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42
242. 나비효과(10)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어. 하마터면 약속이 겹칠 뻔했단 말이지.”
기품이 묻어나는 어조가 미미한 장난기를 담고 투정을 흉내 낸다.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빙긋 웃었다.
“나이가 드니 잠이 적어지더군요. 설령 약속이 겹쳤다 해도 충분히 기다려드릴 의향이 있었습니다. 멋대로 일찍 온 것은 이쪽인 것을요. 그보다…….”
은청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요즘 소문이 자자하신 분께서 이 늙은이에겐 무슨 볼일이신지요.”
“소문이 자자하다고… 부정은 하지 않겠다만,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대륙을 떠도는 사람’과 연관된 소문에 ‘스티그마 프리미로’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니. 스티그마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눈은 웃지 않는 상태였다.
‘영웅’의 소문에 묻혀 크게 알려지지는 못했지만 물 밑에서 꾸준히 알려지고 있는 소문이 하나 더 있다. 몬스터를 때려잡는 노인에 관한 소문이었던가. ‘영웅’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소문이기도 하고 어떠한 희망이나 기대도 주지 못하는 소문이라 힘없이 묻히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는 엄연한 진실이다.
눈앞의 노인, 레멤베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륙을 떠돌고 있었다.
“혹 용병 중개에 관한 뒤늦은 소식을 듣고 찾으신 것이라면 늦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늙은이는 이미 은퇴하여 더 이상 권한이 없습니다.”
“그 정도는 중개인이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단다. 그런 목적이 아니야.”
……그럼 무슨 용무를 저를 찾았단 말인가.
용병 지원을 강행하고, 그 혜택을 받은 제국이 벼랑 끝에 몰린 지금, 레멤베르는 에스페라네스를 위태롭게 한 대가로 중개인 자리를 내려놓고 은퇴했다.
신분과 인맥으로 왕국에 귀환하는 것을 늦춘 채 역사서를 편찬하기 위해 대륙을 떠돌고 있다지만, 더 이상 제겐 어떠한 권한도 없는데.
조금 싸울 줄 아는 것이 전부인 한낱 노인이 얼굴 위에 의문을 드러냈다. 이에 답을 주듯 스티그마가 말했다.
“역사서를 쓰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딱히 숨기지 않았으니 충분히 들으실 만도 하지요. 한데 그게 왜….”
“동행 제안을 하려고.”
“……예?”
절대 당황하는 일 없던 노인이 눈을 조금 키웠다.
우아한 사내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린다. 더없이 기품 넘치는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도 대륙을 떠돌고 있고 너도 떠돌고 있으니, 같이 다녀도 문제 될 것 없지 않겠니?”
늙어서 상대하기 버거운 몬스터도 있을 텐데.
나와 함께 다니자꾸나.
***
“사실은 말이야.”
“?”
적막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슬슬 침묵에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제게 닿든 말든, 데온은 단에겐 시선도 두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체에스’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짐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단이 섣부른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금방이라도 답할 듯 열었던 입은 굳게 다문 지 오래였다.
딱히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데온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했지.”
짐이 될 것을 알면서도 8군단장에게 일반 병력을 딸려 보냈다. 차라리 그 혼자 보내는 것이 더 효율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목을 잡기 위해 부러 그렇게 했다.
“믿는다는 말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하면 녀석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알고 있었다.
쉽게 포기하고 돌아오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았다. 짐인 일반 병력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족쇄를 매어두었다.
바닥에 차오른 핏물이 출렁인다. 피비린내에 머리가 아파 오는 듯해 습관적으로 품을 뒤지던 데온은 수중에 약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빈손을 툭 떨어뜨렸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끠액.”
녹색 줄기가 손등을 토닥인다. 멈칫한 데온이 시선을 내렸다.
“……진정하라고?”
“끠액!”
“허…….”
……살다 살다 식물에게도 토닥임을 다 받네.
어이가 짜증까지 끌어안고 날아간 듯, 피식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의 짜증이 거짓말인 것처럼 기분이 나아져서,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토닥임을 받다가 손을 움직여 길게 뻗어 나온 녹색 줄기를 잡았다.
“끠액?!”
“왜 놀라.”
“끩!”
“……?”
경계하듯 다른 줄기로 데온의 주위를 쉭쉭 찌르던 녀석이 물음표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고는 우뚝 멈춘다. 돌이라도 된 듯 굳어버린 모습에 데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단단하던 줄기에서 힘이 빠졌다.
“끠애애….”
“몸은 또 왜 비비 꼬는… 너 어디 아프냐?”
“그게 아니라 평소에 장난만 쳤으니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경계하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좋아하는 모양이죠. 제 눈에는 내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
그제야 데온의 시선이 단에게 닿았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제법 볼만한 얼굴이었다.
“내외…? 얘 암컷이었어?”
“매너를 봐서는 수컷 같기도 합니다만…….”
“그럼… 자웅동체인가? 아니, 애초에 이 녀석 식물이잖아. 식물에도 암수가 있…긴 한데…….”
응, 있네…….
넋 놓고 중얼거린 데온이 이내 화분을 붙들고 대화를 시도했다. 내용은 가관이었다.
너 암컷이야? 끠액.
수컷이야? 끠액.
자웅동체야? 끠액.
뭐야, 어쩌자는 거야? 끠액.
시발.
지켜보던 단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닌가? 다시 묻는다.”
너 나 좋아하냐?
끠액!
시발.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있어야지…….”
“알아듣는 쪽이 이상한 겁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기분도 나아졌으니 이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볼까.
실없는 노닥거림은 여기까지다.
방해하지 말고 혼자 놀고 있으라며 주둥이이자 눈으로도 보이는 꽃봉오리의 중심부를 손가락으로 쿡 찌른 데온이 발광하는 괴식물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 테이블을 보았다. 녹색 줄기가 쉭쉭 찌르고 들어왔으나 한 손으로 파리 쫓듯 쳐내며 다른 손으로 판을 만졌다.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에 단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좀 가벼워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는데.
분위기가 심각해질 때마다 저 식물이 끼어 들어준 덕분에 최근 들어 숨 쉴 구멍이 생긴 느낌이다. 식물을 상대할 때만큼은 데온 하르트도 보다 누그러지는 것 같고. 훨씬 인간적이게 된다고 해야 할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저 식물이 제2의 로프티 기사단 역할을 맡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아, 이건 저 식물에게 실례인가.
어쨌거나 새삼스러운 눈으로 괴식물을 보는데, 날아오는 줄기를 낚아채 테이블에 눌러 제압한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단. 게임 한 판 할래?”
“테이블 위의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단은 저번에 만드셨던 ‘체에스’인 것 같긴 한데… 이전 것과 뭔가 많이 달라졌네요.”
“게임판 자체를 슬라이딩 퍼즐 형태로 바꿨을 뿐이지, 기본적인 건 바뀌지 않았어.”
단은 지쳐 얌전해진 괴식물을 힐긋 확인하고 천천히 테이블에 다가갔다.
이전과 같이 칸 수가 많은 체스판의 형태를 기본으로 칸 안에 산, 강, 들판 등의 지형이 새겨져 있으나,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양측의 진영 부분은 판 조각이 빠져 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게임 시작 전에 지형을 정하는 거군요.”
“맞아. 번갈아 가며 판 조각을 밀어서 지형을 바꾸는 거야. 상대가 밀어둔 판 조각을 그 직후 턴에서 바로 제자리에 돌리는 것은 불가능. 판을 미는 횟수는… 20면체 주사위 두 개를 굴려서 정하는 것으로 하고.”
“물자가 풍부한 땅은 본인의 진영에 가깝게, 척박하고 험한 땅은 방어에 용이한 위치에 오도록 유도해야 하는 거겠죠.”
“그렇지. 이후의 게임 진행은 저번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생략하고, 지형 정하기까지만 해볼까?”
“…….”
단은 대답 대신 데온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게임이 본 목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척 보기에도 하고 싶은 말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가 차마 뱉지 못하고 끝내 삼키는 것을 반복하고 있으니, 아마 시간을 벌기 위해 제안한 것일 터.
‘인간성의 밑바닥을 거의 다 내보인 사이끼리, 새삼 양심에 찔리거나 추악한 면모를 보이기 꺼린다는 이유로 말하길 망설이는 것은 아닐 테고…….’
답이 없는 것이 이상한 듯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눈이 마주쳤다.
재촉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지 나올 것도 없고 감히 재촉해 캐물을 수도 없는 상대다. 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
데온의 입은 생각보다 빨리 열렸다.
게임 진행 내내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던 그가 중반쯤 왔을 때 판 조각을 밀어 단이 가져가려던 지형의 위치를 바꾸며 운을 뗐다.
망설임이 선명히 느껴지는 음성이 천천히 공간을 채웠다.
“그때… 네가 화면 앞에서 했던 발언 말이야.”
“네.”
“……진심이야?”
화면 앞에서 했던 발언이 한둘이 아닐진대 그리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단은 판을 밀어 턴을 넘긴 뒤 가만히 데온을 쳐다봤다. 뒤늦게 본인의 실수를 눈치챈 데온이 말을 덧붙였다.
“크루엘이 나를 마계에 보낸 이유에 대해 네가 말했었지.”
“아.”
뭔지 알겠다.
“그거, 진심이었어?”
정말 형이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가며 나를 위했을까?
분명 제게 독심술 같은 능력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가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삼킨 말이 들리는지 모르겠다. 단은 한숨을 삼켰다.
“인간계에 갈 생각이십니까?”
“…….”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신데, 그게 아니고서야 새삼 이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죠. 보아하니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도 염두에 두신 것 같고…….”
손을 들어 턱 언저리를 문질렀다.
그것도 잠시, 주먹을 쥐고 검지 마디를 입술 밑에 댄 그가 얄밉게 씩 웃었다.
“막상 결심을 하니 감회가 새로우신 모양입니다?”
“……눈치는 빨라가지고.”
“제가 마스터를 하루 이틀 봅니까?”
재수 없다며 은근히 독설을 날리는 데온 하르트를 향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 생각에 잠겼다.
……만인의 앞에서 공작의 죄를 까발릴 때, 어째서 크루엘 하르트가 다른 선택지를 두고 굳이 데온 하르트를 마계로 보낸 건지에 대한 폴의 물음이 있었다.
그때 했던 대답이, 아마 이거였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확실시된 상황인 만큼 지키고자 한 대상을 가장 안전한 장소에 보내고 싶었겠지.]별거 아닌 발언이었는데, 데온 하르트에게는 다르게 와닿은 모양이다.
어느덧 게임은 마지막 턴에 진입했는데 데온 하르트가 움직이지 않으니 진척이 없다. 고정되어버린 판을 쳐다보던 단은 고개를 들고 저를 보는 붉은 눈을 마주했다.
“무슨 대답을 바라십니까? 다 알고 계시면서.”
“…….”
“크루엘 하르트는 살아있는 동안 철저하게 마스터의 눈을 속이고 감췄습니다. 그 탓에 마스터는 그가 죽고 나서야 진실을 알고 그의 희생과 배려를 깨달았죠. 여기서 감히 여쭙자면, 과연 마스터가 알게 된 것이 전부일 것 같습니까?”
이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은 데온을 향해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 마스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분은 마스터를 위했을 겁니다. 사실 지금까지 알게 된 것만 생각해봐도 이 이상으로 위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
“어쨌든 그분은 마스터의 안전과 생존을 최우선에 두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마계를 택했죠. 그리고 마스터는 그분의 의도대로 생존했고, 용사가 되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벗어났습니다.”
단순히 벗어났다 뿐일까, 그를 위협할 수 있는 개인은 단 한 명밖에 없을 정도인데.
시선을 내렸다.
슬라이딩 판의 지형은 이미 데온 하르트에게 유리한 쪽으로 짜였다. 단은 검지와 중지로 데온 하르트가 유일하게 챙기지 못한 마지막 판을 짚고 손수 밀어 넣어주며 말했다.
“그러니 새삼 형님의 뜻을 어기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시죠. 이미 몸소 인간계에 나가 싸운 전적도 있으면서 왜 이제 와 떠난 자의 눈치를 보고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