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4
24. 들춰진 베일(7)
건물 밖에서 제 상관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에드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는 그를 멍하니 보다가 다급히 시선을 돌려 건물 안을 확인했다.
얼마나 죽인 건지 확인하려는 의도였으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외의 장면이었다.
‘시체가 없어…?’
분명 저 정도 양의 피를 뒤집어썼다면 학살을 벌였다는 것인데.
이질적인 침묵이 가득하긴 하지만, 적어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1층에는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직접 묻는 수밖에 없어 에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아니, 그 전에 몸에 피는 대체….”
“데몬 님 피 아니다.”
대답은 벤이 대신했다. 에드는 순간 발끈했다.
지금 자신이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는가.
몸에 묻은 피가 당사자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한다면, 애초에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재차 말을 꺼내려는 순간, 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질린 듯한 표정.
주로 데몬 님의 전투를 직접 본 이들이 많이 보이는 표정이다.
자신 역시 그런 표정을 종종 지었기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
‘그래 그거. 눈치 없긴.’
하도 평화에 젖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0군단장의 전투 스타일을.
다른 군단장들의 전투와 확연히 다른 그의 전투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평범한 전투에 빗대어봤으니 답이 나올 턱이 있나.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는지.
아연한 표정의 에드를 무시하고 제 뺨에 잔뜩 튄 피를 손바닥으로 훔친 데온이 혀를 내밀어 그걸 슬쩍 핥는다.
그리고 얼굴에 배어 나오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웃음과 다시 광기를 내비치기 시작하는 붉은 눈동자에, 에드는 기겁하며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로 닦으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어차피 싸우러 가는 거 아니었어?”
“피가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까. 최소한 얼굴은 닦아주십시오.”
“흐음.”
다행히도 더 이상의 거절은 없었다.
순순히 손수건을 받아 들어 얼굴을 닦는 제 상관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에드가 일이 터지기 전에 속히 전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서둘러 성벽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엔 규모 자체가 다르다더군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마물에게도 감정이 있느냐’지.”
“확실히 있습니다.”
“나도 알아.”
아니까 여기에 있는 거고.
너무 고지식한 것 아니냐는 웃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분명한 웃음기와 장난기가 담겨 있는 말임에도 에드는 괜히 고지식하단 말을 들은 게 아니라는 듯 굳은 표정을 푸는 대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처음 0군단장의 부관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이러한 모습을 보였을 때, 에드는 극도로 혼란스러워했다.
분명 같은 존재다. 하지만 다르다.
여태까지 보여 온 모습과 정반대의 성격을 보이는 자신의 상관을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고민에 소모한 긴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가 보이는 태도에 맞추면 되는 것이었으니.
성격이 바뀐다고 하여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기억도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으니 그저 과히 변덕스러운 존재를 상대한다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현재의 0군단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빈틈없는 태도로 대하는 것이 옳았다.
느슨하게 대했다가 자칫 심기라도 거스르면 ‘그’는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됐어. 그래서 내 무기는?”
“여기 있습니다.”
그가 몸에 착용할 수 있는 단검과 검집들을 여러 개 내밀었다.
데온은 익숙하다는 듯 그것들을 받아들고 하나씩 착용하기 시작했다.
양 허벅지, 양 허리춤, 그리고 등허리에 단검 두 개를 교차해서 총 여섯 개의 단검을 착용한 그는 마지막으로 에드의 양손에 들린 로브와 망토를 번갈아 보더니 망토를 집어 들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니까 로브까지는 필요 없지.”
펄럭.
검은 망토가 크게 휘날린다.
빠진 건 없는지 확인하며 걸음을 옮기던 데온이 잠시 멈춰서서 슬쩍 뒤를 돌아봤다.
얼빠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건물 안 마족들.
어렴풋이 0군단장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이쪽의 정체를 눈치챈 듯싶다.
‘뭐, 딱히 상관없지만.’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저마다 후다닥 몸을 피하는 이들을 지켜보던 그는 이내 픽 웃으며 돌아섰다.
어느새 붉은 눈동자에는 보기만 해도 비릿한 냄새가 배어날 것 같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얼굴 가득 유쾌한 미소를 띤 데온이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집어넣으며 말했다.
“가자.”
***
감았던 눈을 떴다.
어설프지만 나름대로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
조금 더 시야를 넓히자 보인 것은 그 뒤로 펼쳐진 끝없는 하늘.
잠시 뒤면 살육의 잔치가 벌어질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게 맑은 하늘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연단 위에 서 있었다.
두려움과 긴장, 불안함과 불만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감추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나’는 말했다.
“선봉대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지.”
말없이 고개를 쳐드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하나는 강력한 힘으로 함정을 돌파하고 적들을 짓밟으며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진짜 선봉대. 다른 하나는 몸으로써 함정을 파악하고 강력한 적들의 공격을 상쇄하는 일명 고기방패.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후자겠지.”
이를 악무는 놈들이 시야에 비친다.
반박하고 싶겠지. 아니라고 외치며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겠지. 하지만 분명 잘 알고 있으리라.
일반 병사에서 갓 지휘관이 된 ‘나’. 그리고 그 지휘관을 위해 급조된 병사들.
이를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부정할 만큼 뻔뻔한 놈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침묵하는 그들을 향해,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전투에 참여해봤으니 전장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겠지. 잊은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 쉴 새 없이 전장에 울려 퍼지는 병장기 소리, 피를 머금어 붉게 물든 질척한 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매개체 삼아 흐르는 ‘광기’.”
“…….”
“정신을 집어삼키려는 광기에 저항한 사람도 있을 테고 먹힌 사람도 있을 테지. 그러니 이참에 말해두겠다.”
눈빛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눈빛이다.
아마 ‘광기에 먹히지 말라’는 둥의 식상한 말을 예상하고 있겠지.
우스운 생각이다.
‘나’는 이 황당할 정도로 나약한 몸을 가지고 이 미친 곳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식상할 리가 없잖은가.
“광기에 먹혀라.“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귀를 의심하는 듯 놀란 표정의 저들의 향해 끓어오르는 광기를 고스란히 내비치며 말했다.
표정에서, 눈에서 드러난 광기에 몇몇 이들이 흠칫한다. 물러서려던 것을 간신히 멈춘 이도 있었다.
“단, 어설프게 먹혀서는 안 된다. 완전하게 먹혀라. 이성은 적아를 구분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
광기에 먹히지 말라는 말은 제대로 된 검술을 가지고 있는 기사 이상의 이들에게만 통용되는 말이다.
변변찮은 검술 하나 익히지 못한 우리가 이성을 유지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자고로 맹수는 침착해야 사냥에 성공하는 법이고, 양은 온순한 녀석보다 미쳐 날뛰는 녀석이 더 잡기 힘든 법이다.
우리는 양에 불과했고, 수많은 맹수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해야 할 방법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하나였다.
“온전한 시체를 만들지 마라. 죽었다고 판단되더라도 난도질을 멈추지 말 것이며, 그것의 배를 갈라 내장을 헤집어놓아라. 멈추는 건 이 이상 너덜너덜해질 수 없다고 판단될 때다.”
질렸다는 눈빛이군.
고작 말뿐인데 사색이 되다니, 우습지도 않다.
이 어설픈 정신머리로 전장에 섰다간 백이면 백, 전부 죽는다.
원해서 선봉장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 서버린 이상 제 밑의 병사들을 죽게 할 생각은 없었다.
책임감 따위가 아니다. ‘나’는 병력을 전부 잃었다가 그로 인해 올 불이익을 걱정하고 있었다.
병력을 모두 잃어버린 지휘관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배가 없는 ‘나’ 같은 녀석이라면, 분명 목이 날아갈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고작 저런 새끼들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네놈들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잊은 모양인데, 정신 차려!”
그건 억울해서 인정 못 하겠다.
놀라서 커진 눈들이 나를 향한다.
‘나’는 그 눈 하나하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적들이 상대 따져가며 검을 휘두를 것 같냐? 강제로 끌려온 거라고 외치면, 그렇구나- 하고 봐줄 것 같아? 여기까지 와서 도덕, 도의 같은 거 따지고 싶은 새끼 있으면 당장 나와. 적들과 한 번 도의에 대해 토론해 보라고 친히 놈들 앞에 던져줄 테니까!”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모래가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뒹굴고, 나뭇가지가 파르르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소리가 전부 들릴 정도로, 탁 트인 평야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약하다. 그리고 이곳은 약한 놈은 도태되는 전장이지.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개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거냐.
그런 의미의 질책이었다.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 속에서,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싸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전투에서 빠지지도 못하는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론 하나다.
──「심리전」.”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거다.
함부로 덤비지 못하도록. 함부로 검을 겨누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공포를 심어주어야 할까.
“이질감.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어줘라. 전장에서의 이질감은 어떠한 과정을 걸치든 결국엔 공포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 공포는 적의 손발을 둔하게 만들 것이고, 종국엔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겠지. 우리는 그런 녀석의 목을 따는 거다.”
그래, 우리는 전장의 하이에나가 된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살기 위해 하는 행동에 비겁이 대수인가.
그럼 이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에 대해 논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전쟁터라는 이 한정된 공간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은 역시 몇 개 없다. 사실상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에 불과하지. 일단 전부 말해 주자면─”
하얀 붕대가 손끝까지 꼼꼼히 감긴 팔을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놈들이 가득한 전쟁터에서 혼자서만 먼지 한 톨,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이번엔 특별히 지급받은 하얀 망토를 펄럭였다.
“아니면 피투성이, 먼지투성이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돋보일 정도의 피를 뒤집어쓰거나.”
당장 검을 피해 바닥을 나뒹굴어야 하는 우리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으니 결국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자신들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한층 더 어두워진 얼굴로 침묵하는 병사들을 보며, ‘나’는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릿한 피 냄새가 배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피를 뒤집어쓴다. 전쟁에 익숙해진 이들조차 경기할 정도의 잔인한 손속을 선보이며.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꼴로 웃으며 검을 휘두르는 거야. 또한 적에 환장하는 꼴을 보이는 게 좋겠지.”
한 마디로 광기에 먹혀버려라, 이거다.
도망치는 놈은 표적이 된다.
하지만 오히려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미친놈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우리는 ‘진짜 선봉대’가 될 수 없다.”
“…….”
“하지만 고기 방패도 되고 싶지 않지. 그러니 우린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간다.”
진짜 선봉대가 아군의 기세를 끌어올린다고 말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적들의 기세를 끌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