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39
239. 나비효과(7)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먹 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통신석을 부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나인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죄송하지만 말을 바꾸겠습니다.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방금 생존자의 수가 바뀌었습니다. 생존자는 0명. 전멸이라고 보고하십시오.] [부관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슨 말씀을….]툭. 끊긴 통신석이 바닥에 떨어지고, 군화가 그것을 부쉈다.
어차피 회수하지 못할 통신석이다. 최소한 적의 손에는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아예 바닥에 짓이기다시피 발을 비빈 나인이 가루가 된 그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그가 입을 연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입 모양만큼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도망가지 않았구나.]“…….”
대답 대신 붙박여 있던 걸음을 뗐다. 저 빌어먹을 영웅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며 나인은 부서질 듯 웃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 똑바로 뜬 두 눈이 시큰거렸다.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는 나도 알고 있어.’
도망쳐야 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군단장의 부관은 부군단장의 역할도 하는 동시에 일부 군단장 후보이기도 하다. 군단장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귀중한 전력이라는 말이다.
도망칠 시간 또한 제 상관이 벌어주어 충분했으니, 도망쳐야 했다. 그게 옳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초에 제 선택지에는 상관을 두고 도망친다는 것이 들어있지 않았다. 제가 떠올린 최선의 방법은 전투에 방해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그 상관이 죽었다.
하얗게 질린 머리가 의식의 흐름대로 질문을 던진다.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무엇이었더라.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먼저 가.]참으로 담담했던 것 같다.
[귀찮았을 텐데, 나 같은 것을 열심히 챙겨줘서… 정말 고마웠어.]그림자는 항상 누군가의 발밑에 밟혀 있다. 헬은 그림자였다.
그런 자신 따위가 누군가의 위에 서고, 어깨를 나란히 해도 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어색하다고도 말했었다.
야망이 있는 다른 부관이었다면 옳다구나, 하고 그 위에 올라서려 들 정도로 낮은 자존감과 순진함. 처음 부관으로 들어왔을 때 마왕님께서 능력을 백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우라 명하시지 않았다면 저 역시 집어삼키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작이 어떻고 속내가 어땠든, 그 낮은 자존감 하나 살려 제대로 된 군단장 만들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어르고 달래가며 키웠는데.
……내가 키운 내 군단장인데.
“왜 돌아왔니? 그냥 도망쳤다면 보내주려 했는데.”
“……그 발부터 떼시죠.”
“이런, 실례.”
그가 한 걸음 물러선다.
고스란히 드러난 헬의 시신에 나인의 눈이 흔들렸다. 이미 멀리서 보았음에도, 업어 키우다시피 했던 이의 죽음은 가까이에서 다시 보니 새삼 더 충격적이었다.
후회가 심장을 짓눌렀다.
‘……억지를 써서라도 내가 남았어야 했어.’
상대는 괴물이었다.
근처에 성이 있어 마법 사용이 억제되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고유 능력을 이용해 그림자에 숨으니 감으로 위치를 파악해 땅에 검을 박아 부상을 입혔으며, 그림자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해도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반응했다. 등 뒤로 이동해 기습하는 것조차 소용없었다.
전투에 특화된 듯, 짐승처럼 기민한 감각.
질 가능성이 농후한 전투다. 피하는 것이 옳았다.
그 사실은 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아.]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인은 숨을 멈췄다.
우리가 문제구나.
전투로만 밀릴 뿐이지, 혼자였다면 충분히 몸을 빼고도 남았을 헬이 계속 이 자리를 맴돌며 저 영웅을 상대하는 이유는 저희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퇴각해! 흩어져도 상관없다! 이전 성에서 다시 모….] [내가 이 말을 깜빡했구나.]태연한 목소리에 금방 가로막혔지만.
정확하게 헬이 숨어든 그림자에 검을 박아넣은 ‘영웅’이 매끄럽게 웃었다. 검을 뽑자 날에 피가 묻어났다.
[너희는 도망치지 못한단다.] [……무슨 개소리를….] [용병을 고용했거든. 이 주변을 포위하게 했지. 공들여서 뽑은 쓸만한 이들이란다. 군단장이나 직속 수하 같은 실력자라면 모를까, 마법도 못 쓰는 일반 마족 병사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거야.] […….] [뭐, 내가 죽는다면 돈 줄 의뢰인이 사라지니 그냥 물러가겠지만.]제 상관이 각오를 다지는 것이 느껴진다. 삐끗하면 정말 다 죽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 나인은 주먹을 쥐었다.
현 상황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무엇이지? 어떤 수를 써야 할까.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어떤 수를 써도 모든 걸 챙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두뇌는 비교적 가벼운 것을 버리고 중요한 것을 챙기기를 택했다.
[헬 님, 제가 남겠습니다.]일반 병사와 부관은 버리고, 군단장을 살린다.
차라리 제가 상대할 테니 도망치시라 말했다. 부관보다는 군단장이 중요하므로 객관적으로도 맞는 판단이었다.
[싫어.]그럼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제 상관이 드물게도 고집을 부려서.
[데온 님께서 믿는다고 하셨어.] […….] [최소한 부하들은 살려 보내야 해.]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결국 부작용이 터졌구나. 약발이 너무 들었어.
확실히 부하가 대단하시다고 떠받들어주는 것보단 능력 좋고 존경하는 존재가 인정해주는 것이 더 효과가 좋긴 하겠지만…….
‘데온 님…….’
터져 나오려는 한탄을 억지로 밀어 넣고, 현실로 돌아와 눈앞의 ‘영웅’을 노려보았다.
상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녹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맞춰 흘러내렸다.
“분명 네 상관이라는 자가 너 하나만이라도 살리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할 생각이니?”
“닥쳐.”
일반 병사들은 전부 죽었다.
흩어지지 말고 모여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돌파하라는 명령도 소용없었다. 포위망을 뚫는 것보다 용병들이 모이는 것이 더 빨랐으니까.
불행히도 그들은 팀을 이루어 서 있었으며 신호탄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네놈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니.”
“……대단한 충성심이구나.”
내가 악역이 된 듯한 기분이야. 분명 침략자는 너희인데 말이지. 스티그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정 죽고 싶다니 어쩔 수 없지.”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만.”
“단호한 대답이구나.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홀로 맞서는 것이 죽고 싶은 게 아니면 뭐겠니.”
“……난 그저….”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나인이 끝내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 감정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계의 상식을 넘어 인간계의 상식까지 뒤진 끝에, 기어이 그럴싸한 비유를 찾은 그가 말했다.
“……자식새끼 죽인 놈을 눈앞에 두고 그냥 물러갈 부모가 어디에 있겠어.”
“……그렇구나.”
이해했다. 스티그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8군단장을 죽인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더 피를 볼 이유가 없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상대해주는 수밖에.”
신호탄도 사용된 판국이니, 어서 끝내자꾸나.
신호탄을 보고 사람을 보낸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산국이라든가, 혁명군이라든가. 이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귀찮은 세력과 엮이게 될지도 모르기에, 가볍게 검을 휘둘러 검에 묻어 있던 피를 털어낸 그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망설임 없는 태도로 검을 겨눴다.
***
몸이 무너진다. 시야가 흐려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패배가 확정 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정해진 미래이긴 했다.
‘곧 죽겠네.’
나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현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고통은 참을만하니 괜찮다. 죽는다는 사실도 미리 각오하고 있었던 만큼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
근처에 널브러진 헬의 시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 뭔지 아나?”
“……흠?”
“육신을 이루는, 마력을, 사용한 마법이지.”
마족들의 육신은 마왕의 마력으로 이루어진다. 순수한 마력만으로 이루어졌든, 혹은 다른 무언가가 융합되었든 마력이 들어간다는 것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를 활용한 마법은 마력을 전부 소모한 마족조차도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일지니.
이를 그냥 낭비할 생각은 없기에 숨이 끊기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혼과 직접, 관련된, 마력이기도 해서… 잘 쓰이진, 않지만.”
호흡이 모자라 말이 뚝뚝 끊겨 나온다.
강자의 여유인 것일까, 마지막 말 만큼은 들어주고자 하는 자비인 것일까.
용케 목을 베지 않은 채 점차 작아지는 목소리를 묵묵히 들어주는 상대를 향해 흐리게 웃었다.
“[네가 진정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음?”
“[너의 목숨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5군단장이 말하길, 인간은 소망과 목숨을 가장 중히 여긴다고 들었다.
소망은 삶의 목표이자 이정표라고 했지. 그게 없으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도리어 귀중한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고 했다.
헬 님을 죽인 자에게 복수도 못 하고 그냥 갈 생각은 없다. 고로 너의 소망과 목숨,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저주를 걸었으니, 네놈은 과연 무엇을 포기하겠는가.
육신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조각나기 시작한 시야가 어지러워 나인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어렴풋이,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지를 던져주고 갔네.”
순수하긴.
***
통신이 끝났다.
데온은 수위가 더 높아진 핏물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왕과 눈이 마주쳤다.
태연한 척 품을 뒤적여 새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
말없이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마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네 잘못은 아니지. 거기서 뜬금없이 제국의 두 번째 영웅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
“그보다는… 담배 말이야.”
아니지, 약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 말라는 의미로 직접 빼가기까지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리 당당하게 다시 꺼내 드는 것을 보니, 참….
“약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 같은데…….”
“……용사는 약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육체는 그럴지 몰라도 정신은 아니지.”
“…….”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가벼운 한탄과 함께 데온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머니와 품속까지 뒤져 죄다 앗아간 마왕이 싱긋 웃으며 손에 들린 것을 흔들었다.
“많기도 해라. 이래도 중독이 아니라고?”
“…….”
“지금까지 누누이 경고했음에도 너는 무시해왔지. 이전까지는 ‘자제’의 기준선이 애매해서 그냥 넘어갔다지만 이번엔 아니야.”
와작.
담뱃갑이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지금부터 네게 담배 금지령을 내릴게. 혹시 모르니 마약 금지령도 내려야겠네. 담배 형태가 아닌 약을 하며 ‘담배’가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으니까.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
“무슨…!”
“데온.”
나직한 목소리가 말문을 막았다.
“내가 더 이상 담배 피우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지 얼마나 지났지?”
“…….”
“하루는커녕 1시간, 아니 30분도 되지 않았어. 그렇다고 딱히 자리를 옮긴 것도 아니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시 담배를 꺼냈지.”
마왕은 가볍게 눈을 휘어 웃었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아예 내 뜻을 대놓고 무시했으니 이 정도 벌은 내려도 될 것 같지 않아? 넌 내게 할 말이 없어야 해.”
“……하지만.”
“0군단장.”
마왕의 눈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마왕의 말을 들어야지?”
“…….”
‘용사’나 ‘데온’이 아닌 ‘0군단장’.
말뜻을 눈치챈 데온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알겠습니다.”
“그래.”
언제 그랬냐는 듯 눈매가 웃음기를 담고 다시 휘어진다.
그 모습이 가증스럽고 재수 없어 데온은 속으로 욕을 읊조리고 말했다.
“퉤.”
“……?”
아, 이게 아니지.
“그럼 전 이쯤에서 계획 수정을 위해 방에 돌아가 보겠습니다.”
“……방금… 퉤, 라고.”
“예? 제가요?”
“…….”
뭐… 약을 빼앗겼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질 만도 하지.
얼빠진 표정도 잠시, 키득거리며 작게 웃은 마왕이 들어가 보라는 뜻을 담아 손을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