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76
276. 손해뿐인 결과(2)
그걸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의외인 듯, 주술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데온은 싱긋 웃으며 조금 전 화살에 꿰뚫릴 뻔했던 눈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새빨간 눈동자가 선명히 빛나며 건재함을 드러냈다.
“별건 아니고… 네가 오기 전에 눈을 잃을 뻔했거든. 이게 혹시 그건가 싶어서.”
그녀가 말한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 하기에는 이미 몇 번의 겨울을 거쳤다. 그럼에도 눈과 관련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마 신체 부위인 ‘눈’을 말하는 것일 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가진 주술사가 건넨 진지한 경고였던 탓에 언제나 머리 한구석에 새겨두고 있던 참이었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거슬리고, 그렇다고 신경 쓰기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아 피곤하던 참이었는데.
‘만약 이번 일로 그 위기를 넘긴 거라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 잘 된 거겠지.
그러나 답은 주술사에게서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히 듣던 주술사가 입을 막 열었을 때, 한쪽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별게 아니라니요! 눈을 잃을 뻔하셨는데!”
“엄청 별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 몸 돌보지 않으셔서 속 터져 죽겠는데…! 아이고, 아이고!”
“……어쨌든 멀쩡하잖아. 닥쳐.”
결과적으로 몸에 남은 상처가 없으면 됐지, 왜 그런 반응이란 말인가.
그렇게 다쳐놓고 회복만 되면 다냐며 미친개들이 가슴을 퍽퍽 두드렸으나 데온은 답하지 않고 눈을 돌렸다. 중간에 방해받은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불퉁한 시선이 답을 요구하듯 다시 주술사를 향했다.
잠시 떨어졌던 붉은 시선이 제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주술사 란은 빙긋 웃으며 못 뱉은 말을 꺼냈다.
“제가 드린 경고는 아직 유효합니다.”
“……그런가.”
이번 일이 아니었단 말이지. 아쉽네.
데온이 나직이 혀를 차는 사이, 화분에 흙을 마저 채운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는 듯 더 말을 붙이려는 기색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을 마주하며 운을 뗐다.
“그리고…….”
이걸 말해도 될지 고민하듯 늘어지는 말꼬리.
의문 어린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주변 이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려는 건지 한층 더 소리 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스스로를 저주하는 것도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데온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을 향해 손을 내젓는다. 눈치껏 뜻을 읽은 이들이 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모든 이들이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데온은 란을 돌아보았다.
“……계속해봐.”
“쌓은 업보가 많아 크고 작은 저주를 한 몸에 받고 있는데, 거기서 본인을 지켜야 할 혼이 되레 자신을 공격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
“핏물이 오르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다면 그것부터 그만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말실수를 했다기보다는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마치, 무언가 견디지 못할 압박을 받는 듯한…….
‘아, 천기누설.’
그게 진짜로 있는 거였어?
“음… 조언은 고맙고, 덕분에 궁금한 것도 생기긴 했는데…….”
핏물에 관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라든가. ……뭐, 주술사라 그렇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지만.
하지만 그 전에. 데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굳이 내게 그런 조언을?”
“…….”
“난 네가 그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해야 할 만큼 우리가 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게다가.
“무엇보다 넌 내가 무슨 말을 듣든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잖아.”
“……그래서 말한 겁니다. 저의 발언으로 인해 무언가 바뀌었다면 지금 제가 받고 있을 대가 또한 더 커졌을 테니.”
저는 그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조언을 드린 겁니다.
주술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본인의 행동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정도는 알고 계셔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곳에 온 본 목적도 달성했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묘목이 심어진 화분을 챙긴 그녀가 등을 돌린다. 무언가 더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데온은 끝내 말을 뱉지 못하고 멀어지는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골반 근처에서 찰랑이는 핏물이 거슬렸다.
마침내 그녀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물러났던 이들이 다시 다가온다.
가만히 서서 제게 가까워지는 이들을 보던 데온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어지럽지?’
땅이 파도치듯 일렁이는 것만 같은 기분.
그리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비틀-
“데온 님?!”
“마스터? 무슨…….”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근처에 다가온 벤과 단이 화들짝 놀라 곧바로 손을 뻗어 부축한다. 손에 닿은 열기에 또 한 번 놀란 그들이 서둘러 데온의 이마를 짚었다.
“마스터, 열이 나고 있습니다.”
“신호는 없었는데…… 어째서.”
“……열이 난다고.”
괴식물이 사고를 쳤을 때부터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했더니, 기분 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의 손을 뿌리치고 선 데온이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빡였다.
무려 용사가 되어서 아프다니. 아무리 몸을 막 썼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역대 용사 중 유례없는 인간이 되겠군.’
여태껏 겪어온 상황 중 가장 황당한 상황이야.
조소가 흘렀다. 이유야 뻔했다. 그놈의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지. 정신적인 문제이기에 벤의 마력석 목걸이에도 걸리지 않은 것이리라.
데온 하르트에게 열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미친개들이 얌전히 있을 리 없다. 즉시 놈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의 공백을 채우겠다는 듯,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대장, 아프십니까?!”
“그러게 몸 좀 챙기시라니까요!”
“조금 전 전투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너무 상처를 돌보지 않고….”
머리가 울린다. 데온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차게 식은 손끝에 뜨거운 열기가 닿았다.
“……좀 닥쳐봐.”
“…….”
“지금 피곤해서 그래. 그러니까…….”
“……!”
한번 긴장이 풀린 육체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행히 땅에 고꾸라지기 전에 단이 단단히 받아주었으나, 데온은 아직 데몬교 사태를 잊지 않았다. 크루엘을 떠올리게 만든 괴식물의 행동이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그전부터 쌓아온 스트레스에는 단의 행동이 큰 비중을 차지했기에 몇 번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시도하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얼굴에 짜증이 선명히 드러났다.
‘몸이 무거워…….’
온몸에 돌덩이를 매단 듯 움직임 하나하나가 버겁다.
이것도 용사가 된 이후 처음 느끼는 감각인데, 참 오랜만에 느껴보네.
눈을 반쯤 감은 채 실없는 감상을 떠올리다가 나른히 중얼거렸다.
“나 좀 잔다.”
“……대장!!”
잠깐 좀 자겠다는데 호들갑은.
자고 일어나면 좀 괜찮아지겠지.
……거기까지가 데온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
대장이 기절했다.
잠들긴 개뿔. 이건 누가 봐도 기절이잖아. 축 늘어진 대장의 팔에 슬쩍 손을 얹어본 클레터가 이를 부득 갈았다.
‘열도 나는데.’
용사랍시고 몸을 돌보지 않고 막 사용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희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몇 개의 날붙이가 제 몸을 꿰뚫든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와서 경악했는데.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했던 결심을 잠시 뒤로 미루며 클레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밀란 뭐해? 어서 업어.”
“어…어어!”
냅다 데온을 들쳐 멘 밀란이 방향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려 나간다. 당당한 행동에 다른 놈들도 따라 달려 나가고.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따라 달릴 뻔한 클레터가 그 방향이 아니라는 벤의 중얼거림에 우뚝 멈춰서서 제 멍청한 동료들을 불렀다.
“거기 아니야!”
“아…!”
우르르.
다시 녀석들이 되돌아온다. 방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는 눈빛에 클레터는 벤과 단을 돌아보았다.
대답은 벤에게서 나왔다.
“굳이 움직일 필요 없다. 리리넬 님을 부르면 해결될 테니. 너희가 소란을 떠는 사이 연락을 취해놓았으니 좌표만 찾는다면 금방 오실 거다.”
“……진작 말씀해주시지.”
대장을 내려놓기 전에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놓는 기사단원들의 행동에 동참한 클레터가 맨바닥에 털썩 앉았다. 겨울 이불 수준으로 두툼해진 옷더미 위에 대장을 내려놓는 놈들을 지켜보며 턱을 괬다.
‘…….’
몸이 편해지니 잠시 묻어두었던 상념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대장의 배가 꿰뚫렸던 순간을 곱씹은 클레터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죽을 뻔했지.’
창에 배가 꿰뚫렸다. 심지어 그 외의 날붙이도 급소만을 노려 공격해왔고.
대장이 저희들에게 달려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움직인 탓에 용케 전부 빗나가 꽂혔다지만, 급소만 피했을 뿐이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돌아서서 놈들을 상대하는 대신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채 우리에게 달려오기까지 했으니.
고개를 돌려 어느샌가 옷더미에 파묻힌 대장을 보았다.
“……이번만큼은 못 넘어갑니다, 대장.”
데온 하르트는 ‘제 부하들에게 발목이 잡혀서’ 죽을 뻔했다.
단순히 대장이 죽을 뻔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한데, 그걸 깨달은 순간 자신들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차라리 방해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걸 그랬다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있었다. 클레터는 거기에 동감했다.
‘이러다 정말 대장이 죽든, 우리가 죽든 둘 중 하나는 터지겠지.’
그러니 그냥은 못 넘어간다.
두 번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반드시 날 잡아서 충언을 좀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영웅들이 물러간 시점부터 더 이상 도울 필요가 없음을 느낀 스티그마가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꽂는다. 필요한 순간순간 뽑아서 던지려 했던 듯 그의 양옆과 뒤쪽 바닥에는 창이 수두룩하게 꽂혀 있었다.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레멤베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도우신 것인지요?”
“후배님 상태가 영 아슬아슬해 보여서.”
물론 후배님이 여기서 죽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단다.
가볍게 덧붙인 스티그마가 빙글 돌아섰다. 갈색 눈동자가 노인의 은청색 눈과 시선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손이 먼저 나가버려서 말이야.”
“데온 하르트를 상당히 아끼시는군요.”
“부정하진 않겠다만, 그보단 눈썰미가 좋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구나.”
봐라, 아슬아슬하다 했더니 결국 터지지 않았나.
어린 외형의 마족이 나타나 쓰러진 데온 하르트와 그의 주치의로 보이는 마족만 데리고 사라진다. 버려졌다며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구는 개새끼들을 흘긋 돌아본 스티그마는 창 하나를 뽑아 들었다.
“정신적인 부분이 터진 것 같던데.”
“…….”
“주변인들이 잘 챙겨주길 바라야겠네.”
후배님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나의 길 끝이 너의 길 중간과 맞닿을 때까지 나아가야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는데 중간에 주저앉아버리면 곤란하다.
그 이후는 후배님의 몫이겠지만.
“그 전에 귀찮은 녀석들부터 떨쳐내야겠구나.”
“이번에도 직접 하시렵니까? 이 늙은이에게 맡기지 않으시고요.”
“늙은이에게 영웅들을 맡기는 쓰레기가 되고 싶진 않아서.”
몇 번 가볍게 돌린 창을 들고 한 방향을 겨눠 팔을 뒤로 당겼다.
흑표범이 사냥 직전에 근육을 긴장시키듯, 옷 아래 감춰진 촘촘한 근육이 한껏 당겨졌다가 폭발적인 힘을 품고 손에 든 것을 날린다. 화살보다 빨리 날아간 창이 이쪽으로 다가오던 영웅들의 발치에 정확히 박혔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노골적인 경고에 영웅들이 흠칫 물러섰다.
“저들도 참 끈질기지. 그냥 정체 모를 조력자가 있다는 선에서 물러가면 될 것을, 뭐하러 정체까지 확인하려 들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요.”
“그건 그렇다만…… 어쨌든 경고를 무시할 것 같진 않으니 우리도 이만 이동하도록 할까.”
숲과 닮은 녹색 머리카락이 레멤베르를 스치듯 지나친다. 돌아보지도 않고 산을 내려가는 스티그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레멤베르가 뒤를 쫓아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글쎄. 조만간 후배님이 일을 크게 터뜨려줄 것 같아서. 그때까지 좀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일단 발길 닿는 대로 가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