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86
286. 말도 많고 탈도 많은(5)
“끄륵-.”
본능적으로 올라간 손이 저를 꿰뚫은 팔을 잡는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얼마 못 가 생명의 불씨가 꺼지고, 팔을 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태연히 손을 빼낸 마왕은 손에 잔뜩 묻은 피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소매에 달린 것이니 언젠가 떨어지겠지 싶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떨어질 줄이야.”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아니, 어떻게 보면 오늘 떨어져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피를 닦은 손수건을 시체 옆에 버린 뒤, 통신석을 꺼냈다.
– 예, 마왕님. 무슨 일이십니까?
“1층 D구역에 시체가 하나 있을 거야.”
– ……예?!
“그거 내가 한 거니 소란 떨지 말고 와서 치우도록 해. 그리고 이 구역에서 중앙 정원으로 향하는 최단 루트에 있는 마족들 전부 물리고. 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전부 죽여버릴 거니까.”
통신석 너머에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들렸으나 마왕은 더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시체 치우기 싫으면 알아서 잘하겠지. 설령 일 처리가 늦어 자리를 뜨지 못한 마족이 있다 해도 죽여버리면 그만이니 상관없다. 주요 전력들은 연회장에 있는 상황에서 마주친 마족이라면 사용인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
대체할 수 없는 전력도 아니고, 그 정도는 죽여도 별문제 없다.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그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부서져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커프스단추가 내딛는 걸음에 치여 볼품없이 튕겨 나갔다.
***
그리고 마왕은 정말 예고한 대로 마주친 모든 마족들을 죽이며 중앙 정원에 갔다.
인간계의 꽃으로 가득한 공간에 피 냄새가 들이쳤다. 데온 하르트의 정신 건강을 위해 채워두었던 꽃들이 지지 않겠다는 듯 외형만큼이나 화려한 향을 뿜어내지만, 피 냄새를 밀어내기엔 역부족인 듯 온실은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목적으로 한 바가 있는 듯, 마왕은 주변 한 번 둘러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장식용을 보이는 큰 돌 앞에 섰다.
그 위에 손을 얹자, 이내 시야가 바뀌었다.
저 멀리, 난데없는 방문 신호에 드워프들의 수장이 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친절하게도 가만히 서서 그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준 마왕은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품에 챙겨온 마력석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드워프 수장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로 마력을 감추는 도구를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뭐?”
“최대한 빨리.”
갑자기 찾아와서 뭐 이런…….
심지어 대놓고 피 냄새까지 풍기고 있다. 아무리 그쪽이 강하고 우리의 기술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뻔뻔하고 무례한 상대의 행동에 드워프 수장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싫….”
“요새 무기를 제값을 못 받고 팔아서 돈이 부족하댔나.”
제값을 못 받고 파는 이유는 지난번의 회의장 난입 사건 때문에 그렇게 된 거고.
“드워프는 돈의 대부분을 마력석을 사는 데 쓴다고 알고 있는데…….”
“……협박인가? 설마 유통을 막으려는…!”
“응? 그럴 리가.”
더 좋은 방법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마왕이 싱긋 웃었다.
마력석을 만족할 만큼 못 구하고 있다 했으니, 아마 마력석에 꽤나 목이 말라 있겠지.
“질 좋은 마력석 두 상자를 주지. 그러니 어때, 만들어줄 생각이….”
“당장 시작하지.”
……차고도 넘치는군.
즉시 드워프 수장이 망치를 들었다. 황당하다는 듯한 마왕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력을 감추는 도구라 했으니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종류여야 하겠지? 장신구 종류가 좋을 것 같은데, 뭘 원하나? 반지? 목걸이? 팔찌? 혹은… 브로치?”
“…….”
“왜 대답이 없나? 어서 말해 보게!”
잠시 그를 보던 마왕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튼튼한 목걸이로 하지. 완성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뭐… 자네가 돕는다면 하루 안에도 가능….”
“1시간.”
“……뭐?”
“적극적으로 도울 테니 1시간 안에 완성해줬으면 하는데.”
“미쳤나?”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드워프 수장이 망치를 내려놓았다.
“자네의 양심은 안녕하신지 궁금하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마력석 한 상자 더.”
“……하지 않지! 양심은 너무 건강한 것 같아서 물어봤네! 마왕이라면 좀 썩어 있어야 정상 아닌가!”
지금 바로 시작하자고!
근처에 놓여 있는 작업 판에 걸어가 받은 마력석을 내려놓은 드워프 수장이 어서 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 판을 탕탕 두드린다. 재차 웃음을 터뜨린 마왕이 걸음을 뗐다.
“한데, 마력을 감추는 도구는 왜 필요한 겐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춘 적 없었으면서.”
“뭐…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평소 마력을 낭비하던 습관과 데온 하르트를 살린 것, 그리고 최근에 벌인 마물 사냥이 겹쳐져 지금의 결과를 낳았달까.
불편하긴 하지만 당장은 후회하지 않는다. 애초에 아껴야 할 마력을 마물 사냥에 쏟아부은 것도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이니까. 만약 이번 용사를 넘어 다음 용사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그때 후회하겠지.
‘나는 이번 용사에게 모든 것을 걸었으니.’
분주하게 움직이며 이것저것 준비하던 드워프가 시킬 일이 있는 듯 이쪽을 쳐다본다. 마왕은 싱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에 마력을 부어주겠나? 내가 가공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력석도 상당히 사용해야 해서.”
“그래.”
“혹시 몰라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자네가 돕는다고 자처한 거야. 아주 열심히 부려 먹을 테니 나중에 불평하지 말라고.”
“그걸로 시간이 단축된다면야, 얼마든지.”
***
드워프 수장은 정말 시간 안에 일을 해냈다.
단순한 디자인의 목걸이를 받아든 마왕이 그것을 천천히 살폈다. 가운데 박힌 마력석이 기묘한 빛을 담은 채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 눈에 담겼다.
탈진한 듯 엎어져 있던 드워프 수장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 드나?”
“뭐… 애초에 성능이 중요하지 디자인이 중요한 건 아니어서. 튼튼한 건 마음에 드네.”
“어지간해서는 줄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고 그렇게 당기지는 말고!”
목걸이 줄이 팽팽해지도록 당겨보던 마왕이 피식 웃고는 목에 걸었다. 셔츠의 윗단추를 조금 풀어 마력석 부분을 옷 속에 집어넣은 뒤 다시 잠그자 목걸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초기의 차림새가 되었다.
적어도 어딘가에 걸려 끊어질 일은 없겠군. 옷 위로 목걸이가 있는 부분을 꾹 눌러본 그가 드워프 수장을 돌아보았다.
“수고했어. 마력석 세 상자, 확실히 보내두도록 하지.”
“그래. 이제 돌아가는 건가?”
“그래야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시간을 확인한 마왕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드워프 수장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인간은 잘 있나?”
“…….”
뚝- 마왕의 손이 멈췄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 속에서 그가 드워프 수장을 돌아본다. 역안이 읽을 수 없는 빛을 띤 채 상대를 꿰뚫을 듯 쳐다보았다.
“그 질문은 좀 의외네.”
“…….”
“넌 ‘인간’에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마저 옷을 정리한 마왕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분위기와 달리 여상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흘러나왔다.
“드워프 수장은 과거를 보았던가.”
“…….”
“무엇을 보았기에 한낱 인간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아, 긴장하지 말고.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그제야 표정을 굳히고 있던 드워프 수장이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몇 번이고 무너지고, 지쳐 쓰러지고, 힘겨워 죽으려 하면서도.”
“…….”
“끝끝내 일어나 꾸역꾸역 나아가는 멋진 영혼을 보았지.”
그리고 속을 읽을 수 없는 역안과 눈이 마주쳤다. 한 인간을 통해 마왕의 과거를 엿본 드워프 수장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자네, 정말 쓰레기더군.”
“푸핫.”
마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키득거리던 그는 짐짓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새삼스러운 말이네.”
내가 언제 쓰레기가 아닌 적이 있었나.
“…….”
“아무튼 난 이만 가지. 배웅은 안 해도 돼.”
어쩐지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감이 뭔가 사고가 터질 것 같달까.
마왕은 곧장 몸을 돌려 제 영역으로 귀환했고.
“……하.”
얼마 못 가 본인의 직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일까.”
분위기가 엉망이 된 연회장을 둘러본 눈이 이내 데온을 향한다. 그의 입가에는 미처 닦지 못한 피가 묻어 있었다.
***
마왕이 마력을 감추는 도구를 착용했다고…….
그렇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화려한 커프스단추의 이미지를 밀어낸 데온이 툭툭 테라스 난간을 두드렸다.
“……대체 언제부터?”
“음… 정확한 날은 모르겠지만, 대충 데온 님이 인간계에 나간 지 얼마 안 된 시기였을 거예요.”
“그래?”
슬슬 마력이 부족하다던 마왕이 말이 떠오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데온은 느리게 질문을 던졌다.
“전에도 마왕이 마력을 감춘 적이 있었어?”
“아뇨, 적어도 제 기억상에서는 한 번도 없었어요.”
“……정말인가 보네.”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 의심받을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감춘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마력을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 고작 이쪽의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서 그러기엔 손해가 너무 크다.
무심코 튀어나온 혼잣말에 리리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잠시 혼자 있게 해주겠어?”
“아, 네! 푹 쉬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리넬이 서둘러 테라스를 빠져나간다. 혼자 남은 데온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난간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충돌음을 만들어냈다.
어디서부터 생각을 이어가면 되려나.
‘……마왕이 마력량이 적다는 확신에 대한 근거.’
갑자기 마력을 감췄으니 다른 마족들이 의문을 갖지 않을 리 없다. 일부 교활한 군단장들은 의심하기 시작하겠지. 마왕이 이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마력량이 예전과 같다면 그런 의심을 받느니 애초에 감추지 않았겠지만…….
예전 같지 않으니까.
그래서 감췄겠지. 적은 마력을 들킬 바엔 의심을 받더라도 감추는 것이 더 낫기에, 마족들의 대거리를 막기 위해서 그랬으리라.
마왕은 마족들에 대해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다. 이미 데온은 근처에 있는 몇몇 마족들을 통해 이에 대한 확신을 어느 정도 얻었다.
‘마왕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마족’의 근원이어서 찬양하고 존중하며 따랐던 거지, 마족은 마음만 먹는다면 마왕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어.’
그러니 약육강식의 사상이 강한 마계에서 마왕의 마력이 적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제법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마왕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귀찮아질 테지.
마력량이 무력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지만 마왕은 누구보다 압도적인 마력으로 유명한 자였다. 그런 이의 마력이 적어진다면 누구든 무의식중에 ‘해볼만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될 테고.
‘……마력량을 들킨다면 일이 제법 재밌게 돌아가겠네.’
때를 봐서 커프스단추를 확 뜯어버릴까.