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52
252. 용사의 의의(1)
제아무리 군단장과 부관의 사이라지만 12군단장이나 이미 죽어버린 전 8군단장 같은 특별한 부류가 아닌 이상 보통은 서로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 편해지고 신뢰가 쌓여 어느 정도 내보이는 사이가 되었다 해도 최후의 약점만큼은 숨겨두는 것이 당연한데.
오엘 또한 부관이 상관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위험한 약점 중 하나가 눈물임을 알기에 일반적인 군단장들과 마찬가지로 부관인 데르니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인간계에서 적당한 자를 물색해보겠습니다.”
데르니반은 답지 않게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
데온은 닦이진 않았지만 함정 없는 길로 이동했다.
물론 함정만 없을 뿐, 중간중간 혁명군이나 산국의 병력이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왔으나, 그들이 무기를 들기도 전에 으스대며 나선 10군단장이 본인의 휘하 병력과 함께 날뛰며 모조리 쓸어버려 데온이 직접 나설 일은 딱히 없었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 탓에 자꾸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쨌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기존 병력과 합류한 데온은 인수인계를 받기 전에 돌아가는 전황부터 확인했다.
애초에 엎치락뒤치락하며 대치 상태로 굳어가던 상황이라 지원을 보냈던 것인데,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전멸하여 양측 병력의 ‘사기’에 영향을 줘버렸다. 심지어 그냥 지원군도 아닌 무려 군단장이 속해 있는 지원이었으니 그 여파는 심상치 않았을 터.
예상했던 대로, 이러한 상황은 팽팽하던 전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는 티도 나지 않았을 아주 작은 차이. 그것이 간극을 만들어내고, 이내 전황에도 눈에 띄는 결과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난 것일 테고.’
긴급하게 돌아가는 이 상황을 보라. 누가 봐도 밀리고 있는 꼴이다.
지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얼굴이 화악 펴지는 모습은 또 어떻고.
아무리 제약이 있다지만 그래도 마족인데. 새삼 ‘사기’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이시텔.”
“예, 다녀오겠습니다. 데온 님께서 귀찮게 몸소 나서실 일 없도록 제 선에서 모조리….”
“아니.”
눈치껏 나서서 정리하려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해.”
“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혼란과 의문 섞인 시선이 돌아왔다.
조금은 따가운 것 같기도 한 시선 속에서 태연히 무기를 점검한 데온은 두 손을 깍지 낀 뒤, 스트레칭하듯 몸을 쭉 늘리며 말했다.
“나 또한 참전할 거니까.”
“아…! 예! 데온 님께서 돋보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놓겠습니다!”
역시 이런 쪽의 눈치 하나는 빠르군.
무언의 긍정에 말에 올라탄 녀석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혼란 속에 뛰어든다. 상황을 지켜보던 단이 곁에서 말을 붙였다.
“저들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마스터까지 나서시려는 겁니까? 쉬지 않으시고요?”
“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글쎄.”
현재 산국의 병력은 성 앞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마법 억제 진의 영역이 닿는 곳 가장자리까지 밀고 나와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을 보아하니 8군단장 때를 대비한 것 같지만…….
“공성전에서 이런 무대가 마련되는 것이 흔하지 않아서.”
“아, 마스터와 미…로프티 기사단은 이런 식의 백병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죠.”
“그래. 왔으니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어?”
기왕 왔다는 것을 알리려면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것이 좋을 테고.
‘이런 걸 신고식이라 하던가.’
어쨌거나 그런 의미에서 현 전황은 아주 좋은 무대다.
저들이 8군단장과 비슷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의 존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넌 여기에 있어.”
잘 싸우는 놈들은 마족으로 충분하고, 분위기를 뒤엎는 것은 저와 미친개들 전문이니까. 단은 나서 봤자 큰 도움이 안 된다.
가볍게 긍정하며 한쪽 팔로 다른 쪽 팔을 감아 꾹꾹 늘리는 데온을 지켜보던 단이 그대로 나갈 것 같은 모습에 문득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갑옷은 입지 않으십니까?”
“용사에게 그런 게 의미 있을 리가 없잖아.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체력에 무거운 갑옷을 입었다간 피할 수 있는 것도 못 피하고 죽을 게 뻔해서 그랬던 거고.
마지막으로 손목을 돌려본 뒤, 근처에 서 있던 마족 병사에게서 창을 빼앗아 들었다. 얼떨결에 무기를 내어준 녀석이 당황스러움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으나, 데온은 신경 쓰지 않고 창을 가볍게 돌려보았다.
“잠시 빌리지.”
“예, 옙! 영광입니다!”
오른손엔 창을 쥐고, 왼손을 들어 까닥였다.
“……!”
오랜만의 수신호였음에도 재빠르게 이를 읽은 로프티 기사단원들이 나아가는 걸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저벅, 저벅.
불규칙하면서도 긴박한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걸음이 땅을 미미하게 울렸다.
이질감을 느낀 이들이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본다. 이내 홍해가 갈라지듯 그들의 진로에 있던 이들이 비켜서고, 적당한 곳에서 멈춰선 데온이 창 뒷부분으로 바닥을 찍으며 씩 웃었다.
“자, 얘들아.”
스릉.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듯, 등 뒤에서 일제히 무기를 뽑는 소리가 들렸다.
“…….”
“…….”
주변이 고요하다. 이어질 말 한마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침묵한 로프티 기사단은 물론이고, 무심코 시선을 둔 이들조차 눈을 제자리에 돌리지 못한 채 덩달아 입을 다물고 집중한다.
공기마저 숨죽인 듯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약 먹을 시간이다.”
오랜만에 한번 같이 날뛰어보자.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발언에 살인귀들이 웃었다. 여기에 대한 화답이야, 뻔했다.
이제는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추악하기 짝이 없는 말.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해.”
……그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데온 하르트가 느긋하게 나아가며 추가적인 명령을 내린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와 전혀 다른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에 의문을 갖고 귀를 열고 있던 이들은 굳이 명을 전달받을 필요도 없이 모두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양측 병력의 사기 관련된 부분은 너희에게 맡기지.”
요컨대, 날뛰라는 것 아닌가. 되도록이면 잔인하게!
새삼스러울 것 없는 명령이다. 준비해온 약을 가볍게 빤 놈들이 붉게 충혈된 흰자를 번뜩이며 사라진다. 걱정 말라는 외침은 덤.
아군이 마족이다 보니 혹여 약 기운에 적아를 헷갈리고 잘못 공격하진 않을까,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데온은 허공에 창을 휘둘러 보고는 이내 본인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천재지변의 등장이었다.
***
보아라.
놈이 전장을 무대 삼아 날뜀으로써 온몸으로 외친다.
세계가 인간을 버렸다는 증거가, 인간을 등진 용사가 살인귀들을 이끌고 귀환했노라고.
데온 하르트가 돌아왔다고.
너무 어린 나이에 전장에 나갔다는 것을 증명하듯 장수치고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몸집을 가진 사내는 기본적으로 체격이 큰 이쪽의 장수들을 상대로 잘도 날뛰었다.
그가 땅을 박찰 때면 거의 날다시피 허공에 체류했다. 창대를 지지대 삼아 뛰어오를 때면 정말 허공을 나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 정도가 더욱 커졌다.
그 상태에서 놈이 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목이 꺾여 죽은 이들이 늘어간다. 때로 용케 막아내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럴 때면 녀석은 그대로 다른 쪽 다리를 들어 함께 목을 휘감고는 체중을 실어 비틀어버렸다.
창은 또 어찌나 잘 쓰는지. 창이 닿는 반경은 철저한 그의 영역이었다. 그의 의사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이 갈리는 그의 손바닥 위.
창은 거리가 중요한 것이라, 이따금 안쪽으로 파고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금 전 보았지 않은가. 그가 발기술도 제법 잘 쓴다는 것을. 파고든 이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그대로 전장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니, 어느 누가 감히 버텨낼까.
“그간 알고 있던 데온 하르트와는 전투 스타일이 전혀 다른데…….”
한없이 밀리던 전선은 어느덧 성벽에서도 선명히 지켜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성벽 위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산국의 왕, 연화가 침음을 흘렸다.
본래 그의 전투 스타일은 ‘잔인함’을 기반에 두지 않았던가.
전장에 물든 인간조차 본능적으로 지키는 최소한의 선을 훌쩍 넘어 그 누구보다 잔혹한 꼴을 보임으로써 적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
한데 그는 지금 ‘정상적인’ 전투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그 휘하의 살인귀 기사단만 모두가 아는 ‘그’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고.
“용사니까요. 새 기술이 늘었을 만도 하죠.”
사에린이 조용히 답했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살기를 담은 두 눈은 누구보다 튀는 백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는 평범한 전투를 보여도 말도 안 되게 압도적이라 이쪽의 사기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아주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더군. ‘계약 마족’과 같은 능력을 경계하여 내린 판단이 저놈의 훌륭한 무대가 되어주었어.”
단번에 성벽 안으로 이동해 문을 열었던 ‘계약 마족’. 놈의 소식은 제법… 아니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싸우다가 함락된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무언가 손 써보기도 전에 당했다는 뜻 아닌가! 심지어 ‘성내’로 이동했다는 것은 마법 억제 진조차 막지 못했다는 뜻이 되므로. 하여, 당사자인 산국뿐만 아니라 인간계 전체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해결 방안을 찾아 헤맸더랬다.
그렇게 찾아낸 것은 놈은 혼자서만 이동할 수 있으며,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었고.
지금은 지원 병력이 누군가에 의해 중간에 전멸하며 놈 역시 죽었으리란 추측이 우세하고, 실제로 신호탄이 쏘아졌던 자리에 있던 마족의 시체 중 ‘계약 마족’으로 보이는 시체 또한 있었다지만, 마족 중에 놈과 같은 능력이 또 없으리라는 확신을 섣불리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부러 성벽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나와 진을 치고 있었건만.
“살인귀 기사단이 탈영을 했다는 건 들었다만, 정말 마계에 가 있었을 줄이야…….”
헛소문이길 바랐는데.
데온 하르트뿐만 아니라 살인귀 기사단마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뛴다.
차라리 성에 들어가 수성전을 벌였어야 했어. 저 꼴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파 와 연화는 미간을 짚었다. 사에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온 하르트가 괜히 ‘살인귀들의 주인’이라 불렸을 리가 없죠. 이상할 것도 없어요.”
목소리에는 끝내 드러난 적의가 선명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연화는 손을 내리고 다시 전장을 눈에 담았다. 때마침 시선이 닿은 곳에는 데온 하르트가 허리춤의 단검을 던져 죽을 뻔한 살인귀 기사단원을 구하는 모습이 있었다. 굉장히 자연스러워 무심코 지나칠 뻔한 광경이었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저런 여유를 부리다니.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지금 전황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태풍이 휘몰아치듯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고 있으니.
그는 재앙이었다. 태풍이었고,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이었다. 항거할 수 없는 재앙 앞에 인간들은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점점 성벽에 가까워지는 전선에 산국의 왕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수성전에 돌입해야 하나….”
아니면 혹시 모를 이동 능력을 가진 마족을 대비해 아득바득 병력을 더 내보내 버티게 해야 하나.
사실 답은 이미 나왔다.
남은 것은 책사 또한 같은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한 확인뿐. 연화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닿자 기다렸다는 듯 사에린이 답했다.
“수성전에 돌입해야죠.”
확신이 주어졌다.
“우리가 견제해야 하는 자들의 우선순위를 따져보면 정말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혹시 모를 마족보다는 적이 된 눈앞의 ‘용사’가 더 위입니다. 지금 저건 용사와 그 휘하의 병력이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판이고요. 견제해도 모자랄 상황에 최적의 판을 마련해줄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판을 바꿔야죠.”
“그렇지. 그대 말이 옳아.”
흐뭇하게 웃은 연화가 통신기에 손을 뻗었다.
“수성전을 준비하라.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빠질 준비를 하고, 신호가 가는 즉시 일제히 몸을 빼도록.”
명을 받든다는 답이 돌아오고, 짧은 통신을 끝낸 그녀가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사에린을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할 말이 더 있는 듯한 모습.
“아직 할 말이 더 있는가?”
“네. 지금 상황에서는 막고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어서요.”
사에린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데온 하르트를 죽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