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35
235. 나비효과(3)
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배님이 직위를 박차고 나갈 만한 사람이 아닌데…….”
데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보다 품위와 명예에 목을 매던 사람이다. 이 모든 게 ‘사생아 출신’, ‘반쪽짜리 귀족’이라는 역린에서 비롯된 것일 터.
분명 ‘대륙을 떠돌며 가장 낮은 곳을 위한다’고 했다. 어느 군주든 제정신이 박혔다면 귀한 인력을 그런 곳에 낭비할 리 없으니 이는 소속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테고. 즉, 소문의 주인공이 정말 스티그마라면 귀족의 작위를 박차고 나왔다는 뜻이 되므로.
‘그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작위를 버렸다고?’
잠시 생각하던 데온은 고개를 저었다.
“헛소문이거나, 다른 영웅인 거 아냐?”
“일단 헛소문은 아닙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이 많았거든요. 다른 영웅일 가능성은… 아예 없진 않은데, 솔직히 요원한 일이죠. 녹색 머리가 흔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심지어 소문의 영웅은 행동거지에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묻어났다고도 했으니…….”
“선배님이네.”
‘기품’하면 스티그마 프리미로지.
이 정도면 부정할 수도 없다. 떨떠름하게 인정하면서도 데온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의문을 표했다.
“어째서 귀족 작위를 버리신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필시 무언가 생각이 있을 테죠. 예를 들면… 작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더 큰 명예를 노린다거나.”
“……더 큰 명예?”
“예, 솔직히 제국은 다 무너져가고 있잖습니까. 그런 곳에 남아봤자 ‘망국의 영웅’ 정도밖에 되지 않겠죠. 어디 그분이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확실히… 선배님이라면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명예를 남기기 위해 움직일 사람이지.”
과거는, 특히 전쟁의 시대에 스러진 망국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도 못하고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황제 정도라면 모를까, 한낱 영웅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잊힐 테지.
스티그마 프리미로라면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빙성 있네. 턱을 매만지며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그것 외엔 그분이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버릴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건 그래.”
저도 생각해봤지만 단이 말한 것보다 더 신빙성 있는 가설은 떠오르지 않는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확실한 것도 아닌 가설은 집어치우고, 어쨌든.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대륙을 떠돌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란 말이지.’
덕분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깊은 고민 없이 퍼뜩 떠오른 생각이라 잠깐 방심한 사이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데온은 즉시 입을 열어 제 생각을 공유했다.
“……8군단장 헬 말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간계에 보내야 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으니 일단 지체되고 있다는 산국의 성벽으로 보내고, 선배님을 통해 정리하는 건 어떨까?”
“확실히 그분이라면 제약이 풀린 8군단장도 죽일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과연 뜻대로 움직여주실까요?”
“움직일 거야. 더 큰 명예를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람이 군단장을 죽일 기회를 놓치겠어? 무대를 마련해주면 기꺼이 그 위에 올라가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움직이게 하면 그만이니까.
확신하듯 자신감이 스민 어조였다.
떠오르는 것을 입 밖에 내니 두루뭉술하던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는 기분이다. 데온은 아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8군단은 방패병이니 헬과 같이 지원을 보내는 대신 마왕성에 남기는 게 더 좋을 테고… 대신 일반 병과를 딸려 보내면 되겠네. 어차피 핵심은 8군단장이니까. 선배님의 소재는 파악하고 있지?”
“일단 머무는 마을까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접촉은커녕 눈을 붙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지만요.”
“영웅이니 달라붙는 눈 정도는 손쉽게 따돌리겠지. 그 정도면 됐어.”
어차피 머물만한 곳은 여관밖에 없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모를까, 선배님은 여관이 있는 곳에서 굳이 길바닥을 고집할 사람이 아니다. 특히나 누가 오든 제압하고 피할 수 있는 ‘영웅’이니만큼 더욱이 여관이 피할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누구든 접촉하려 든다면 필시 피하실 테고, 마계에서든 인간계에서든 이목이란 이목은 죄다 끌어모으고 있는 내가 직접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선배님이 머무는 마을의 모든 여관 주인들에게 전해. 기품있는 자세와 말투를 구사하는 우아한 사내를 본다면 말을 전해달라고. 돈을 쥐여주면 다들 해줄 거야.”
“전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글쎄…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안 될 테고…….”
톡톡. 검지가 허벅지를 두드렸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에서 버티고 있는 등불 앞에 그림자가 드리울 텐데, 그건 당신만이 걷어낼 수 있다… 정도가 좋으려나.”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 마지막에 못난 후배가 보내는 부탁이자 선물이라는 말도 덧붙이도록 해. 몰래 움직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당연한 말씀을.”
단이 씩 웃었다.
“이번에도 완벽하게 수행하겠습니다.”
***
슬슬 이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다.
잡히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피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성가신 일이다. 얼마 전까지 저를 주시하던 시선들을 떠올린 스티그마가 계산을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느 순간 일부 포기하기라도 한 건지 저를 찾는 시선의 수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다. 제국 측 사람들이 아예 여관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무시 못 하기에 스티그마는 더 성가셔지기 전에 마을을 뜨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안 받고 뭐 하니?”
여관 주인은 왜 이리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걸까.
돈도 받지 않고 저를 보고 있는 모습이 제법 거슬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기다리다 못해 손을 거두려 하자 냉큼 채가긴 했지만. 스티그마는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수작이지?”
그제야 가만히 저를 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무작정 기품 있는 사내라 말하길래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 싶었더니만… 확실히 직접 보니 알겠네…….”
“…….”
혼잣말이지만 명백히 저를 겨냥한 것이다. 스티그마는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여관 주인에게 말이나 물건의 전달을 부탁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 피했으면 직접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는 건 눈치채야 정상일 테지. 상대측에서도 적당히 한발 물러서는 것으로 타협한 듯싶다.
날카롭게 선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관 주인은 부탁의 이행을 위해 그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나리, 누가 나리한테 말 좀 전해달라 하더이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에서 버티고 있는 등불 앞에 그림자가 드리울 텐데, 그건 당신만이 걷어낼 수 있다고.”
“…….”
“못난 후배가 보내는 부탁이자 선물이라고도 덧붙였지.”
“……하.”
파악은 빨랐다.
발칙한 후배님 같으니. 스티그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해줘서 고맙구나.”
자세한 해석은 나중에 해도 된다.
돈도 줬겠다,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 스티그마는 일단 집요하고 귀찮은 시선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문을 나섰다.
저를 찾아 주시하는 시선을 따돌리며 걷고 걸어 도착한 인적 드문 곳에서, 비로소 걸음을 멈춘 그가 전언을 곱씹기 시작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에서 버티고 있는 등불이라.’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도 아니라 100%에 가까운 확률로 말이 새어 나갈 테니 조금 비틀어 전한 것 같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해석이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보통 ‘바람 앞의 등불’은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상황을 의미한다.
그냥 바람도 아니고 ‘휘몰아치는’ 바람이니 상당히 위험하거나 격한 상황일 터. 스티그마는 어렵지 않게 마계로부터 집중적으로 노려지고 있는 산국을 떠올렸다.
‘그 앞에 그림자가 드리운다고…….’
마계에서 지원 병력이 출발하기라도 했나?
저를 콕 짚어 ‘당신만이 걷어낼 수 있다’라고 말했으니 개중에 군단장이 섞여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것도 보통 녀석이 아닌 유독 강한 놈으로.
전 황제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에게 밀렸다지만 그건 그가 유독 특별했을 뿐, 스티그마는 영웅 중에서도 강한 사람이다. 이 정도의 자신감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후보는 1군단장이나 3군단장, 그도 아니면 인간과 계약한 군단장 정도가 되겠네.’
마지막에 덧붙여진 못난 후배가 보내는 부탁이자 선물이라는 말은 이 전언을 부탁한 자가 데온 하르트라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그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 그가 오만한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차갑고 귀족적인 얼굴 위로 온풍이 스쳤다.
“그래… 선후배 관계까지 들먹일 정도로 내가 움직여주길 바란다는 뜻이구나.”
데온 하르트의 전언은 온전한 선물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자신은 명예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맞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권력자와 엮여 발이 묶이는 것은 피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이름을 크게 알릴 수 있는 결정적인 장소에는 걸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배님도 이를 염두에 두고 ‘부탁’이라는 말을 포함한 거겠지. 참으로 발칙하고 귀엽지 않을 수가 없다.
“좋아 후배님. 특별히 들어주마.”
어차피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만나는 날, 그에게 미안할 짓을 하게 될 테니 이를 생각하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이것만으로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정도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사과를 대체할 만한 것을 찾아야겠노라 다짐하며 스티그마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큰 명예를 위하여.’
스티그마 프리미로를 어설프게 아는 자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스티그마는 ‘귀족 작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시간이 흘러 보다 멀리 보게 되면서부터는 그조차 ‘명예’의 방증의 되어주기에 손에 쥐었던 것뿐이니.
‘사생아’라는 출신과 더불어 받은 가문의 오점이라는 칭호, ‘오명(stigma)’이라는 이름은 도리어 제 이름을 드높일 ‘명예’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즉, 죽어서도 제 이름과 명예를 남기기 위한 방법을 구상한 그에게 있어 지금의 귀족 작위는 조금 아까워할지언정 필요에 따라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대륙의 역사에 내 이름을 낙인찍기 위해서라면야.’
일단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가면 뭘 해야 될지 알게 되겠지.
저의 안타깝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미안한 후배님을 위해, 그는 기꺼이 내키지 않는 장소를 목적지로 잡았다.
***
“순식간에 끝날 거야…….”
8군단장 헬이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린다. 가만히 듣던 데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당연히 내가….”
너였냐.
출정하는 날에 이렇게 굴면 어떡하자는 건지. 녀석의 부관도 같은 생각을 한 듯 서둘러 옆에서 등을 토닥였다.
“헬 님은 잘하실 겁니다.”
“잘할 자신이 없어…….”
“능력도 좋으신 분이 왜 그러십니까.”
“몰라… 나 따위가…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받아도 되는 걸까…….”
자존감이 땅을 파고 들어간다. 헬의 부관 나인은 제 여린 상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데온 님께서도 보고 계시는 상황인데 오늘따라 유독 심하다. 지금까지 받았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임무여서 그런가.
이를 어쩌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제 상관을 갈구며 지나가는 12군단장의 부관이 비쳤다.
“제가 제발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안 된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라고도 조언 드렸고요. 그런데 다른 군단장 앞에서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시비 거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싸움 날 뻔했잖아요!”
“…….”
“아이고, 이젠 대답도 안 하시네! 저 부관 그만두겠….”
“미안…….”
“안 들립니다.”
“미안!”
본인의 가슴을 퍽퍽 두드리던 12군단장의 부관 다하르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돌렸다. 제 상관을 다독이는 8군단장의 부관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동정을 담은 눈인사가 오갔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