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60
260. 죽이기 위하여(4)
게임은 지난번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었다.
현실과 같은 지형적 특징을 가진 판이 완성되고, 그 위에 말들이 놓인다. 생각 없이 지형을 훑던 연화가 눈에 걸리는 부분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우연인가?’
보급로가 저번과 같은데.
판 위의 지형은 지도의 특징만 가져갔을 뿐, 그 외의 식량 저장고 등의 알 수 없는 부분은 빈 공간에 무작위로 배치된다. 판을 미는 횟수가 저번과 같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 굴린 주사위는 지난번과 완전히 다른 숫자를 내었기에 그러한 부분들은 자연히 저번과 위치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보급로가 같다고?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군.’
이 게임이 끝나는 즉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에 손을 뻗었다.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
밤중의 게임을 끝내고 돌아온 데온은 테이블 위에 체에스를 펼쳐둔 채 게임 말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산국의 왕과의 게임을 복기하는 듯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내 미미한 웃음기를 담고 휘어졌다.
언제쯤 눈치챌까.
‘되도록 빨리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생각보다 가이시텔 쪽의 땅 파는 속도가 빠르단 말이지. 심지어 땅을 파다가 수맥을 건드렸다고 한다. 펑펑 솟는 물의 양을 보아하니 흘러가는 물길에 합쳐 제대로 둑을 쌓아 모아두었다가 터뜨리면 위력이 장난 아닐 것 같다고….
땅이 좀 촉촉하다고만 생각했지, 설마 수맥이 있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시간을 벌기 위해 내린 명령인데,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무용지물이 될 것 같다.
그래봤자 또 다른 명령을 내려 일을 처리하면 된다지만, 그래도 귀찮을 일 없이 한 번에 끝내는 편이 좋으니까.
‘뭔가 눈치챈 것 같던데, 기대해봐도 되려나.’
잠은 자지 않았다. 괴식물마저 눈치껏 조용히 해주고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달이 숨고 해가 떴다.
다행히 산국의 왕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없었다.
날이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막사 밖이 급격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잠에서 깨어난 이들의 움직임이라기엔 지나치게 어수선한 느낌. 직감적으로 무언가 느낀 데온이 천막을 걷고 나갔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아, 데온 님! 보급로가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그래?”
놀란 듯, 혹은 생각에 잠기듯 데온 하르트가 주먹을 입에 대고 눈을 내리깐다. 그러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단은 똑똑히 보았다.
손 아래 가려져 있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을.
데온 하르트가 웃었다.
드디어.
***
달밤의 게임은 이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다.
게임에서, 데온 측 소수의 말들이 공성 무기 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나왔다. 다음날, 산국이 재료 조달자들을 습격했다.
포로를 붙잡아둔 장소가 게임판 위에 드러났다. 날이 밝자 포로가 구출되었다.
무슨 속셈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일단 이득이니 받아먹는 산국의 왕과, 자꾸만 정보를 내주는 0군단장의 기묘한 게임은 데온 하르트가 습격을 받고도 한 번 더 만나고 나서야 그쳤다.
데온 하르트가 몰래 성벽을 넘나든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이 있었다.
“대체 뭐지.”
혁명군 수장 폴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무슨 속셈이지…? 둘이 손을 잡기라도 했나?”
아냐,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일방적으로 마족들만 손해를 보고 있다. 전투 또한 손을 잡았다고 보기엔 여전히 치열하고.
하지만…….
못내 불안한 듯 보고가 담긴 서류를 노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둘이 손잡는 상황이 아예 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펜을 들었다. 보고서 밑에 첨언을 끄적이며 폴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이간질을 해 두는 편이 낫겠지.”
이참에 할 수 있다면 데온 하르트도 죽이고.
***
게임은 이전까지 해온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딱.
판 위에 장수가 올라갔다. 가장 강함에도 지금껏 단 한 번도 판 위에서 활약한 적 없는, 게임 말 중에서도 유독 중요한 녀석의 등장에 연화의 시선이 자연히 옮겨졌다.
위치는 산국의 진영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물이 흐르는 장소.
‘이 ‘게임’ 내에서는 별 의미 없는 위치지만…….’
연화는 눈을 들어 데온 하르트를 보았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쯤 되니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겠군.”
“…….”
“대체 무슨 속셈이지?”
대답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집어 든 게임 말을 섣불리 내려놓지 않고 만지작거리다가 데온 하르트를 가리켰다. 게임 말의 끝이 상대의 머리를 겨누고, 의심으로 점철된 눈동자가 가늘어진 눈매 사이에서 빛났다.
“내내 생각해봤지만 도통 그대의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셨다니 기쁘군요.”
“끼 부리지 마라.”
“……예?”
데온 하르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화는 그의 얼굴로부터 눈을 떼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공중에 체류하던 게임 말이 끝내 적절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게임판 밖에 나뒹굴었다.
“그대는 용사다. 지금 이렇게 왕의 방을 제집 드나들 듯이 오가는 것이 가능한 용사란 말이지. 분명 마음만 먹으면 성문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이 성 전체를 뒤집어놓을 수 있을 터.”
손가락을 뻗어 데온 하르트가 놓은 장수 말을 툭 건드렸다.
“이전까지의 게임은 지금을 위한 것이었겠지?”
“…….”
“아, 이 질문에는 굳이 답할 필요 없다. 그저 과인의 생각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니. 그런 의미에서….”
차분한 눈동자가 붉은 눈을 직시했다.
“과인의 눈엔 이 ‘군단장’의 죽음이 그대의 목적인 듯한데.”
“…….”
장수 말이 머리를 짚은 손가락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기어이 툭 쓰러진다. 고요한 공간 탓인지 쓰러지는 소음이 제법 컸으나, 둘 중 누구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핏빛을 머금은 듯한 눈동자가 거북하지도 않은지, 그녀는 데온 하르트의 내면을 꿰뚫을 듯 보며 그간 게임을 진행하며 쌓아온 의문을 입 밖에 냈다.
“그대는 정녕 마계의 편이 맞나?”
“…….”
“이건 질문이 맞으니 대답하도록.”
“……전하의 눈에는.”
데온이 싱긋 웃었다.
“제가 인간의 편으로 보이십니까?”
“……흑백논리로 몰아가지 말거라. 세상에는 양분할 수 없는 것들이 많거늘, 이리 선택지를 줄인다 하여 과인이 넘어갈 줄 아느냐. ……그리고 끼 부리지 말라 했을 텐데.”
“…….”
웃음은 황당한 감정 뒤에 숨어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잠시 옆으로 굴러가는가 싶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온다. 길게 느껴지는 침묵 끝에 속삭이듯 흘러나온 답은 짧았다.
“……저는 인류의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복수자’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복수?”
연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산국을 건드리는 것이 복수라고?”
“정확하게는 ‘인간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복수입니다.”
“무슨…….”
인간계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가 복수할만한 것이라면 가족의 죽음과 연관된 것이 전부 아니던가.
“복수는 제국을 무너뜨린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차고도 넘친다고 생각한다만.”
“뭐… 전하께서 알고 계신 것만 생각한다면 그렇겠죠.”
데온 하르트가 인간계를 건드는 이유는 제 운명을 쥐고 흔드는 세계에게 엿을 먹이기 위한 것이다. 인류는 세계가 가장 아끼는 종족으로 추측되니까. 어디까지나 추측이라지만 다른 종족들은 죄다 어두컴컴한 심연에 몰아넣고 인류만 태양 아래에 둔 것을 보면 아마 맞겠지.
조금은 지친 듯 쓴웃음이 떠올랐다.
“제게 남은 복수 대상은 마왕입니다.”
“……!”
“그리고 엿 먹이고 싶은 대상은 ‘세계’죠.”
앞뒤 전부 잘라먹고 핵심만 뱉은 말에 산국의 왕이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크게 놀란 모양인데, 한 나라의 왕이나 되는 자가 동요를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가만히 그녀를 보던 데온이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그래도 인간계가 마족에게 먹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지?”
그야, 그전에 죽을 테니까.
복수 대상으로부터 탄생한 놈들이 뭐가 예쁘다고 인간계를 거저 얻는 꼴을 두고 보겠는가.
대답 없이 싱긋 웃기만 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연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무슨 진실이 더 숨겨져 있는지 모르겠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군.”
“…….”
“그대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데온 하르트는 그저 미소 지었다. 예쁜 미소와 달리 웃는 눈매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가 광기를 품고 번들거리는 것이 언뜻 비쳤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자다. 등골을 타고 달리는 섬찟한 감각에 연화는 테이블 아래, 무릎 위에 얹은 손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눈빛에서 선명한 경계심을 읽은 데온 하르트가 웃었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전 아직 미치지 않았습니다.”
“……아직, 이라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요.”
공기가 가벼워졌다.
뻔뻔한 발언에 연화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이러한 이야기를 당당히 말해준다는 것은 곧 산국의 운명이 끝난다는 것.
쓰러진 장수 말을 툭 굴렸다. 그것이 물길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데구르르 구른다.
물길, 물길이라…….
‘시냇물 정도로는 뭘 하고 싶어도 못할 테고, 강 정도가 되려나.’
하지만 근처에 강이 있다면 이쪽에서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 어디서 제대로 된 수맥이라도 건드린 건가?
말과 별개로 사고를 이어가며 입을 움직였다.
“그대가 둔 이 수로 인해 산국이 크게 흔들리거나 무너진다는 의미인가.”
“…….”
“과인이 이걸 역으로 이용해 ‘장수’를 처리한다 해도 ‘마계의 편인 용사’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몸소 나서서 산국을 무너뜨리겠지.”
“네, 마왕군의 ‘총지휘관’으로서 ‘군단장’이라는 큰 전력을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니까요.”
이 게임 말이 ‘군단장’이라고 확언했다. 군단장이 그쪽에 가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여유로운 긍정에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
“외통수로군.”
가만히 있든 나서서 처리하든, 산국은 무너진다.
데온 하르트가 정답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실지 궁금하군요.”
“…….”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또 보자는 말로 마무리하더니, 이번에는 인사말이 다르다.
침묵하는 산국의 왕을 두고, 오갈 데 없는 선택지만 남긴 채 게임 도구를 정리하여 옆구리에 낀 그가 창문을 훌쩍 넘는다.
다시 고요해진 방 안에 적막만이 맴돌길 한참, 그가 사라진 창문을 가만히 쳐다보던 연화가 통신석에 손을 뻗었다. 이를 악문 듯 낮은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아니, 분명 다시 보게 될 거다.”
통신이 연결되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지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황이 급해 부득이하게 연락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르웨체의 설득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