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27
227. 혼이 부서지도록(2)
[마왕.] [세계가 용사를 죽이기 위해 창조한 존재.]***
마왕은 세계가 목적을 가지고 만든 존재다.
‘용사를 죽이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완전히 새로운 종족. 그렇기에 마왕을 포함하여 그로부터 탄생하는 ‘마족’이란 종족의 존재 의의는 단 하나에 귀결된다.
‘그나마 마족은 세계의 의도와 관계없이 탄생한 녀석들이라 제약이 적지만….’
의지의 직접적인 관계자인 마왕은 다르다.
온몸이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는 듯한 기분을 아는가. 마왕의 자유의지는 세계의 목적보다 후순위로 치부된다. 죽음조차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존재 의의를 달성하는 것과 연관이 없는 것들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유롭지만, 그럼 뭐해.’
가장 바라는 것에는 닿을 수가 없는 것을.
반면에 용사는 인간을 베이스로 탄생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며 다양한 ‘역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존재 의의인 종족. 즉, 그러한 인간에게 힘을 부여하여 탄생한 용사의 자유의지는 세계가 뒤늦게 부여한 목적보다 우위에 있으니.
마왕은 조소를 지었다.
‘부럽네.’
세계가 최초로 종족을 만들 때 부여한 목적에 따라 자유의지의 무게가 이렇게나 달라지고.
애초에 ‘마왕’은 세계가 일회용으로 사용할 생각으로 깊게 고려하지 않고 급히 만든 존재라 여러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용사를 죽여서 더 이상 존재 의의를 달성할 수 없을 때, 죽음이 허락되는 것이 아닌 다른 용사가 등장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든가.
혹은 ‘일회용’이라는 목적과 세계가 처음 생명을 만들 때 정했던 기본 규칙인 ‘모든 생명은 종족 보존의 의무를 가진다’가 충돌하여 후자가 이겨 ‘마족’과 ‘마물’이 탄생했다든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용사를 죽여도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정말….’
현 마왕은 역대 마왕 중 가장 강하다.
그러고 보니 까마득한 과거에 전대 마왕이 말했다지? ‘마왕’에게 있어 강한 것은 저주라고. 그 말대로다.
강한 것은 저주가 되었다.
존재 의의에 따라 마왕은 용사를 상대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부러 져줄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왕은 지쳐갔다. 지친 지 얼마 안 된 초반에는 분노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자유의지는 철저히 짓밟으면서 왜 인간의 자유의지는 최우선에 두는 거냐고. 과거 인간계를 절멸 위기에 몰아넣었던 사건이 이때 발발했더랬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데온 하르트를 만났다.
‘……공작과의 내기로 처음 봤었지.’
순순히 목을 내주고 있는 백발의 사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왕은 데온 하르트를 두고 공작과 내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이 사건을 깨달아 저를 증오하고 살의를 품어도 그 생각은 변치 않는다. 아니, 그게 확실하다면 오히려 당시의 선택이 탁월했노라며 자찬할 것이다.
덕분에 전례 없이 가까이에서 용사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처음부터 줄곧 신선한 재미를 안겨주더니, 그건 용사가 되고도 변하지 않는군.’
용사를 휘하에 두고 마왕성에 거주하게 한 것은 오랜 시간을 산 마왕조차 처음이다. 9할이나 되는 마력을 소모하여 인간을 살린 것도, 살린 인간이 용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로 처음이고.
그래서일까, 단순히 한때의 장난감으로 여기던 시절부터 데온 하르트에게 너그럽던 마왕은 그가 용사가 되자 더욱 유해졌다.
처음부터 흥미와 재미를 주던 이가 끝내 마지막 가르침을 줄 자질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무슨 짓을 한들 예쁘지 않으랴.
내 마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으려 들어도 좋고, 뒤에서 다른 수작을 부려도 좋다.
지금처럼 내 앞에서 당당히 건방을 떨어도, 얼마 전처럼 기 싸움을 걸어와도 좋으니,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다.
“난 네게 아주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줄 거야. 달리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말해도 돼. 빚이라 생각할 필요 없이 너는 나중에 그거 하나만 가르쳐주면 되고.”
“…….”
“그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의향이 있으니까, 그동안은 지금처럼 날 즐겁게 해줘.”
알겠지, 나의 용사님?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과장된 장난스러움으로 말을 끝맺은 마왕이 싱긋 웃으며 손을 거둔다. 조금 전의 모습이 착각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그의 표정과 눈빛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
데온은 쉬이 입을 떼지 못하고 마왕을 바라보았다.
가르침을 청하는 주제에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분위기가 그럴 수 없었을뿐더러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건 아니다.
‘이건 위험해.’
그가 바라는 것을 내가 이루어 줄 리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가 바라는 것이 내게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다시 한번 게임의 종목 자체가 바뀔지도 모른다.
바뀐 게임 종목은 마왕에게도, 숨 쉬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인 데온 하르트에게도 달갑지 않은 종류겠지. 복수를 위해 마왕과 숨바꼭질을 하며 용사로서의 길디긴 수명이 자연히 끝날 때까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일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을 두고 조금은 흔들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암시하시면 찾아내서 역으로 이루어 드릴지도 모릅니다만.”
“너야말로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곤란할 텐데?”
“…….”
……너무 크게 동요한 나머지 실수하고 말았다. 데온은 입을 다물고 새어 나오려는 침음을 눌러 삼켰다.
의도치 않게 그를 향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상대로부터 이미 알고 있었음을 확언받았다. 서로가 알면서도 모른 척 굴던 것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면 위에 올라온 상황.
언제 쥔 건지 모를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며 침묵을 늘리다가 다시 느리게 말을 꺼냈다.
“……이 말을 하려고 그랬던 거군요.”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마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취미가 필요하다는 건 진심이야. 겸사겸사 인 셈이지.”
지금의 대화를 위해 취미 만들기를 이유로 이것저것 가르치며 질문을 유도한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 미리 알려주기 위해.
말해주는 것보다 말해주지 않는 편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기 쉽다는 것은 안다. 사실 마왕도 데온이 스스로 알아채는 날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고.
하지만, 그래. 마왕의 눈에 들 정도로 기구한 운명과 그럼에도 끝을 보기 위해 기를 쓰고 나아가는 인간에게 이 정도의 감사와 경의는 표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이기적인 새끼.’
데온의 표정이 굳었다.
마왕은 교활하다. 그는 데온 하르트가 눈앞에 던져진 진정한 복수 방법에 대한 ‘힌트’만으로는 이를 행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밝힐 거 다 밝히면서도 직접적인 언급만큼은 하지 않은 것이겠지.
덕분에 동요한 나머지 쓸데없는 것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말았다. 데온은 불만스레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방금의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네. ……그리고 굳이 뭔가 가르쳐주시겠다면 이런 게 아닌 무기술 종류가 좋았을 텐데요.”
캔버스에 그려진 생생한 초상화에 시선을 던졌다.
최대한 빨리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읽은 마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진심이야? 무기술을 가르치고,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밑천을 드러내야 할 텐데.”
“…….”
“그리고 가르친다 해도 대련은 안 돼서 내 밑천은 파악할 기회도 없을걸. 너만 전부 털리게 되는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제가 언제 마왕님의 밑천을 궁금해했습니까?”
직접적인 언급만 없을 뿐이지, 이젠 아예 대놓고 상황을 입에 올리는군.
붉은 눈동자가 불쾌하다는 듯 빛난다. 꿀릴 것 없다는 듯 곧게 들어 올린 고개가 마왕과 눈을 마주쳤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말하라 하셨습니다.”
“…….”
“무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 밑천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넌 가르치기나 해라. 밑천을 감추든 새 밑천을 만들든, 하다못해 네 실력을 파악하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데온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름의 생각을 담아 툭 던진 말이 자존심을 건든 듯, 눈에 건방짐이 들어앉았다.
진심으로 배울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만 부추겨 버렸네. 마왕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렇다면야, 좋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가라앉힌 데온이 무언가 떠오른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대련은 안 된다는 겁니까?”
“마왕은 용사를 상대할 때 최선을 다하게 되거든. 정확하게는 ‘죽이지 않기 위한’ 조절이 안 된달까. 강행한다면 대련이 아니라 사투가 될걸.”
“…….”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이렇게 평화로이 있어도 괜찮아?”
마왕이 싱글싱글 웃는다. 데온은 등골을 스친 불길함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묻지 않은 것은 굳이 나서서 먼저 알려주지 않는다. 방금 그 말은 힌트를 준 것일 터. 긴장으로 깨어난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쟁과 관련된 겁니까?”
“응.”
“새로 소식이 들어온 모양이군요.”
“글쎄.”
“그럼 새로 들어온 소식이 아니라 놓치고 있었던 정보를 뒤늦게 입수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뭡니까?”
정답. 마왕이 웃음기가 스민 답을 꺼냈다.
“산국과 제국이 재동맹을 맺었더라고. 그것도 꽤 된 것 같던데.”
“…….”
“뭐, 그 이외에도 다른 자잘한 소식이 더 있는 것 같지만… 그건 네가 직접 알아보고.”
갈 거지?
확신이 담긴 질문 아닌 질문과 함께 초상화가 내밀어진다. 얼떨결에 받아든 데온이 그림 속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이건 왜….”
“선물이니까 가져가.”
“…….”
거울 같아서 기분 나쁜데.
그래도 마왕이 준 것을 거절할 수는 없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림을 한 손에 들고 반대쪽에는 테이블 위에 있던 화분을 옆구리에 끼웠…다가 허리를 조이는 감각에 시선을 내렸다.
녹색 줄기가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
“끠액.”
“아, 알아서 잘 매달릴 테니 손 떼도 된다고?”
“끩.”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쩍 화분을 놓았다. 다행히도 화분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옆구리에서 대롱거리는 무게감에 피식 웃은 데온이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림을 잘 챙겨 들고 마왕을 돌아보았다.
“이번에 많은 것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겁니다. 마왕님께서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거예요.”
“…….”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감돌았다.
“그게 무엇이든, 제게 들키지 마십시오.”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일 테니.
***
복도에서 도란도란 목소리가 들린다.
데온 하르트를 맞이하기 위해 문 앞을 서성이던 에드가 익숙한 목소리를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모셔야 할 상관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옆구리에 웬 화분을 달고, 손에는 커다란 본인의 초상화를 들고 계셨지만.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은 기특한데… 그럴 필요 없다니까.”
“끠액.”
“넌 그냥 잘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끠애애….”
“게다가 물감도 다 안 말라서 잘못하면 그림이 망가질걸. 마왕이 그린 그림인데 망쳤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내가 드는 게….”
음, 못 본 새 많이 개성적으로 변하셨군.
녹색 줄기가 상체를 거의 휘감고 올라가 있었음에도 열린 마음으로 개성이라 받아들인 에드가 마중을 위해 다가가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식물이 들든 데온 님이 들든 결국 데온 님이 부담해야 하는 무게는 같지 않나?’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느덧 가까워진 인영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데온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