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64
264. 죽이기 위하여(8)
“……둘을 구분하는 건 의미 없다고 할 땐 언제고.”
“아무래도 지금은 구분해야 할 것 같아서요.”
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는 이미 나름의 배려를 했다. 본인이 나서서 일을 처리한 것이 그것이었다.
‘데온 하르트’에게 일말의 정도 없었다면 오히려 스스로 행하도록 유도하고 몰아붙였겠지. 그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무른 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적출해내려 했을 것이다.
결국 단으로서는 언제부턴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재앙’이 아닌 ‘데온 하르트’라는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정신 차리시죠, 마스터. 결과적으로 혁명군 수장은 확실하게 죽었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죄 없는 사람, 그것도 어린애에게 폭탄을 채워 보내놓고 한다는 말이 그게 전부야?”
“네.”
“미친 새끼.”
“뭐가 문제입니까? 재앙은 그런 걸 가리지 않는데. 게다가 이미 지금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휘말려 죽었습니다. 개중에 어린아이들 또한 없지는 않을 테고, 죄 없는 사람은 더더욱 많겠죠. 왜 이제 와 위선입니까?”
숨이 턱 막힌다. 데온은 질식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의도하고 행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것이 같지는 않지.”
“결과가 같으면 의도가 무슨 상관입니까?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사람은 이미 죽었고, 돌이킬 수 없는데.”
언제나 외부를 향하던 날카로운 혀가 데온 하르트를 노린다.
하나의 비수가 되어 매섭게 저를 헤집는 말에 데온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착잡한 감정 속, 세상을 담기 위해 열린 눈에 들어온 것은 넘실거리는 핏물이었다. 아래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차오르는 핏물.
그렇지 않아도 꾸준히 오르던 수위는 이번 일로 탄력을 받은 듯 무릎까지 집어삼키고 허벅지를 노리듯 출렁이고 있었다.
“……지금 가장 거지 같은 게 뭔지 알아?”
느린 음성이 나왔다.
시선을 올려 침묵하는 단을 보던 데온이 끝내 더는 못 보겠다는 듯 고개 자체를 들었다. 답답한 마음처럼 꽉 막힌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내가 그 새끼랑 똑같은 인간이 된 것 같다는 거야.”
“…….”
“그리고 너 역시도.”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단의 얼굴에 공작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저를 짓누르는 피로에 못 이겨 침대에 걸터앉은 데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억눌린 목소리가 시린 감정을 품고 떨어졌다.
“나가.”
“…….”
“나가라고. 안 들려?”
단은 말없이 허리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어디를 가야 할까.
막사를 나온 단은 곧장 걸음을 떼는 대신 고개를 들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가 맑은 하늘을 품었다.
‘내게 배정된 막사에 돌아가고 싶진 않은데.’
혼자 조용한 곳에 있게 되면 이런저런 상념이 몰려올 것 같다. 그냥 산책이라도 할까.
……일단 걸어보도록 하자. 특정한 목적지 없이 발을 뗐다.
긴 산책이 될 것 같던 걸음은 생각보다 빨리 멈췄다.
“단?”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으니까. 단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뭐 하냐?”
세상에 걱정거리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단순한 얼굴이 보였다.
“……밀란 경.”
“허억?!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여기가 미친개들의 구역이었나. 건조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고 있으려니, 밀란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디서 처맞고 온 거야?! 누구야! 누가 때렸어!”
“뭐? 단이 빌어먹을 마족놈들에게 처맞고 왔다고?!”
“우리 제자가?”
“이거 아무래도 특훈이 필요할 것 같은데…!”
밀란의 호들갑을 듣고 여기저기서 기사단원들이 몰려든다.
삽시간에 인파에 둘러싸인 단은 이러다 뚫리겠다 싶을 정도로 뺨에 쏠린 시선에 새삼 얻어맞은 자리가 의식되어 손을 올렸다. 그 새 탱탱 부은 뺨이 만져지고, 뒤늦은 통증이 밀려왔다.
“아.”
“아주 시퍼렇게 부었네!”
“보라색에 파란색에 빨간색까지… 뺨에 무슨 물감 풀어놓았냐?”
그렇게 심한가.
하긴 맞았을 때 머리가 떨어지는 줄 알았지. 입안도 터졌고.
‘용사가 분노하여 때린 것 치곤 약하지만.’
그 와중에 나름대로 힘 조절을 했던 모양이다. 만약 힘 조절에 실패했거나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정말 머리가 떨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머리 자체가 터졌을지도.’
피 맛이 느껴지는 부분을 혀로 쓸어본 단이 문득 양어깨를 덥석 잡는 손길에 눈을 들었다. 진지한 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냐?”
“…….”
“어떤 새끼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
전투할 때 외에는 보기 힘든 모습.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비죽 웃었다.
“말씀드리면, 복수해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
삐뚠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입을 다문 단은 이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마스터가 그랬습니다.”
“……대장이?”
“네.”
“…….”
어깨에 얹혀있던 손이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대로 한 걸음 물러선 밀란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안 혼내주시는 겁니까?”
“대장이잖아…….”
당황한 것은 밀란뿐만이 아닌 듯 주위가 술렁였다. 기사단원들이 저마다 눈빛을 교환했다.
“누구라고?”
“대장이래.”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인데… 대장이 그랬다고? 그럴 리가…….”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팔불출 부모나 할 법한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클레터가 고개를 들고 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너 무슨 사고 쳤냐?”
“…….”
“사고 친 거, 맞지? 우리 대장이 좀 까칠하긴 해도 자기 부하들에겐 어지간해선 손을 안 대거든.”
단은 대답 없이 슬쩍 눈을 굴렸다. 그의 침묵을 대신하듯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맞아. 전투가 아닌데도 약을 할 때나 좀 때렸나?”
“얼굴에 손이 안 닿아서 등짝을 때렸었지. 기세는 무섭지만 그래도 귀여웠는데…….”
“아프지도 않았어…….”
화제를 다 흐트러뜨리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것들.
낮게 혀를 찬 클레터가 다시 단을 보았다.
“그래서 무슨 사고를 친 거냐?”
“…….”
“대장이 네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 정도면 어지간히 화가 났다는 뜻일 텐데…….”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멱살이 잡혀 있었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단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프티 기사단원 중 가장 침착하다는 클레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멱살을 쥔 손을 짤짤 흔들었다.
“감히 대장을 화나게 해?!”
“……일방적으로 맞은 건 이쪽입니다만….”
“네가 무슨 잘못을 했겠지!”
“…….”
틀린 말은 아닌데…….
저들은 대장에 대한 신뢰가 두텁구나. 데온 하르트가 살인을 저질러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외칠 듯한 기세에 단의 표정이 묘해졌다.
***
막사를 나가 멀어지는 기척을 느끼던 데온은 그제야 두 발을 침대 위에 올리고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두 무릎에 얼굴을 묻자 아직은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듯 피가 수위를 낮춘다. 그럼에도 숨이 막혀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시발.”
좆같은 상황만 이어지다 보니 기껏 줄인 욕이 다시 늘어버렸다.
……결국 전부 나 때문이라 할 말은 없지만.
숨통을 틔워줄 무언가,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럴 땐 정신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미친개들을 곁에 두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지곤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데온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통신석을 들었다.
그리고 멈칫- 새삼 실감한다. 난 마음 놓고 연락할 상대가 없었구나.
그나마 리리넬이 다루기 쉽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 이 빌어먹을 상황은 리리넬의 행동 때문이기도 하니…….
“하하.”
스스로의 꼴이 우스워 내뱉는 조소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상대는 하나였다. 꺼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꽃에 바람을 불어넣어 줄 상대. 데온은 통신석을 조작했다.
– 데온?
거의 신호가 오자마자 바로 받은 듯, 기다릴 것도 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럴 때는 차라리 복수에 매달리는 편이 낫지. 복수심에 기름을 부어 줄 이의 익숙한 목소리에 데온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 무슨 일이야? 뭔가 큰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 그럼?
“…….”
침묵이 흘렀다.
사실상 충동적으로 연락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던 데온이 끝내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마왕은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느긋이 상대가 운을 떼길 기다리며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어내던 그는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 그러고 보니 혁명군의 수장이 죽었댔나…….
“…….”
– 수장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니 당분간 그쪽이 날뛸 일은 없겠네. 거슬리는 세력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 일도 한결 편하게 흘러갈 테고. 축하해.
태연한 목소리가 은근하게 신경을 긁어놓는다.
아마 알면서 그런 것일 테지. 눈치는 빨라 가지고. 데온의 입꼬리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올라갔다.
“소식이 빠르시군요.”
– 2군단장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아하.”
언제부턴가 정보를 보내는 빈도가 줄어든 드벨라니아 말이지.
데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개의치 않는 듯, 침묵 속에서 한결같은 목소리가 일상을 논했다.
– 창술 연습은 잘하고 있어? 뭐, 지금쯤이면 다 익히고도 남았겠지만.
“…….”
– 다음에 돌아오면 활을 가르쳐 보도록 할까.
“…….”
이후로도 몇 가지 실없는 말을 늘어놓던 마왕은 이내 시간을 이유로 통신의 끝을 고했다.
데온 역시 초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순순히 수긍하고. 마무리 인사와 함께 통신을 끊으려던 마왕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 아, 그래. 말하는 걸 깜빡했네. 네게 내렸던 금지령은 철회했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은 마음껏 약을 해도 돼.
“…….”
– 그럼 이만.
숨구멍을 뚫어주는 발언을 끝으로 막사를 채우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서 가만히 꺼진 통신석을 들여다보던 데온은 그것을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았다. 단이 뺨을 맞았을 때부터 일반적인 인간계의 식물처럼 바짝 굳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괴식물이 그제야 슬금슬금 움직였다.
“끠액.”
“어, 이제 괜찮아. 화 안 났어.”
“끩.”
“그래그래.”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위로하는 것 같아 받아주는데, 통신석에 다시 신호가 들어왔다.
괴식물이 눈치 좋게 통신석을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든 데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통신한 마왕은 아닐 테고, 누구지?
“누구….”
– 데온 님!
“……리리넬?”
타이밍이 썩 좋지 않은데. 아니, 마왕과 통신한 이후에 연락이 왔으니 나쁘지 않다고 봐야 하려나.
목소리를 들으니 단이 저지른 일의 핵심이 리리넬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절로 표정이 굳지만, 그래도 감정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경솔한 언행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리리넬이 쓸모 있는 패라는 것을 되새기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왜 연락했어?”
– 마왕님께서 지금은 연락해도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 말씀하셔서요!
“아…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보네.”
– 음… 아뇨, 마왕님께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어, 그래…….”
그럼 왜 연락했냐. 순간적으로 치솟은 말을 재빨리 눌러 삼켰다.
‘……대충 알 것 같네.’
혁명군 수장을 성공적으로 제거했으니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겠지.
마왕의 충고도 이해가 간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리리넬이 칭찬받을 생각에 들떠 혁명군 수장 건을 언급하기라도 했다면 역효과가 났을 것이다. 그걸 그새 충고해두다니, 마왕도 참 빠르지.
‘그럼에도 리리넬에게 연락을 종용한 것은…….’
이 녀석이 유독 나를 따라서 그런 것일까.
나쁜 의도 없이 순수하게 저를 따르는 이가 있다는 것은 기댈 곳 없이 위태로운 심리 상태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테니까. 게다가 리리넬은 거의 맹목적인 수준이기도 하고.
어쩐지 마왕의 의도를 알 것 같아 데온은 잠시 통신석을 내려다보았다.
“리리넬.”
– 네, 데온 님!
“……언젠가….”
무심코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사실 이건 혼잣말에 가깝다.
상념에 잠겨 잠시 말을 멈췄다가 느리게 뒷말을 뱉었다.
“……너도 날 싫어할 날이 오겠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괜히 정을 붙여봤자 이쪽의 손해일 터.
– 네? 그럴 리가요.
당연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듯한 음성에 드물게 리리넬의 목소리가 굳었다.
데온 님, 잘 들으세요. 체념 어린 혼잣말에 진중한 답이 뒤따랐다.
– 설령 저를 죽이려 들어도, 저는 데온 님을 좋아할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