재감이 없어 이런저런 일로 실의에 빠지고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느라 간과해버린 작은 왕국.
“데온 하르트가 용사…….”
태혼국의 국왕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인간 중에 데온 하르트라니. 끝내 세상이 멸망하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스타베 일루스터라 했던가? 공작은 왜 그 짓을 벌인 건지. 그 때문에 데온 하르트가 마계로 넘어가지 않았나.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공작을 향해 원망을 표출한 것도 잠시, 국왕은 침착하게 감정을 가다듬고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양측의 주요 전력이 달라졌으니 계산을 다시 해야겠지.’
펜 하나를 두고 양측에 흰 돌과 검은 돌을 둔 그가 손을 움직였다.
덩치 큰 흰 돌이 검은 돌이 있는 쪽으로 옮겨진다. 덩치 큰 검은 돌과 나란히 놓인 그것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절로 한탄이 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태혼국은 아주 작고 약한 왕국인 만큼 그곳의 왕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더 머리를 굴려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남아 왔다.
줄타기 역시 그 범주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태혼국의 국왕은 생각했다. ‘용사마저 마계의 편인 상황에서 과연 르웨체가 이 왕국을 지켜줄 수 있을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불가능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봤지만 답은 같았다. 불가능해.
당장 마계가 르웨체를 공격하지 않고 있다지만 그건 후순위로 미뤄두었을 뿐, 앞으로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다른 왕국과 협력하지 않고 있어서야, 선순위인 산국과 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순서인 르웨체 역시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다. 거기에 속한 태혼국은 볼 것도 없겠지.
‘그러니 판단해야 한다.’
마계에 붙을 것인가, 남을 것인가.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고서 등의 책에 적힌 마족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읽었다. 마족을 ‘악’으로 규정짓고 있었지. 지극히 편파적인 시선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는 이곳 태혼국에 마계와의 경계선이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을 떠올렸다. 정체를 숨긴 마족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그 시기를.
물건을 훔치는 등의 자잘한 범죄는 있었으나 살인 등의 심각한 범죄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히려 정체를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멍청한… 아니, 순박한 모습도 보였었지. 물론 이들 또한 마족의 일부일 뿐이라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결정했다.”
기나긴 고민 끝에, 국왕은 판단을 내렸다.
***
속국이 하나뿐인 르웨체마저 배신의 징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을진대, 여러 속국을 둔 산국은 어떠할까.
이번 일로 인해 산국은 끌어들인 속국이 독으로 변모하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할뻔했다. 그랬다면 혹시 모를 배신에 대비해 내부부터 감시하느라 병력을 낭비하는 등 손해가 막심했을 터. 최근에 들인 유능한 책사가 아니었다면 두 눈 뜨고 당하는 꼴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에, 책사로 들어오자마자 산국의 상황을 둘러본 사에린이 말한 것이 있다.
[산국은 너무 많은 속국을 들였어요. 이건 위험합니다. 재기조차 못 할 정도로 완벽하게 짓밟고 정복했다면 모를까, 설득으로 이룬 성과는 다른 이의 설득에 쉽게 무너질 겁니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 내부의 골칫덩어리가 될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지만…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황당하겠죠. 그래도 믿고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일단 말해 보아라.]회상을 하던 산국의 왕 연화가 한쪽에 서 있던 사에린을 돌아보았다.
화면이 하늘에 떠오르고 단 상단이 철수했다. 특히 상단에 의지하던 산국이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게 전부일 뿐 정작 화면의 사내가 떠벌린 말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산국은 유능한 책사를 둔 덕분에 속국이 독으로 변모하는 것만큼은 억제할 수 있었다.
“고맙구나. 그대 덕분에 쓸데없는 병력 낭비를 줄일 수 있었어.”
혈혈단신으로 산국에 넘어와 오직 능력 하나만으로 왕의 책사 자리까지 오른 사에린이 살풋 웃었다.
“아예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것으로 어느 정도 배신을 망설이게 할 수 있겠죠.”
“그래. 그대도 참 독특하지. 어떻게 일국의 왕을 ‘신’으로 만들 생각을 다 했을까.”
“‘신’이라 말씀하시니 낯설 뿐이지, 알고 보면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본래 백성들은 성군을 칭송하며 따르잖아요? 저는 그것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도록 도왔을 뿐입니다.”
속국의 배신을 예방하기 위해 그녀가 취한 방법은 정말 파격적이었다.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을뿐더러, 떠올린다 해도 우스운 생각으로 넘겨버리고 시도하지는 못했을 방법.
[많은 권력자가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민심은 천심입니다. 지도층은 소수이고 백성은 다수죠. 소수가 다수 위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다수의 암묵적인 허용이 있었기 때문이니, 전하께서 잡아야 하는 것은 지도층이 아닌 그 아래, 민심입니다.]사에린은 속국을 포함한 나라 전체를 왕 하나만을 따르는 광신도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