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75
275. 손해뿐인 결과(1)
영웅들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은 괴식물이 줄기로 데온을 노렸던 놈들의 가슴을 꿰뚫는다.
흠칫 놀란 영웅들이 경계하는 사이, 데온은 벤과 단을 훑더니 태연히 무릎을 누른 손을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의 대화를 끝으로 린델을 안중 밖으로 밀어낸 듯, 재빨리 다가온 영웅들이 그를 뒤로 빼돌렸음에도 흘긋 시선을 던지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열심히 날뛰는 괴식물을 잠시간 지켜보던 붉은 눈동자가 벤과 단을 향했다.
분명 무미건조한 눈빛과 어조이건만, 왠지 모르게 어렴풋한 원망이 느껴지는 것 같아 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벤은 곧장 고개를 숙인다.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죄송합니다!”
“벤의 목걸이가 있으니 내 위치를 모르진 않았을 텐데, 이유는?”
그제야 단이 입을 열었다.
“르웨체의 병력이 생각보다 집요하더군요.”
“……제국이나 에스페라네스도 아니고, 르웨체가?”
“네, 중간에 그쪽 지휘관에게 통신이 오지 않았다면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신이라면… 아마 그거겠군.”
“네.”
르웨체가 공격당했다는 소식.
에드가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다. 데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당황한 듯했습니다.”
“뭐… 곧바로 움직임을 보일 줄은 몰랐겠지.”
“확실히 대처가 빠르긴 했죠.”
완벽한 응징은 아니어도 일단 엿 먹이는 것 하나는 확실히 성공한 것 같다. 단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대체 무슨…!]당황과 배신감, 분노가 뒤섞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모르긴 몰라도 마왕군이 태혼국의 경계선을 이용해 공격했다는 건 확실히 전달받은 모양이었지. 괜히 지휘관이 아닌 듯, 혼란스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곧장 병력을 거두어 귀환하는 판단력을 보였더랬다.
잠시 그때의 상황을 되짚던 단이 문득 옆을 스쳐 가는 바람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데온의 분위기가 누그러들기만을 기다렸던 듯, 순식간에 달려 나간 벤이 데온의 몸 상태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온 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신호가…!”
“괜찮아.”
“상처는 없는 것 같지만… 안색이 안 좋습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한데… 방해꾼이…….”
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영웅들의 뒤편에서 저를 향한 시선을 느낀 린델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하필 지금 마족이 오다니.’
영웅과 마족의 충돌은 자제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기본인데.
‘……그래봤자 하나다.’
이쪽은 용사를 사냥하기 위해 영웅들을 쓸어모은 상태고.
이미 용사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를 잃었고, 그나마 남은 수마저 식물형 몬스터를 상대하며 줄어가고 있다지만 마족 하나 더해졌다고 어찌하지 못할 수준까지는 아니다.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어.’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다. 이대로 실패한 채 돌아간다면 인류의 마음에 체념이 싹을 틔우겠지. 다음을 기약하기에는 다들 너무 지쳐있을 터.
어깨에 박힌 단검에 손을 올렸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마지막 자비이자 경고라는 것은 잘 알지만, 이쪽도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라서.
“전원, 저는 무시하고 공격하….”
콰콱!!
발 앞에 창 두 개가 연달아 날아와 꽂혔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린델이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아, 맞아.’
숨은 조력자가 더 있었지.
창이 날아온 곳을 따라 올라간 시선이 주위를 헤매다가 영웅들의 도움으로 어느 한 곳에 고정된다. 영웅들의 말로는 후드를 푹 눌러썼다는데 그건 모르겠고, 일단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창을 던진 사람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아 절로 침음이 나왔다.
‘……저 거리에서 이 정도의 힘을 담아 던졌다고.’
또 다른 마족이거나 영웅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용사만 상대해도 힘들 판에 식물형 몬스터에 원거리 지원까지.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물러갈지 밀어붙일지 고민하는데, 곁에 서 있던 영웅이 말을 붙였다.
“물러가야 합니다.”
“…….”
“그렇지 않아도 부족하던 병력이 몬스터에 의해 더 줄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면 린델 님을 지키며 싸우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
“황태제 전하께서 린델 님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물러가는 편이 낫다.
저 몬스터가 ‘지키는 것’에 중점을 둬서 그렇지, 만약 공격하는 쪽에 중점을 두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수를 잃었을 것이다. 원거리 조력자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라도 했다면 상황은 더 불리하게 흘러갔을 터.
괜히 시간을 끌다가 적들의 적극성을 높일까, 린델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누르고 입을 억지로 열었다.
“……이쯤에서 물러가죠.”
“알겠습니다.”
***
영웅들이 물러간다.
데온은 적들이 물러가든 말든, 창을 던진 이가 누구든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저 비척비척 괴식물에게 다가갔다. 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
또 이 모양 이 꼴이다. 나는 왜 늘 이런 건지.
붉은 눈동자가 부서질 듯 흔들린다. 스스로도 동요하고 있음을 알아 눈을 꾹 감았다 떴으나 동공의 흔들림은 여전했다.
“……역시 데려오지 말 걸 그랬어.”
힘이 다한 듯 점점 시들해지는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톡, 손끝에 줄기가 맞닿았다.
차라리 평범하게 적의 손에 죽거나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이런 상황이 닥쳤다면 지금처럼 동요하지는 않았을 것을.
이렇게 또 하나의 생명이 나를 위해 희생했다. 그 명제가 너무도 숨이 막혀서, 데온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이름조차 없는 괴식물만 눈에 담았다.
“너도 이렇게 내 악몽만 늘려주고 가는구나.”
크루엘 이후로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이제 내 손으로 목을 조르면 누가 날 막아줄까.
녀석이 점점 누렇게 변하더니 이내 작아진다. 아예 갈색빛을 띠고 있는 모습에 끝을 직감한 데온이 한 걸음 물러선 순간, 줄기가 뻗어왔다.
톡.
“끠액.”
익숙한 울음소리가 녀석의 마지막이었다.
파앗, 작은 빛이 터지더니 괴식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작은 묘목이 자리에 남는다. 데온은 줄기가 닿았던 뺨을 쓸어내리다가 무릎을 굽혀 앉아 더 이상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않는 묘목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스터.”
“왜.”
“그….”
“……됐고, 이거나 챙겨.”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단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묘목을 옮겨 담을만한 곳이 필요한데, 화분 같은 거 없으십니까?”
“화분이라면 여기 그 녀석이 쓰던… 아.”
깨졌지.
조금 멍한 눈이 괴식물이 깨고 나온 화분 조각을 바라본다. 그 눈빛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단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대체할만한 것이….”
“화분이라면 여기 있습니다만.”
“아, 잘됐……?”
“빌려드리는 건 곤란할 것 같군요.”
“…….”
잠깐… 이 전쟁터에 마스터 말고 화분을 들고 다니는 미친 인간이 있다고?
아니, 그 전에… 목소리 자체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의 것이다. 단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데온도 이변을 느낀 듯 고개를 들고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있었다.
로프티 기사단원들조차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 이의 등장에 불청객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제게 쏠린 시선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빈 화분을 든 여인이 태연히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귀인.”
“……주술사.”
데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구원교 소탕 때, 딱 한 번 만나서 같이 일을 진행했던 자다. 이름이 ‘란’이었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발언과 제게 남겼던 쪽지가 상당히 인상적이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지?”
“묘목을 가지러 왔습니다.”
“……이걸?”
“네.”
“왜?”
“세계가 남긴 것이니까요.”
역시 평범한 주술사는 아니었네.
설명이 필요하다. 데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전쟁이 계속되는 이곳에 남겨뒀다면 필시 사달이 날 겁니다. 그 전에 미리 옮겨 두는 편이 좋겠지요.”
“어디로 옮기려고? 인간계에 안전한 곳이….”
“에스페라네스.”
“……그건 내 앞에서 해선 안 될 말 같은데.”
에스페라네스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과 다름없다. 마왕군이 에스페라네스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혹은 공격해도 내부까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
엄연한 마왕군 소속인 데온의 앞에서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럼 에스페라네스를 공격하실 겁니까?”
“그러게. 생각하고 보니 이번에 몰려온 인간계 병력 중에 에스페라네스도 섞여 있어서 그냥 두고 보기엔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하시는군요.”
“…….”
데온은 잠자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묘목을 가져간다고?”
“네.”
“내가 싫다고 하면?”
“…….”
주술사 란은 가만히 데온을 돌아보았다.
침묵을 배경으로 허공에서 잠시 시선이 오간다. 그녀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혹, 미련이 남으신 겁니까?”
“…….”
“이건 더 이상 귀인께서 알던 식물이 아닙니다.”
“……알아.”
얘가 대체 무슨 약을 빨았는지는 몰라도 대가가 심했다.
……그러고 보니 대체 뭘 했길래 이런 걸 할 수 있었던 거지?
답은 주술사에게서 나왔다.
“귀인의 식물이 세계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말하는 주제에 잘도 찾아왔… 아니 잠깐, 세계의 씨앗이라고?”
요정왕이 오염되었다며 히엔에게 버리다시피 넘겨버린 그 씨앗?
“세계에 큰 영향을 줄 무언가의 탄생은 점에 걸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모르셨나 봅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세계가 남긴 씨앗을 품고 있다가… 적당한 순간에 흡수해서 사용했다 이거지…?”
“흡수했다기보다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씨앗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대가로 일시적인 힘을 얻었다는 쪽이 더 알맞겠지요.”
불룩하던 녀석의 화분이 떠오른다.
그리고 영양제를 좀 줬다는 히엔의 말도.
……둘이 작정하고 계획했구나. 붉은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에 더 감정을 불태우기에도 지쳐 분노하지는 않았다.
“묘목을 마계에 가져가봤자 다시 마기에 오염되기만 할 겁니다. 설마 귀인의 식물이 희생하여 정화한 것을 다시 망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말은 바로 해야지. 그 녀석은 씨앗을 정화하기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해 희생한 거야.”
그래서 더 참담한 거지만.
“……어쨌든, 그래도 기껏 정화된 것을 다시 오염시킬 생각은 없으니.”
“…….”
“가져가.”
“양보에 감사드립니다.”
데온이 옆으로 비켜서고, 그를 지나친 란이 묘목 앞에 앉았다.
미친개들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냐는 듯 기웃거리고 벤이 몸 상태를 살피고 싶은 듯 근처를 서성였으나, 데온은 전부 무시한 채 가만히 서서 묘목을 중심으로 둥글게 땅을 파는 주술사를 지켜보았다.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내려앉은 정적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가만히 땅을 파던 주술사였다.
“귀인의 행동에 세계가 분노했습니다.”
“……그래?”
데온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가호라도 거뒀나 보지?”
목숨과 관련해서는 말도 안 되는 힘을 발휘하는 그 운 말이야.
“그건 아닙니다. 지금의 귀인은 틀림없이 세계에게 필요하니까요. 문제 되는 것은 귀인이 지금까지 일을 벌이며 쌓아온 업보와 세계의 분노입니다.”
“……굉장히 추상적이고 사이비 같은 느낌인데.”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다음 생의 귀인은 유례없을 정도로 고통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 난 또, 뭐라고.”
지금을 살기에도 벅찬데 미래도 아니고, 다음 생을 생각할 여유가 어디에 있겠나.
다음 생이라니, 참 현실감 없는 말이다. 데온이 김샌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심이….”
“음… 있지.”
화분에 묘목을 옮겨 담은 란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시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웃음을 흉내 내듯 휘어진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아?”
너무 늦었다고.
“…….”
“……뭐…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주술사의 눈에 서린 참담함을 들여다보던 데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눈을 조심하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