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55
255. 감정이 죽인 것은 나인가, 너인가(2)
마력은 다 썼고, 체력도 바닥이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감정 상태에 오엘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시선이 트로버에게 돌아갔다.
“너는 내가 죽고 나면 이 상황을 네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색해 마왕님께 보고하겠지.”
“…….”
“그럼 자연히 인간계에 보낸 아기 또한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고.”
“……이 정도면 중증인데.”
재미없다는 중얼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인간계에 보낸 아기의 목숨 같은 자잘한 것에 신경 쓸 마왕님이 아니시지만, 변덕이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런 불확실성에 모든 걸 맡긴 채 넘어가기엔 오엘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걸어버렸다.
게다가.
“마왕님의 명이 없어도 네가 아기를 찾아 죽일 수도 있잖아.”
툭 치면 부서질 듯한 놈의 몸 상태를 눈에 담았다. 과장된 비유 따위가 아니다. 금이 잔뜩 간 도자기 같은 놈의 몸은 척 보기에도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고로 몸 상태를 이렇게 망쳐버린 오엘에 대한 복수심에 아기를 찾아 죽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단순 흥미를 이유로 아기를 건들 수도 있겠다.
“뭐…….”
트로버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정은 없었다.
오엘은 누운 상태에서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지금 이 목숨은 아기를 포기했다면 살았을 목숨이다. 즉, 아기를 위해 희생한 목숨이니.
‘나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확실한 방비가 필요하다.
물론 원거리에서 무언가 손을 쓰기 위해서는 마법이 필수고, 지금 그녀의 마력은 바닥났지만….
‘괜찮아.’
마족에게는 생에 단 한 번 보유한 마력량과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마력이 존재하니까.
마족들의 근원으로부터 받은 가장 순수한 마력이자 육신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힘.
“트로버 너는… 마법으로 상대의 목숨을 직접 건들 수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거야.”
가능했다면 난 아마 이를 이용해 너를 죽였을 테니까.
참으로 이상하지. 인간들의 주술은 대가가 좀 많이 필요하다지만 어쨌든 목숨을 직접 건드는 것이 가능해 보이던데, 왜 마법은 안 될까.
‘마법으로는 간접적으로 죽을 만한 상황을 만드는 게 전부라서.’
확실하게 죽일 수 없는 이상 차라리 아기의 안전을 위하는 것이 낫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주술이 마법의 하위호환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게 맞는지. 오엘은 마지막까지 쓸데없는 의문을 품으며 육신을 이루고 있던 마력을 끌어왔다.
길게 빌 것도 없었다.
‘[아기가 성체가 될 때까지 아프지 않기를.]’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기를.]’
그저 건강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 무사히 성체가 되기만 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그녀가 육신의 마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눈치챈 트로버가 의심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본다.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아 곧장 손을 뻗는 대신 막을지 그냥 둘지 고민하는 듯했으나, 오엘은 개의치 않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직감이 알린다.
‘성공했구나.’
마지막 마법은 성공했다. 지금, 어딘가에 존재할 아기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방어막이 주어졌다. 성체가 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지만 그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부서지지 않겠지. 그거면 됐다.
손끝이 부스러진다. 앞선 대화를 되짚은 끝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트로버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까지 그 인간 애새끼를 위해 뭔가 빈 거냐? 마족이, 그것도 군단장이 나약한 인간과 같은 꼴이 되다니.”
“…….”
“재미없긴.”
그는 낮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놈이다. 아, 순수하게 마왕님의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마족이 아니니 잔해는 조금 남으려나.
어쨌든 제대로 된 시신을 남기지 못할 녀석의 보기 좋지도 않은 꼴을 굳이 보고 있어 줄 생각은 없기에, 트로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옮겼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서너 걸음 정도 나아갔을 때였다.
“……오엘, 님?”
……아. 빌어먹을.
타이밍 한번 거지 같지.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한 트로버가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건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데르니반이 부서져 가는 오엘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
평소와 같은 무표정에 눈동자 또한 흔들리기는커녕 미동도 없건만, 그가 있는 곳 주위만 그림자가 내려앉은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오엘 님.”
천천히 걸어간 그가 오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일으키려는 듯 손목을 잡더니, 그대로 부스러지는 것을 보고는 즉시 손을 거뒀다.
오엘이 푸스스 웃었다.
“다녀왔어?”
“……예. 명을… 완수했습니다.”
“응, 수고했어.”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조용히 눈을 내리깐다. 이런 순간에서조차 말수가 적은 서툰 연인이 재밌어 키득키득 웃은 오엘은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데르니반.”
“예, 오엘 님.”
어차피 길게 말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서지고 있는 팔을 들어 그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다 닿기라도 하면 부서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 분명하기에 데르니반이 즉시 얼굴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다음 5군단장은 네가 되어줘.”
“…….”
“그리고….”
잘 부탁해.
속삭이듯 희미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
5군단장의 자리를 잘 부탁한다는 건지, 아기를 잘 부탁한다는 건지.
섣부른 대답 대신 생략된 목적어를 유추하던 데르니반이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시선을 내렸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지치는 듯, 오엘이 눈을 감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코 밑에 손가락을 댔다. 질식할 것 같은 시간 끝에, 희미한 날숨이 느껴졌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왜 벌써 죽은 것 같을까.
조용히 손을 거뒀다.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부서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이젠 아예 상체를 좀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어서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데르니반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문 채 그녀의 육신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 부서지고 남은 잔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어느샌가 날카롭게 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멈추십시오.”
“……쯧.”
슬금슬금 자리를 뜨던 트로버가 멈춰 섰다.
꿀릴 것 없다는 듯 당당하게 돌아선 그가 양팔을 펼쳤다.
“왜, 따지려고?”
“…….”
“잘못은 오엘이 했는데? 오엘이 먼저 아기를 빼돌렸고, 그걸 보고하려는 날 죽이려 했지. 내 잘못은 없어. 이유가 이렇게 명확한 데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결과주의인 마왕님께서도 어쩔 수 없다며 그냥 넘어가실 테고.”
“…….”
“본래는 아기를 빼돌리는데 일조한 너 역시 죽어 마땅하겠지만… 그간 대련해준 것도 있으니 가만히 있으면 입 다물어주지.”
그러니, 어때? 조용히 그냥 갈 생각은?
그가 암묵적으로 묻는다. 어렵지 않게 뒷말을 읽은 데르니반의 눈동자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오엘 님이, 보고하려는 9군단장님을 죽이려 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응? 그래.”
“…….”
거짓말도 뻔뻔하게 하는군.
그랬다면 이렇게 먼 장소에서 일이 터질 게 아니라 마왕성 내에서 일이 터졌겠지. 설마 오엘 님을 데리고 마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 아기의 시신 여부를 물었을 리도 없고.
평소보다 한층 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씀하신 대로 마왕님은 결과주의이십니다.”
“……? 너, 설마….”
“그러니 제가 9군단장님을 죽여도 그냥 넘어가실 겁니다.”
“……망할!”
반응이 차분하길래 감정 변화가 드물어 오엘이 죽어도 괜찮은가보다 싶었더니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보니 저 새끼, 차분하게 눈 돌아갔어.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싸우면 분명 죽는다. 트로버가 주춤 물러났다.
“날 죽이면 마왕님의 명에 정면으로 반발한 걸로 비칠 수도 있는데? 오엘과 한패로 묶인다고!”
“상관없습니다. 평소 오엘 님께 불만을 가진 9군단장이 누명을 씌우기 위해 아기의 시신을 훔쳐 알아볼 수 없게 훼손, 마왕성을 벗어나 그 흔적을 지우려 했고, 뒤늦게 눈치채고 뒤쫓아 온 오엘 님마저 죽였다, 고 하면 될 테죠.”
“오엘과 나는 같이 마왕성을 나갔어!”
쟤가 원래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녀석이었던가.
생존을 위해 급히 말을 받아내면서도 표정 관리만큼은 할 수 없었던 듯, 트로버가 질린 얼굴을 했다.
“출입을 감지하는 결계도 있으니 그런 말은 안 통…!”
“그렇다면 훔친 시신을 인질 겸 미끼로 오엘 님을 불러냈다고 하면 될 겁니다. 함께 자리를 옮긴 후 눈앞에서 시신 훼손 및 도발, 그 후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면 될 테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9군단장이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거린다. 데르니반은 헛숨만 내뱉는 그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그도 알겠지. 내용이 어설프더라도 상관없다.
마왕님께 중요한 건 ‘승자’가 내미는 변명, 이유니까. 그것의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아기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땅이 뒤집히고 나무가 태풍이라도 맞은 듯 뽑히거나 꺾여 널브러져 있다. 데르니반의 시선을 좇았다가 뒤늦게 초토화된 주위 풍경을 깨달은 트로버가 침음을 흘렸다. 건조한 음성이 이어졌다.
“두 군단장의 충돌 과정에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갈려 나갔다고 하면 충분할 겁니다.”
“……젠장, 연인 행세는 오엘 녀석 장단 맞춰준 거 아니었어? 오엘이 죽었으니 이제 네가 군단장이 될 수 있게 되었잖아! 그간 귀찮았을 텐데,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처음에는 장단 맞춰준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데르니반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속이 좋지 않은데.’
저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생각을 이어가려고 해서 그런 것일까. 슬쩍 손을 올려 답답한 가슴을 할퀴듯 쓸어내렸다.
언제 나온 건지 모를 날 선 손톱 아래, 옷이 볼품없이 갈라지고 찢어진다. 스스로를 겨눴던 손톱은 이내 자연스럽게 트로버를 향했다.
당황한 트로버가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췄다.
“왜, 왜?!”
그러게. 왜일까.
당장이라도 저 자를 죽이고 싶다는 이유 모를 충동이 치미는 것은.
그러나 충동과 별개로, 데르니반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꺼낸 손톱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그가 뱉은 개소리 중 유독 한 단어가 걸렸다.
‘군단장.’
오엘 님은 저를 향해 다음 5군단장이 되어 달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왕의 명에 반발하려 했다는 의혹이 없어야 한다. 트로버가 죽는다면 제아무리 변명이 완벽하더라도 티끌만큼의 의심이 들러붙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터.
군단장 후보는 저 말고도 더 있다. 특히 0군단장님의 부관인 에드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유능해 후보 자리에 있어 저보다 더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고. 게다가 이미 죽은 전 8군단장과 8군단의 주 무기가 겹치지 않는 것처럼, 군단장과 군단의 주 무기가 겹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5군단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흠이 없어야 한다.’
데르니반은 손을 내렸다.
“……저에 대해서는 입 다물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어?”
“육신을 이루는 마력을 걸고, 약속하십시오. 죽는 그 순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말하지 않겠노라고.”
말에 마력이 깃들었다. 건조한 눈동자가 의미 모를 빛을 품고 섬뜩하게 빛난다.
‘이건…….’
트로버는 깨달았다. 데르니반이 보이지 않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짧고 굵게 정리된 내용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온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섣불리 승낙했다가 후에 발설하기라도 하면 정말 육체가 무너지겠지.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답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젠장.’
어쩌겠나. 당장 살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는데.
내심 이를 부득부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럼.”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것 역시 마법의 일종이라 마력이 뭉텅이로 소멸되었지만, 애초에 마법 위주의 전투가 주력인 것도 아니니 괜찮다. 답도 얻어냈겠다, 데르니반은 미련 없이 트로버에게서 눈을 뗐다.
천천히 멀어지는 기척에도 그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엘이었던 잔해만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은 트로버가 감각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느리게 열렸다.
“이제 와 드리는 말씀이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더 이상 ‘왜?’라고 질문하지 않는 잔해를 내려다보며 데르니반은 작게 중얼거렸다.
“고작… 그런 것을 위해 목숨을 포기하시다니.”
속삭이듯 나온 말은 너무 늦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족도 아닌 작디작은 인간 아기 하나였다. 찬바람 따위에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약한 것.
군단장이 목숨을 바쳐야 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
“왜…….”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이 대신 죽은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같은 마족을 대신하여 죽은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바닥을 적신 피가 새삼 비리게 느껴진다. 인간계의 까마귀와 닮은 마물이 그녀의 잔해를 노리듯 머리 위를 배회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몰골이다.
그토록 찬란한 존재였는데, 그깟 감정이 무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