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58
258. 죽이기 위하여(2)
대충 잡식이란 의미로 받아들인 데온이 괴식물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면 말이야.”
“……?”
눈빛에 짓궂은 장난기가 스몄다.
“이 불룩한 건 뭐지? 마물? 인간?”
“……!”
히엔이 영양제랍시고 넣어둔 무언가가 있는 곳.
화분의 불룩 튀어나온 흙을 툭툭 건드리자 녀석이 화들짝 놀라 줄기로 흙 부분을 가린다. 이거, 딱 걸렸네. 데온의 눈이 빛났다.
“역시 영양제는 아닌 모양이네.”
“……!”
“아직까지도 소화가 안 된 걸 봤을 때부터 먹는 종류는 아닐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끠…끠애…!”
“대체 뭘까.”
차원이 다른 악몽을 선사한 것에 대한 복수다. 데온이 키득거리며 식물의 몸통 줄기를 쥐었다.
“뽑아서 확인해도 되려나.”
“끠…끠애액!! 끠액끄이액!!”
“어차피 넌 뽑혀도 안 죽잖아. 확인만 하고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그걸 말이라고!! 괴식물이 발악하듯 줄기를 휘둘렀다.
그것도 잠시, 데온이 정말 뽑을 듯 힘을 주자 모든 줄기와 잎사귀로 화분을 붙잡고 버텨야 했지만.
내가 악몽에서 깨워주기까지 했는데! 다치지 않게 잡아주기도 했는데…!!
“끠애끄애앩…!”
서러움 가득한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데온이 낮게 혀를 차고 손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고집하고는…….”
“끩…….”
“이럴수록 더 궁금해지긴 하지만….”
데온은 힐긋 따끔하게 찔러오는 시선을 따라 흙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조금 올렸다. 고개… 아니, 꽃봉오리를 들고 저를 보고 있는 괴식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분명 눈이 없는데도 억울함이 듬뿍 담긴 시선은 대체 어떻게 보내는 건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단은 그냥 넘어가지, 뭐.”
“……!”
당장 실랑이를 벌이고 싶진 않으니. 앞으로 몇 번이고 기 싸움을 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쓸데없는 일로 기운을 빼고 싶진 않다.
줄기를 흔들거리며 소리 없이 기쁨을 표하는 녀석을 두고 일어났다.
곧장 어디 가냐는 듯 의문 어린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대충 겉옷을 걸친 데온은 턱 끝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산책 가는 거야.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따라오지 마.”
“끠액.”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뒤따랐다.
저 녀석이 웬일이지? 잠시 어리둥절하던 데온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륵 흘러내리는 액체를 자각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식은땀이 났었구나.’
악몽을 꿨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제 보니 옷도 잔뜩 젖었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히 초췌한 몰골일 듯싶다. 그러니 평소 질척거리던 저 식물도 눈치껏 물러나 준 것일 터.
나가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걸쳤던 겉옷을 벗었다. 옷이 있는 짐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얼굴에 무언가 다가왔다.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저 외에는 괴식물뿐이라 그냥 뒀더니만, 뺨에 무언가 닿는다. 예상과 전혀 다른 부드러운 감촉에 데온이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끠액.”
괴식물이 손수건을 들고 식은땀을 톡톡 닦아준다. 가만히 받아주다가 줄기를 잡아떼어내고 손수건을 살폈다.
혹시나 했더니만, 역시나. 데온의 표정에서 어이가 빠져나갔다.
“이거… 내 건데?”
“……끠애?”
“모른 척하지 말고.”
대체 어디서 난 거야.
본인도 찔리는 듯 꽃봉오리를 휙휙 돌려가며 시선을 회피하던 녀석이 아예 몸을 돌려 한쪽에 있는 짐가방에 다가간다. 어디 한번 뭐 하는지 보자는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짐을 뒤진 녀석이 검은 셔츠를 한 장 꺼냈다.
“끠액!”
“……입으라고?”
“끩.”
누가 챙긴 건지 셔츠까지 검은색이네. 에드가 챙긴 건가?
입기 편하게 셔츠를 들어준 괴식물이 아닌 척 눈치를 살살 살핀다. 녀석 나름대로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 데온은 피식 웃고 셔츠에 팔을 끼웠다.
“끠앩.”
“……단추까지 채워주려고?”
“끩.”
“내가 할 수 있….”
……다고 하니까 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건데.
황당한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줄기가 뻗어왔다. 꾸물거리며 단추를 채워 내려가는 줄기를 보던 데온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결과적으로.
녀석은 단추 잠그는 것은 물론이고 옷 정리까지 아주 완벽하게 해냈다.
‘……잘하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젠장.
***
밖에 나오고 보니 한밤중이었다.
낮의 열기가 식은 듯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풀잎이 바람에 휘둘려 이리저리 스치는 소리를 낸다. 풀벌레 우는 소리는 또 얼마 만에 듣는 건지. 낯선 기분에 데온은 고개를 들었다.
마계와 달리 오직 하나뿐인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날이 좋네.’
악몽을 꾼 밤과 어울리지 않는 배경이야.
뭐… 언제는 상황과 배경이 맞았느냐 만은.
이번에 인간계에서 호기심에 구한 담배 형태의 약을 입에 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보고 있던 단과 눈이 마주쳤다.
“산책 가시는 겁니까.”
“응. 마침 정신도 다 깨서.”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것 덕분에 아주 번쩍 깼지. 비몽사몽 할 틈도 없었다.
단이 들고 있던 체에스를 내밀었다.
“몸조심하시고요.”
“…….”
“정말 같이 안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인간계의 것이라 그런가, 확실히 마계의 것에 비하면 약발이 좀 약하네. 한 번 깊게 빨아들인 담배를 대충 허벅지에 지져 끈 뒤 첫 번째 도시에서 구한 것을 꺼냈다.
받아든 체에스를 옆구리에 낀 채, 다시 불을 붙인 데온이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다녀온다.”
***
몇 차례에 걸친 산국과의 이야기는 그럭저럭 끝났다.
확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딱 잘라 거절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려나.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받으며 엘피디우스는 의자에 늘어져 피곤에 찌든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에 얹은 팔 아래서 금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관건은 르웨체인데…….”
산국의 왕은 연합의 조건으로 르웨체의 협조를 걸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셈이 되지요. 실패하는 순간 산국의 몰락은 확정될 겁니다.] [……하면, 제의를 거절하겠다는 뜻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그저 보다 확실하게 해낼 수 있는 상황을 바랍니다.]르웨체의 협조를 얻어내세요. 그러면 기꺼이 계획에 동참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건방지다고도 할 수 있는 제안이었으나 엘피디우스는 수긍했다. 산국은 마계와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나라니까. 모 아니면 도가 될 지금의 계획에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아쉬운 입장은 먼저 제안한 쪽이니 이쪽에서 움직이는 것이 맞기도 하고.
“르웨체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과거의 일을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레테아가 말을 받았다.
“그쪽의 국왕은 생각보다 더 감정적인 인물이니까요.”
대의를 들먹이며 뻔뻔하게 협조를 요구하는 것은 역효과만 날 것이다. 선대의 선택이었다며 자신들에겐 책임 없다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
‘애초에 숙부님께 책임을 떠넘기는 말 따위, 할 생각도 없지만.’
어쨌든.
사과를 해야 한다. 보다 확실히 르웨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라면 황제나 그에 준하는 자가 사과해야 할 테지만…….
굳이 오라버니가 직접 사과할 필요는 없다. 황태제가 제국을 대변하여 사과한다는 서신을 쓰면 충분할 터. 알레테아의 눈이 굳건하게 빛났다.
“사과라…….”
한편, 엘피디우스가 매끄러운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숙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지.’
제가 아직 황태자이고, 숙부님이 황제던 시절.
알레테아의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 직접 데온 하르트의 저택에 다녀온 날, 황제 에도아르도는 엘피디우스가 데온 하르트에게 사과하러 갔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들켰다는 사실에 눈치만 살피는 황태자에게 그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괜찮다.] [예…?] [아니지, 아직 황태자일 때 사과할 수 있는 건 하는 편이 좋을 테니 오히려 잘했다고 할 수 있겠군.]예상과 전혀 다른 태도였다.
황태자이기에 오히려 사과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던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절로 얼굴 위에 떠올랐다.
그런 조카를 물끄러미 보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관을 벗었다. 그리고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황태자에게 다가가 황관을 씌웠더랬다.
[숙부…아니, 폐하!]어찌 이런 행동을…!
황제가 직접 씌운 것이라 차마 벗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계속 쓰고 있을 수도 없어 엘피디우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상가상으로 황제가 아슬아슬하게 균형 잡은 황관을 놓고 물러선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위태로운 무게감에 엘피디우스가 반사적으로 목을 뻣뻣하게 굳혔다.
[이건 네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순간 미끄러지겠지.] […….] [바닥에 떨어진 황관은 흙먼지가 묻고 흠집이 날 거다.]깨달음으로 물들어가는 저와 닮은 금안을 들여다보며 황제가 슬며시 웃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참으로 피곤해서 사과도 자유롭게 못 하더군. 이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르며 물들다 보면 사과하는 법조차 잊게 될지도 모르니 황태자일 때 사과하는 법을 충분히 익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황태자는 물론이고 황녀 또한 머리 위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당장 알레테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티아라를 쓰지 않던가.
그에 당연하다는 듯 답이 돌아왔다.
[너희에겐 내가 있지 않나.]마주친 금안이 다정한 빛으로 물들었다.
[너희의 머리에 얹어진 것의 크기가 짐의 것에 비해 비교적 작은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더냐.] […….] [마음껏 떨어뜨려도 괜찮다. 작고 가벼운 왕관은 흠집 또한 적게 날 테니. 설령 진흙탕에 빠뜨려 황태자와 황녀의 머리 위가 빈다 한들 황제가 존재하는 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테지.]너희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것은 연습을 위한 것이다.
훗날 진정으로 무겁고 큰 왕관을 썼을 때 생소한 감각에 휘청거리지 않도록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라고 주어진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 벌써부터 목 아프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건 나중에, 이 자리에 앉아 황관을 쓴 이후에 해도 충분하니.]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황태자는 황제의 옥좌에 앉았다. 하지만.
엘피디우스는 가벼운 머리 위를 만지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난 황관을 쓰지 않았지.’
고개를 숙임으로써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숙여줄 수 있다.
눈치를 보아하니 동생이 본인의 선에서 처리하려는 것 같은데, 그래서는 안 되지. 곧장 입을 열었다.
“남부에는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던데.”
찰떡같이 말뜻을 해석한 알레테아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바뀌었다.
“오라버니는 숙부님이 아니에요.”
“숙부님은 아니지만 ‘제국’이긴 하지.”
한때 숙부님이 곧 제국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내가 곧 제국이고.
르웨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제국이 직접 나서야 하므로.
“내가 직접 서신을 써야 해.”
엘피디우스가 펜을 들었다.
***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어린 것들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제법 잘 헤쳐나가는 것 같다만….”
어두운 밤.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제국과 연결된 통신기를 끊은 연화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역시 전 황제에 비하면 현 황제는 어설픈 면이 아예 없지는 않군.”
머리를 꽤 굴린다고 굴린 것 같지만 결국 ‘데온 하르트를 죽이는 것’ 이외의 부분에서는 이쪽에 말려버렸다.
사실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제국이 아닌 산국이다. 데온 하르트를 죽여 희망이 빛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쪽은 다른 어느 세력도 아닌 이쪽이기에, 현 황제가 이 부분을 꼬집었다면 제국과 산국 간의 기 싸움에서 손쉽게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뭐… 용사를 죽일 확률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르웨체의 협조가 필요하고, 제국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르웨체의 마음이 풀릴 일은 없을 테니 결국 나서는 것은 같았겠지만.’
그래도 어차피 할 거, 좀 더 생색내듯 하는 것이 더 이득인 것은 당연하다.
산국의 왕인 저로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전 황제보다 비교적 만만한 현 황제가 더 좋으니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어설퍼서야, 과연 르웨체를 설득할 수 있을지…….’
통신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집무실 안쪽에 위치한 임시 침실에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 피곤했기에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려는데….
……침대에 누군가 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전제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채 손가락을 까닥이던 검은 그림자가 스윽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발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상대가 저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고 나서야 비현실적인 감각에서 벗어난 듯 연화가 급히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 없…!”
“쉬잇-.”
대체 언제…!
삽시간에 코앞까지 도달한 상대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림자에서 벗어나 달빛이 닿는 이곳까지 거리낌 없이 걸음 한 상대의 모습에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확장된 동공에 유독 새하얀 백발이 비쳤다.
“얌전히 게임만 하다 갈 테니 괜한 소란은 삼가시지요, 전하.”
달빛을 등져 얼굴을 덮은 그림자 속에서, 붉은 눈이 경고하듯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