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37
237. 나비효과(5)
전쟁 전에도 요주의 장소였던 마계와 인간계 사이의 경계선은 전쟁이 터진 이후 감시가 더 견고해졌다.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의 한계로 모든 경계선을 틀어막을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밤낮없이 감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때문에 항시 경계선을 주목하던 제국 측 병사는 어둠을 틈타 빠져나간 한 무리의 병력을 발견한 즉시 상부에 보고했고, 그들이 어디를 가는지 곧바로 눈치챈 황제 엘피디우스는 동맹국이자 마왕군에게 집중적으로 노려지고 있는 산국에 연락을 취했다.
“마계 측의 지원군이라…….”
통신을 끊은 산국의 왕이 태연히 중얼거렸다.
“마왕은 이 전쟁을 적당히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적당히 대치 상태로 굳어질 기미가 보이는 이곳에 다시 장작을 밀어 넣을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태연한 듯,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얹어졌다.
“제국으로부터 마족이 하나 소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의 지원이에요. 필시 그 마족이 활용되었겠죠.”
“그대의 말에 동의한다. 더욱이 일반 병력을 딸려 보낸 것을 미루어 봤을 때 놈의 능력에 그만한 자신감이 있는 것이겠지.”
일반 병력은 사실상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들러리. 핵심은 아마 ‘계약한 마족’일 것이다.
“그 정도의 자신감이라면….”
“계약한 마족이 최소 장수급은 된다는 말이겠지.”
“설마 군단장은 아니겠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통신기를 내려다보던 산국의 왕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저를 보는 사에린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길 바랄 수밖에.”
“…….”
“자, 그럼 이제 이동 경로를 예측해볼까.”
손뼉을 마주친 그녀가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가리킨다. 덩달아 조금 심각하게 굳어 있던 사에린의 시선도 움직였다.
만약 상대가 군단장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각종 제약이 걸린 상태의 군단장도 상대하기 버거울진대, 인간과의 계약을 통해 정당하게 나와 제약을 줄인 군단장을 어찌 상대하겠는가. 용사의 파편을 지닌 영웅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애초에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닌 데다 전 황제 에도아르도가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며 인재란 인재는 죄다 쓸어간 탓에 산국에 그만한 인재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불확실하고 불편한 주제는 암묵적으로 미뤄두고 지도를 눈에 담는다. 손가락이 한 부분을 짚고 길목을 따라 부드럽게 선을 그었다.
“지금 성문을 두드리고 있는 놈들은 이 루트로 이동했지.”
사에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었다.
“그리고 그 길목엔 각종 함정이 존재했었죠.”
“그 사실은 필시 놈들의 윗선에 보고되었을 테고.”
“네, 그러니 이번 지원 병력의 이동 루트는….”
지도에서 손을 뗀 연화가 사에린을 돌아보았다.
같은 생각을 하는 듯, 두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빛났다.
“같겠지.”
“같겠죠.”
연화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가장 빠르고, 잘 닦여 있으며, 선발대가 이동하며 대부분의 함정이 파훼되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맞아.”
산국의 이름이 어째서 ‘산국(山國)’인지 아는가.
산국은 산이 많은 곳에 위치해 있다. 에스페라네스처럼 주변이 산맥에 둘러싸인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산은 통행에 방해를 주기 충분하기에, 자급자족만으로는 무리가 있는 나라의 왕은 과거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와 염려를 뿌리치고 상단이 오가기 수월하도록 길을 닦아두었다.
마족들의 입장에선 아주 좋은 공격로일 터.
“하지만 놈들이 간과한 것이 있지.”
그녀가 이 길이 적들의 공격로로 쓰일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나. 애초에 신하들이 반대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는데.
잘 닦아둔 길은 허가받지 않은 자가 이용할 경우 함정이 발동되도록 설계해두었다. 때문에 그 길을 이용하는 사신이나 상단은 반드시 미리 연락을 취해 함정 작동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고.
함정의 작동 정지 및 발동 여부를 확인하고 관리하는 것은 길을 따라가면 도착하는 성 내에서 할 수 있다.
눈치챘는가? ‘관리’라고 했다. 연화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애초에 함정은 일회성이 아니었어.”
일회성이어서야 곤란하지.
함정이 발동되면 화살이 쏘아지고 바위가 굴러간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 한 번의 발동에서 저장되어 있던 모든 화살과 바위가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일정량의 화살과 바위를 소모하고 나면 함정은 다음 발동을 위해 작동을 멈췄다.
뿐이랴. 이쪽에서 장치를 조금만 만지면 바위가 굴러가는 출구가 바뀌고 화살이 겨누는 방향이 달라진다. 함정의 위치를 외우는 것이 소용없다는 뜻이다.
“전쟁 중 뒤따라오는 지원 병력이나 적들이 퇴각할 때를 노린 것이었는데, 이리 써먹게 되는군.”
역시 예산을 들이부어서라도 이리 설계하길 잘했다.
고작 이런 함정으로 ‘계약한 마족’은 어찌하지 못하겠지만, 일반 병력 정도는 충분히 피해를 입힐 수 있겠지.
“그보다 그놈의 ‘계약 마족’이 문제인데…….”
역시 계약자를 찾아 제거해야 하나.
부디 도착했을 때는 마족 측 지원군의 수가 많이 줄어있길 바라며, 연화는 계약한 마족이 어느 정도의 실력이고 어떻게 상대하는 것이 좋을지 유추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인간계에서 소환되고 마계에서 출발한 병력에 합류하여 이동한 8군단장 헬은 지금 상당한 고역을 겪고 있었다.
철컥.
불길한 소리가 감지되고, 어디선가 화살 비가 쏟아져 내린다. 헬은 급히 등 뒤에 매고 있던 무기 중 창을 빼 들어 화살을 쳐내며 창의 범위에 닿지 않는 곳에는 마법으로 일시적인 방어막을 쳤다. 제약이 줄었다지만 인간계라 그런지 마력이 훅 줄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가니 양 언덕에서 바위와 불붙은 통나무가 굴러 내려온다. 마법으로 막으려던 그는 뒤늦게 마법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방패를 꺼내 들고 가장 앞에 서서 그것들을 후려쳐 날려 보냈다. 그럼에도 전보다 더 많은 수가 죽었다.
참담했다.
[데온 님께서… 믿는다고 하셨는데…….]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관 나인의 다독임이 없었다면 분명 회복되기까지 많은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헬 님은 지금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마법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마법 억제 진의 범위에 들어왔다는 뜻이에요.]즉, 근처에 성이 있다는 뜻이니.
[거의 다 왔다는 말이죠. 조금만 더 힘내서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그 말을 위안 삼아 나아가는데, 얼마나 이동했을까. 언제 뭐가 날아올지 몰라 모든 이들의 신경이 위쪽에 향해 있을 무렵에, 이번엔 땅이 푹 꺼졌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그 아래 바닥에 꽂혀 날카롭게 위를 겨누고 있는 낡고 부러진 각종 무기와 뾰족하게 깎인 나무.
‘재활용 한번 확실하네…….’
8군단장의 부관 나인이 헬의 옆구리에 끼인 채 섬뜩한 바닥을 벗어나며 생각했다.
분명 앞선 병력이 이 길을 지나갔다고 들었는데, 그 새 함정을 재설치하기라도 한 건지 길목의 모든 함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멀쩡하게 작동되고 있다.
……혹, 일회성 함정이 아니었던 건가.
‘하긴, 이렇게 잘 닦인 길인데 그 정도의 방비도 없다면 곤란할 테지.’
이해는 됐는데… 문제는 이것으로 병력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저를 붙잡고 있는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인은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절로 욕설이 나왔다.
빌어먹을 산국.
‘왜 이렇게 함정을 꼼꼼하게 만들어서 우리… 상관 기를 죽이고 난리야.’
못돼 처먹은 것들. 나쁜 놈들. 인간 같은 놈들.
나인이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는 한편, 조금 전 함정에 말을 잃고 뚜벅이 신세가 되어버린 헬은 옆구리에 나인을 낀 채 멍하니 제 책임 하의 병력을 둘러보았다.
척 보기에도 출발할 때에 비해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모습. 절로 고개가 무겁게 떨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혼자 움직였다면….’
고유 능력을 이용해 큰 문제 없이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나인 한 명만 같이 데리고 이동하는 상황이었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무의식중에 뒤따라오는 병력을 두고 짐이라 생각하다가 제 생각에 지레 놀라 파드득 떤 헬이 이내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문제여서…….”
“아닙니다, 헬 님.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나인은 익숙하게 상관을 다독였다.
“일반 병력의 한계입니다. 8군단도 아니고, 딱히 정예도 아니잖습니까.”
“아냐… 그만큼 내가 신경 써서 잘 챙겼어야 했는데…….”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그게 어렵네…….
땅을 파고 들어갈 듯 우울한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아직까지도 옆구리에 들려 있던 나인은 헬의 팔을 툭툭 건드려 바닥에 내려선 뒤 제 상관을 돌아보았다.
“정 힘드시다면 제게 통솔을 맡기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으응?”
“제가 병력을 데리고 뒤따라갈 테니 헬 님은 먼저 가 계시는 겁니다.”
“……!”
무거운 짐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헬이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 멈칫한다. 금방이라도 긍정을 뱉을 듯한 기세는 어디로 간 건지, 짧은 침묵 끝에 그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예상과 달리 단호한 음성이 돌아왔다.
“아니야. 그러다 네가 죽으면 어떡하려고.”
나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전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만 해도 함정에 죽을 뻔했잖아…….”
“그건 방심해서 그렇습니다. 미처 바닥을 신경 쓰지 못했어요.”
“…….”
만약 그의 말대로 먼저 가버렸다가 나인이 한 번 더 방심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속절없이 죽는 거다. 입을 다문 채 제 부관을 보던 헬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데온 님께서 날 믿는다고 하셨어.”
“…….”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데려가야 해.”
“…….”
“내가.”
보기 드문 단호한 태도에 나인이 입을 다물었다.
……의욕이 생긴 건 좋은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데온 님, 믿는다는 발언… 효과가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느낌이 아슬아슬한 것이 금방이라도 역효과가 날 것 같아요.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억누르며 이곳에 없는 이를 속으로 부른 그는 끝내 답을 재촉하듯 따갑게 와닿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이 창술 또한 얼핏 보기엔 단순한 듯하면서도 깊게 파고들어 보면 수많은 갈래로 갈라져서 복잡하고 광활하지.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거야.”
후웅.
무기술을 가르쳐준다는 약속에 따라 데온과 함께 연무장에 나온 마왕이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창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막고 찌르는 것 정도가 되겠지. 막는 것에는 바깥으로 쳐내거나 안쪽으로 누르는 종류가 있고, 찌르는 건… 말 안 해도 알지?”
가장 먼저 가르치기로 한 무기는 창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연무장의 무기 중 손에 잡히는 것을 들었을 뿐이니까. 데온이 딱히 종류를 명확히 짚어 고른 것도 아니니 걸릴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창은 회수하는 것이 중요해. 찌르는 동작의 특성상 공격했을 때 가장 큰 빈틈을 드러내게 되거든. 제때 회수하지 못한다면 목숨과 직결되는 반격을 당할 거야.”
“…….”
“기억해. 찌르고 회수하는 것까지가 한 동작이야. 동작은… 이렇게.”
쉭. 창이 데온의 머리 옆을 찔렀다 빠진다.
용사의 눈이 아니었다면 잔상만 보고 끝났을 정도로 민첩하고 깔끔한 움직임에 창이 지나간 자리를 눈으로 훑은 데온이 시선을 들어 마왕을 보았다.
그는 뻔뻔하게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봤지?”
“…….”
대답 대신 마왕이 들고 있는 창에 손을 뻗었다. 그가 순순히 창을 넘겨주고, 그것을 받아든 데온은 무게 중심을 가늠하듯 몇 번 창대를 고쳐 쥐어보다가 어느 순간, 쉭- 마왕의 머리 옆에 창을 찔러넣었다.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
창의 움직임을 따라간 역안이 이내 저를 향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본다.
눈이 마주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새빨간 눈동자가 휘어진 눈꺼풀 사이로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