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34
234. 나비효과(2)
앞뒤 설명 없이 툭 던져진 한 마디였으나, 폴은 알 수 있었다.
역시 시이아의 소재 따위는 진즉에 알고 있었구나. 아마 옛날 옛적에 알았겠지.
“이람 씨… 이람씨, 이람씨…….”
“…….”
“왜 그러셨어요.”
한탄에 가까운 음성이 나왔다.
배신감이 휘몰아쳤으나 화는 나지 않았다. 분노보다는 슬픔이 앞섰기에.
“내게 있어 시이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면서.”
시이아의 존재는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인간에게 수없이 데이며 살아온 폴에게 있어 시이아는 감성이 메마른 빈민가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인류애이자 그 씨앗이며 뿌리다. 그가 혁명군 수장인 이상 누구도 그에게서 시이아를 앗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그걸 내부인이 행하다니.
“……나는.”
가만히 듣던 이람이 입을 열었다.
“네 약점을 없애주고 싶었어.”
“…….”
“전대 수장인 다니엘은 인생 자체를 어머니에게 바치고 어머니를 위해 살았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너는 다르잖아. 지금도 그 여자애가 없는 상태에서 잘만 하고 있고.”
“하하.”
건조한 웃음소리가 방을 채웠다.
이어서 조금은 분노한 듯, 들끓는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그걸 왜 이람 씨가 판단하는 거죠?”
“…….”
“그러다 정말 내가 미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고.”
전대 수장이자 제 스승인 동시에 형이었던 사내가 최측근으로 두었던 사람이라 너무 무르게 대했던 모양이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길래 이런 짓을 다 했을까.
폴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한 장 집어 들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람 씨, 이게 무슨 서류인지 아세요?”
“……?”
“현 상황을 분석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적어둔 서류예요. 최신본이죠. 다니엘 형이 떠올렸던 ‘혁명 이후에 펼쳐야 할 정책’을 조금 뒤로 미뤄두고 그 중간 과정에서 펼칠 임시 정책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주 중요한 서류라는 것은 알겠다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람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그녀의 눈을 마주한 폴이 씩 웃더니 보란 듯이 두 손으로 서류를 잡는다. 분노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꾹꾹 억눌려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미소에 이람이 흠칫한 순간, 찌이익- 종이가 두 갈래로 찢겼다.
“……!”
이람의 눈이 커졌다.
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찢은 종이를 겹쳐 잡아 또 찢길 반복하며 몇 번이고 서류를 갈기갈기 찢었다. 거의 분쇄한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가루가 된 서류를 폴이 두 손에 모아 잡고 나서야 정신 차린 이람이 뒤늦게 그의 팔목을 잡았다.
“무… 무슨 짓이야! 그 중요한 걸!”
“놔요.”
“…….”
“놔요, 이람 씨.”
툭, 팔목을 잡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폴은 보란 듯이 그녀의 눈앞에 대고 종이 가루를 흩뿌렸다. 실내에 때아닌 눈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이람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제껏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던 이의 차분한 분노에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경고하는 것이다.
자신이 제대로 된 수장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면 시이아의 소재부터 알아 오라고. 두 번 다신 이딴 짓 하지 말라는 경고 또한 포함되어 있겠지.
“두 번은 없어요, 이람씨. 마지막입니다.”
“…….”
“시이아는 어디에 있죠?”
아.
다니엘이 달고 다니던 꼬맹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건만, 언제 이렇게 큰 건지.
한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기세가 고스란히 담긴 눈빛이 이쪽을 똑바로 향한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이람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마계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상당히 바빠지면서부터 그 아이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확신은 없어. 다만 마지막으로 파악했을 당시의 위치만 말해주자면….”
“…….”
“……데몬교였지.”
“……뭐요?”
***
이건 사기다.
8군단장 헬을 상대로 각종 질문과 더불어 능력 테스트를 진행한 데온이 갈수록 차오르는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내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말도 안 돼…….”
“……역시 전… 구제 불능의…….”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도 안 되게 능력이 좋잖아.”
내가 다 위협을 느낄 정도로.
이걸 정말 인간계에 풀어놓아도 될까. 얼마 못 가 완전 정복 소식이 들릴 것 같은데. 데온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정말… 만능이네…….”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은 칭찬이니 뭐.”
8군단장 헬은 온갖 무기술에 통달한 마족이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건만, 그림자에 마력이 깃들어 탄생한 마족답게 고유 능력마저도 위험했다.
그림자에 녹아드는 것 및 그림자를 통한 이동.
심지어 그 제한이 마계와 비슷할 정도로 풀렸다. 오래전, 드벨라니아의 제보를 듣자마자 삽시간에 이동해서 타깃을 처리하고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름의 거리 제한이 있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무슨 미친 능력이란 말인가.
“아무튼… 수고했어.”
역시 되도록 빨리 제거해야겠다.
“감사합니다.”
“…….”
말간 인사가 돌아왔다.
오늘따라 바닥에서 찰랑이는 핏물이 거슬려 데온은 품을 뒤적여 담배를 꺼내며 이만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던졌다.
그대로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당연하다는 듯 에드와 단이 따라붙었다.
어느덧 도착한 방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데온은 에드를 돌아봤다.
마주친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체념을 담고 내려간다. 그 광경에 반사적으로 열었던 입을 다문 것도 잠시, 데온은 기어이 입을 열어 의도했던 말을 꺼냈다.
“너도 수고했어.”
“…….”
이만 가보라는 뜻을 담은 완곡한 축객령.
침묵하던 에드가 힐긋 단에게 시선을 두더니 아무 말 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다. 그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던지던 데온은 이내 미련 없이 눈을 떼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자 창가 화분에서 턱을 괸 듯한 자세로 밖을 보던 괴식물이 ‘끠액’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인사하듯 이파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 그래. 안녕.”
“끩.”
안으로 들어가니 줄기가 스물스물 이쪽에 뻗어온다.
저건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는 거야? 자유자재로 길어졌다 짧아지는 줄기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던 데온이 제 허리를 휘감고 매달려오는 식물을 화분이 깨지지 않게 잡아챘다.
“……뭐야?”
“끠액.”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끠애액!”
“아, 그것도 그렇지만 담배 냄새가 난다고?”
“끠액!”
“……식물이 냄새를 맡… 아니 그전에, 대체 어떻게 대화가 통하는 겁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묘하게 비틀어진 단의 표정이 제법 웃겨 데온은 픽 웃으며 화분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눈치껏 허리를 감은 줄기를 회수하는 녀석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굵은 줄기를 손가락으로 슬슬 쓸어주며 그는 조금 전보다 여유로워진 태도로 장난스레 말했다.
“그냥, 감으로?”
“……정말입니까?”
“아예 거짓말은 아닌데… 간단한 의사소통은 그렇고, 보통은 얘가 줄기로 꽤 세세한 의사 표현을 하더라고. 누가 봐도 알 수 있을걸.”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침대에 걸터앉은 데온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8군단장은 역시 죽여야겠어.”
“어떻게요?”
신기하다는 듯 테이블의 괴식물을 쿡쿡 찌르던 단이 태연히 되물었다.
놀라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데온은 손을 들어 입가를 만지작거리다 손가락 관절 부분을 지그시 깨물며 웅얼거렸다.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직접 죽일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용사인 데온이 직접 죽인다면 깔끔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직접 죽인다면 분명 들킬 것이다.
데온 하르트는 마왕성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이들이 많으니까. 당장 마왕만 해도 다른 마족들보다 데온을 더 신경 쓰고 있는 판이다. 다른 마족들은 후순위로 미루고서라도 마왕의 시선 하나 피하는 것조차 힘들 터.
앞으로 쭉 군단장들의 수를 줄여갈 예정인 데온으로서는 이제 겨우 시작인 상황에서 고작 하나를 죽이기 위해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특별히 떠오르는 방안이 없다면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악!”
콱. 괴식물이 기어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급히 손을 털어 손가락을 빼낸 단이 피가 송골송골 맺히는 상처를 확인하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꽃봉오리 안에 왜 이빨이 있는 거야…….”
“푸핫!”
“……재밌으십니까?”
“어. 엄청. 주인도 무는 놈인데 너 정도는 당연히 물지.”
“…….”
“독은 없으니까 걱정 덜어도 돼. 그러게 누가 함부로 만지래?”
데온이 키득키득 웃는다. 단은 뚱한 표정으로 품을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영양가 없고 쪽팔리기만 한 지금의 화제를 이어갈 생각은 없다. 대충 피를 닦고 처음에 제가 데온을 찾았던 용건을 꺼냈다.
“……마스터가 찾던 시이아를 찾았습니다. 한때 구원교에 있었던 빈민 출신의 여자아이. 이름에 더해 이 세 조건도 부합하니 아마 맞을 겁니다. 지금은 데몬교에 있더군요.”
여러모로 혁명군과 그 수장을 거슬려 하고 있었으니 이 소식을 들으면 무언가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가 데몬교에 있었으니 황당해서라도 더더욱.
그러나 데온은 이렇다 할 반응은커녕 아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알아.”
“……예?”
“등잔 밑이 어두웠지. 아쉽지만 한발 늦었어.”
천장을 보는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8군단장의 계약자가 걔더라고.”
“……아?”
“내가 괜히 넋을 놓았던 게 아니야.”
어찌나 허탈하고 어이가 없던지. 솔직히 나름대로 정신을 수습한 지금도 황당할 정도다.
그건 단도 마찬가지인 듯, 그가 조금 멍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확실히……그건 조금… 많이 놀랍네요.”
“…….”
“그래서… 음, 어떡하실 겁니까? 데몬교 소속이니 리리넬에게 말하면 금방 해결될 겁니다.”
그녀의 맹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는 무슨 명령이든 데온이 하는 말이라면 기어이 실현해낼 것이다.
그 사실은 단도, 데온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
상체를 일으키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던 데온이 멈칫-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기혐오와 자책이 드러난 얼굴 위로 손이 덮였다.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것으로도 모자라 마른세수를 하듯 두어 번 얼굴을 문지른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한탄 섞인 음성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내가 전쟁에 많이 물들긴 한 모양이야.”
“…….”
“생각이라고 하는 게 그 빌어먹을 새끼의 방식을 닮아가는 걸 보면.”
시야에 닿는 책상 위의 보라색 펜이 눈에 거슬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펜을 집어 들고 반으로 뚝 분질렀다. 그걸 들고 다시 침대에 돌아오며 화분이 놓인 테이블 위에 대충 던지자, 괴식물이 ‘끠액!’하고 줄기로 그것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황당한 꼴에 단이 저도 모르게 열었던 입을 닫았다.
“…….”
“……제법 눈치는 있네.”
“끠액!”
괴식물이 엄지를… 아니, 잎사귀를 말아 치켜올린다.
하는 꼴이 하찮고 우습긴 하지만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데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건… 조금 더 가서 나중에 생각해보도록 할까. 지금 당장 정해야 하는 건 아니니 조금만 미루도록 하자.”
“……그렇죠. 그 애는 8군단장의 계약자이니 당장 어떻게 해봤자 돌아오는 건 의심의 눈초리일 겁니다. 조금 여유를 갖고 처리하는 편이 좋겠죠.”
“그렇지. 난 시이아를 찾을 때 딱히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지 않았어. 아마 알 마족은 다 알고 있겠지. 그런 상황에서 그 애가 죽는다면 가장 먼저 용의 선상에 오르는 건 바로 나일 테니까…….”
사실 단은 데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챘다. 아마 데온도 그가 눈치챘다는 것을 얼추 짐작하고 있으리라.
그러니 이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그럼에도 기껏 나아진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기에 단은 말을 아낀 채 그저 맞장구를 쳤고, 데온은 당장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거니와, 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시간이 필요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온화한 듯, 그렇지 않은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애매한 침묵 속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단이 무언가 떠오른 듯 탄성을 뱉었다.
“……아, 그리고 시이아를 찾다가 들은 소문이 있습니다만.”
“뭔데?”
“요즘 인간계의 평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소문입니다.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위하며 떠도는 진실된 녹색 머리 영웅의 이야기예요.”
녹색 머리, 영웅.
굳이 생각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의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스티그마,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